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평론

 

『완득이』 이후

 

 

오세란 吳世蘭

어린이문학평론가. 주요 평론으로 「역사를 소재로 한 어린이문학, 새롭게 읽기」 등이 있다. bookyoh@hanmail.net

* 이 글은 2009년 11월 세교연구소 정기포럼에서 발표한 글을 수정·보완한 것이다. 당일 토론에 참여하신 분들께 감사드린다.

 

 

1. 청소년문학은 없다?

 

‘청소년문학’은 대체 무엇인가. 청소년문학을 연구하는 사람에게도 청소년문학의 개념은 머리 아픈 문제다. “아동청소년문학의 개념은 아동청소년의 경험을, 아동청소년의 관점에서, 아동청소년이 이해할 수 있는 형식으로 표현한 문학으로, 아동청소년을 독자로 상정하고 창작된 작품”1 또는 “특별한 소설 문법을 따로 가진다기보다는 청소년을 주체로 혹은 독자로 주목했다는 점이 가장 큰 특징인 장르이며, 청소년을 당당한 자의식을 가진 주체로 인정하고 접근하려는 의지가 청소년문학의 본질적인 부분”2이라는 정의는 참으로 피상적인 문구다. 외국처럼 청소년을 위한 소설장르가 질적·양적으로 성숙해 독립된 영역으로 자리잡은 상황도 아니니 때로는 우리에게 “청소년문학은 없다”는 냉정한 판단에 그냥 손을 들어버리고 싶기도 하다. 그럼에도 청소년문학은 성립이 어렵다고 단정하기에는 뭔가 미진함이 남는다. 오랫동안 청소년에게 제공되던 ‘교육으로서의 문학’만 계속 강요하는 것은 어른 세대가 청소년에게 가하는 일종의 문화폭력이 아닌가 싶은 것이다. 청소년주체도 빠져 있고 독자에게도 다가서지 못하는 근현대 한국소설이나 어른 독자를 대상으로 쓰인 작품만을 재활용한다면 청소년은 문학에서 얻을 수 있는 위로와 안식, 그리고 감동을 어디서 찾을까 싶은 것이다.

재작년 김려령(金呂玲)의 『완득이』(창비 2008)가 청소년소설의 붐을 일으켰을 즈음에 나온 또하나의 작품이 있다. 황석영의 성장소설 『개밥바라기 별』(문학동네 2008)이 그것으로, 작가는 후기에서 “『바리데기』를 출간한 후 전혀 새로운 젊고 어린 독자들이 생겼다는 사실을 알고, 그들과 속 깊은 이야기를 나눌 작품”으로 썼다고 밝히고 있다. 과연 이 소설과 청소년 독자는 얼마나 교감할 수 있을까 싶은데, 언론에서는 이 작품을 청소년을 위한 작품이라고 언급하기도 했다.

소설은 사건이 진행되는 동시에 서술자의 시선에 의해 그 사건이 해석되어 독자에게 전달된다. 성인이 되어 십대 때의 자신을 돌아보는 ‘회고담’류 성장소설에서는 소설 속 미세한 시선의 낙차가 특히 중요한 의미를 생성한다. 『개밥바라기 별』 역시 십대의 경험자아 ‘준’과 이미 성인이 되어 청소년 시절의 준을 돌아보는 서술자아로 소통 층위를 나눌 수 있으며, 준과 그의 친구들이 번갈아 서술자로 등장하기도 한다. 그런데 이 모든 시선은 준에 대한 집중조명을 통해 준의 젊은 시절을 낭만적으로 윤색한다. 십대인 경험자아의 고민이 독자에게 전달되기보다 이 모든 사건을 뛰어넘어 성장한 성인 서술자가 들려주는 나르씨시즘이 강한 회고가 주를 이루는 것이다. 젊은 시절이 아무리 힘들었더라도 되돌아보는 자에게는 그 고통조차 ‘기쁜 우리 젊은 날’로 왜곡 기억되게 마련이다. 결국 『개밥바라기 별』은 십대를 주체로 내세운 것이 아니라 어른이 된 준의 기억 속에서 ‘대상화된 십대’를 그린 작품이다. 나는 『개밥바라기 별』이 청소년소설이라는 해석에 동의하기 어렵다. 이 작품은 또하나의 성장소설일 뿐이며, 한국에서 청소년소설을 대하는 시선은 이렇듯 여전히 혼란스럽다.

현재 청소년문학이라는 용어는 발견된 것도, 연구된 것도 아니며 ‘기획’된 것이라는 지적은 일견 타당하다.3 그러나 그것은 절반의 진실이다. 청소년문학은 1990년대 후반부터 청소년문화를 위해 꼭 필요한 장르라는 인식이 등장하면서 치열하게 개척된 면도 크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러한 개척을 통해 비로소 청소년을 위한 문학적 장이 형성되었다. 사실 청소년문학은 2008년에 출간된 『완득이』 이전부터 성장해왔다. 그러다 『완득이』에 이르러 비로소 청소년독자를 포함한 일반 독자들에게 큰 파급력으로 다가왔다. 『완득이』는 실제로 폭넓은 독자층에게 ‘청소년문학’이라는 장르를 알린 첫 작품이 아닌가 싶다. 고등학교 현장에서 사용되는 학생용 추천도서 목록에 청소년소설이 실리는 비율은 아직 미미한 형편인데, 『완득이』만은 거의 모든 학교가 추천도서로 채택하고 있는 것을 보아도 알 수 있다.

모든 작품에 성과와 한계가 있듯 『완득이』에도 장단점이 공존한다. 그런데 『완득이』에 대한 비평에는 작품 외적인 담론이 몇가지 존재한다. 그것은 첫째, 『완득이』를 통해 청소년소설을 눈여겨보게 된 외부의 평가로 과연 청소년소설이 성장소설과 무엇이 다른가의 문제이며 둘째, 『완득이』를 기점으로 발생한 청소년소설이 대중독자를 의식한 장르문학에 가까워지는 현상에 대한 문제제기이며, 마지막으로 『완득이』 이후로 청소년소설이 계속 채워나가야 할 부분에 대한 검토이다.

 

 

2. 청소년소설은 성장소설이다?

 

『완득이』 이후 텔레비전 독서 프로그램이나 신문 서평에서 청소년소설을 다루는 경우가 생겼다. 그런데 이럴 때 청소년소설이라는 단어 대신 주로 ‘성장소설’이라는 명칭을 사용한다. 저널리즘의 속성상 대중에게 친근하게 여겨지는 단어를 사용하는 것이라 짐작되지만 아직까지 청소년을 위한 소설은 곧 성장소설이라는 통념이 지배하고 있다는 방증일 것이다. 학계에서도 상황은 비슷한데, 비슷한 텍스트를 분석하면서도 ‘성장소설 연구’나 ‘소년소설 연구’ ‘청소년소설 연구’ 등 논문의 제목마저 혼란스럽다. 청소년소설의 개념이 아직 정립되지 않은 까닭도 있겠으나 새로운 문학장르를 학문의 장으로 선뜻 받아들이지 못하는 학계의 경직되고 보수적인 관습 때문이기도 하다.

기본적으로 소설은 등장인물이 사건을 겪어가며 변화 혹은 성숙에 이르는 장르다. 근대소설 속 주인공은 당대 사회의 모순을 비판하고 지배이념을 거부하면서 새로운 이념을 추구하는 문제적 인물이다. 따라서 근대소설은 본래 성장소설적 속성을 내재하고 있으며, 성장이 단지 청소년만의 특징이 될 수는 없다. 그럼에도 청소년소설을 ‘성장소설’이라 부르는 이유는 대략 두가지인데, 하나는 청소년소설이 성장소설 장르에서 출발했다고 보는 경우고, 다른 하나는 청소년에게 가장 중요한 과제가 ‘성장’이라는 통념을 가진 경우다.

청소년소설에서 성장을 다루는 작업은 여전히 중요하지만 성장의 기의(記意)는 사실상 고정돼 있지 않으며, 시대나 사회에 따라 변화한다. 가령 통과의례의 개념을 주조로 하는 ‘이니시에이션 스토리’(initiati

  1. 김상욱 「전복적 상상력으로서의 청소년문학」, 『내일을 여는 작가』 2009년 여름호 69면.
  2. 졸고 「청소년문학과 청소년문학이 아닌 것」, 『창비어린이』 2009년 봄호 175면.
  3. 강유정 「장르로서의 청소년소설」, 『세계의문학』 2009년 가을호 192면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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