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평론
「동양평화론」으로 본 안중근의 「장부가(丈夫歌)」
최원식 崔元植
문학평론가. 저서로 『제국 이후의 동아시아』 『한국계몽주의문학사론』 『문학의 귀환』 등이 있음. ps919@hanmail.net
* 이 글은 원래 2009년 10월 26일 따롄대(大連大)에서 개최된 한국학중앙연구원 현대한국연구소 주최의 안중근의거100주년 기념학술회의 ‘안중근과 동북아평화’에 제출한 발제문이다. 그뒤 개제(改題)·개고(改稿)하여 『민족문학사연구』 41호(2009)에 실었다. 이번에 다시 다듬었는데, 이것이 정본이다.
1. 동아시아론의 남상(濫觴)
안중근(安重根, 1879~1910) 의사는 너무나 익숙한 이름이지만, 그의 진면목을 제대로 아는 이는 많다고 하기 어렵다. 1909년 10월 26일 오전 9시 30분 하얼삔(哈爾濱) 역두에서, 러시아 재무대신 꼬꼬프체프(Kokopchev)와 만난 일본의 노정객 이또오 히로부미(伊藤博文, 1841~1909)를 저격했다는 사건만 덩그렇고 그 문맥은 실종되기 일쑤이기 때문이다. 알다시피 적으로서 싸웠던 일본과 러시아가 전후에는, 만주개방을 요구하는 영·미와 만주회복을 꿈꾸는 중국 민족주의의 위협에 맞서, 오히려 연합하는1 모양을 보노라면 국익, 실상은 자본의 요구에 따라 춤추는 근대 국가이성의 마성(魔性)이 끔찍하다. 이 때문에, 만주를 두 나라가 대등하게 갈라 지배하는 데 합의하면서 러시아는 일본의 조선 지배를, 일본은 러시아의 외몽골 이익을 보장하는2 악마의 거래가 하얼삔회담인 점에서 이또오만 겨눈 안중근 의거의 의의는 제한될 수도 있다. 뒤에 이 사건의 문맥을 이해하게 되면서 나에게 떠오른 감상 또한 그랬다. 대의가 빛나더라도 암살이란 방법을 조건 없이 긍정할 수 없다는 내 마음의 주저도 일조하였을 터다.
「동양평화론」(1910)이야말로 그의 진면목이다. 서문의 한 대목에서 나는 어느결에 옷깃을 여미게 되었다. “청년들을 훈련하여 전쟁터로 몰아넣어 수많은 귀중한 생령들이 희생처럼 버려졌으니, 피가 냇물을 이루고 시체가 땅을 뒤덮음이 날마다 그치지 않는다. 삶을 좋아하고 죽음을 싫어하는 것은 모든 사람의 상정이거늘, 밝은 세계에서 이 무슨 광경이란 말인가. 말과 생각이 이에 미치니 뼈가 시리고 마음이 서늘해진다.”3 타고난 무골(武骨)로 전장(戰場)을 두려워하지 않은 그가 실은 반전 또는 비공(非攻)의 평화주의자였던 것이다. 그는 테러리스트가 결코 아니다. 집필 도중 형집행으로 미완에 그친 이 산문의 끝문장이 아프다. “아! 그러므로 자연의 형세를 돌아보지 않고 같은 인종 이웃 나라를 해치는 자는 마침내 독부의 환란을 기필코 면치 못할 것이다.”(215면) ‘독부(獨夫)4의 환란’! 참으로 무서운 말이다. 그는 아시아와 함께 서양의 침략을 저지하는 길이 아니라 거꾸로 서양의 앞잡이로서 아시아 이웃을 침략한 일본이 종국에는 자멸로 떨어질 것을 날카롭게 예언한다. 승승장구 속 득의양양한 외관에 일본의 안팎이 모두 현혹된 미망(迷妄)의 때에 그는 이또오를 처단함으로써 일본에 온몸의 경고를 발했던 것이다. 이또오뿐만 아니라 꼬꼬프체프에게도, 나아가 모든 약소민족을 이익의 제물로 삼으려는 모든 제국주의자들에게, 그것은 서늘하고도 단호한 경종이 될 것은 물론이겠다.
지금 이 산문의 약점을 지적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일본과 러시아의 다툼은 황백인종의 경쟁”(206면)이라는 대목에서 보이듯 사태의 복잡성을 인종주의로 단순 환원한 점, “수백년 이래 악을 행하던 백인종의 선봉”(207면)으로서 러시아를 지목하는 방아론(防俄論)에 일방적으로 의존한 점, 일본에 대한 기대가 과잉한 점, 그리고 무엇보다 동학당을 “조선국의 서절배(鼠竊輩)”(208면) 즉 좀도둑으로 여전히 폄하한 점 등, 부르주아민족주의자 또는 부르주아민주주의자의 한계가 뚜렷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동양평화론」은 조선의 독립이 조선만이 아니라 중국은 물론이고 심지어 가해자인 일본에조차 이로운 동아시아 평화의 초석이란 점을 당당하게 밝힌 우리 동아시아론의 남상이다.5 요컨대 일본의 설득을 주목적으로 하되 그 결과 중국을 한층 감동시킨 그의 작은 독립전쟁은 인명살상을 최소로 제한한 평화의 전투, 또는 ‘동양평화’를 위해, 차마 하지 않을 수 없어 어쩔 수 없이 행한 소극적 실천이었던 것이다.
2. 우덕순의 「거의가(擧義歌)」
나는 그가 순국한 중국의 동북(東北)에서 열리는 이 드문 기념의 자리에서 안중근 노래를 다시 읽는 것으로 의거 100주년을 기억하고 싶다. 안중근 문학 가운데서도 결행을 앞둔 장부의 심사를 노래한 거사가(擧事歌)가 백미다. 그런데 이 노래는 안중근의 제1동지 우덕순(禹德淳, 1876~1950)의 화답가가 짝이다. 천주교도 안중근의 「장부가」에 대한 개신교도 우덕순의 「거의가」, 의거 직전 끓어오르는 격정을 다스리며 고매한 뜻을 함께 확인하는 두 동지의 교통이 아름답다.6
그럼에도 이 두 노래는 한국근대문학사의 바깥에 오랫동안 방치되어 왔다. 친일개화론자 이인직(李人稙)의 『혈의루(血의淚)』(1906)를 근대문학의 효시로 떠받드는 오랜 관행 속에 애국자들의 노래는 설 자리조차 없었던 것이다. 이 노래들은 4월혁명(1960)을 상상력의 원천으로 삼는 반독재민주화운동의 전진과 함께 오랜 망명에서 귀환했다. 그 결정적 계기가 의병장들의 시가를 비롯한
- 古屋哲夫 『日露戰爭』, 東京: 中央公論社 1980, 230면. 알다시피 러일전쟁에서 영·미는 만주개방을 약속한 일본을 지지했다. ↩
- 같은 책 237면. ↩
- 안중근 「동양평화론」, 최원식·백영서 엮음 『동아시아인의 ‘동양’인식: 19-20세기』, 문학과지성사 2005, 205면. 이하 이 글의 인용은 본문에 면수만 표시함. ↩
- ‘독부’란 인심을 잃어 도움받을 곳 없는 외로운 남자 또는 폭정으로 백성에게 외면당한 군주로, 여기서는 일본을 가리킨다. ↩
- 국치(1910)를 바로 눈앞에 둔 절박한 시점에 출현한 안중근의 「동양평화론」에 이어, 3·1운동(1919)의 열기를 계승한 신채호(申采浩)의 「조선독립급동양평화(朝鮮獨立及東洋平和)」(1921), 그리고 해방의 이상과 분단의 현실 사이에서 건국의 길을 모색한 안재홍(安在鴻)의 「신민족주의의 과학성과 독립의 과제」(1949)가 주목된다. 이에 대한 자세한 논의는 졸저 『제국 이후의 동아시아』(창비 2009)의 163~65면과 152~53면을 참고할 것. ↩
- 안중근과 우덕순은 거사 4일전 하얼삔에 도착하여 동지 유동하(劉東夏)의 친척 김성백(金聖伯) 집에 묵었다. 그리고 다음날 노래를 불러 다짐했다. 이 노래들은 1909년 10월 23일 하얼삔의 김성백 집에서 태어난 것이다. 「안중근 연보」, 『의거 순국 100년 安重根』 예술의전당 2009, 200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