1547년 9월 29일경 에스빠냐 마드리드 근교의 대학도시 알깔라 데 에나레스에서 태어났다. 1551년 가족과 함께 당시의 수도 발야돌리드로 이주했다가 1561년 새 수도 마드리드로 다시 옮겨갔다. 1569년 문법교사이자 에라스무스 전문가인 환 로뻬스 데 오요스 신부가 펴낸 책에 시 3편이 실렸는데, 이로써 거의 정규교육을 받지 않았으나 이미 풍부한 인문학적 소양을 지녔음을 알 수 있다. 1571년 터키군에 대항한 레빤또 해전에 참전해 왼팔을 잃는 부상을 당한 뒤 이딸리아 각지를 여행했다. 1575년 귀국길에 마르쎄유 근방에서 형 로드리고와 함께 터키 해적들에게 사로잡혀 알제리에서 포로생활을 했다. 로드리고가 1577년에 풀려난 반면, 세르반떼스는 다섯번의 탈옥시도 끝에 노예로 팔려가기 직전에야 에스빠냐 종교단체의 보상금 지원으로 1580년에 석방됐다. 이때의 경험과 이후 투옥의 경험들이 작품 곳곳에 드러나 있다. 1584년 12월 12일 까딸리나 데 빨라시오스와 결혼하고 이듬해 1585년 첫 목가소설 『라 갈라떼아』를 출판했으며, 왕립재정부 근무를 위해 세빌야로 이사했다. 1587년부터 무적함대의 보급공출 세무사로 일했는데, 1592년 무단으로 밀을 판매한 이유로 투옥되었고, 1597년에는 세빌야 은행이 파산하자 공금횡령죄로 수감되었다. 이때부터 『돈 끼호떼』를 쓰기 시작한 것으로 추정된다. 1603년에 수도 발야돌리드로 이주한 뒤 1605년 1월 마침내 마드리드에서 『돈 끼호떼』 1권을 출간했다. 이후 『모범소설들』(1613) 『성스러운 시단의 여행』(1614) 『돈 끼호떼 제2권』(1615) 등과 『8 연극과 8 막간극들』을 출간하며 죽는 날까지 창작열을 불태우다가 1616년 4월 22일 마드리드 중심가의 어느 작은 집에서 향년 68세로 생을 마감했다. 다음날인 4월 23일 뜨리니따리아스 종단 수도원에 묻혔다고 전해지나 유해나 무덤은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