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평론

 

『요코 이야기』가 불편한 몇가지 이유

 

손종업 孫鍾業

문학평론가, 선문대 교수. 저서로 『문학의 저항』 『극장과 숲』 등이 있음. sju63@chol.com

 

 

1

 

『요코 이야기』(문학동네 2004)가 국내외에서 불러일으킨 파장은 작지 않다. 그러나 이 소설에 대한 우리들의 관심은 여전히 단순한 민족주의적 분격(憤激)에 머물거나, 파시즘적인 국가체제 또는 전쟁상황에 처한 소수자의 상처와 아픔을 그린 것에 우리가 과잉반응을 보이는 게 아니냐는 반격이 있을 따름이다. 소설 속의‘요코’를‘디아스포라’로 읽어내려는 탈식민주의적 독법이 후자에 속한다. 그러한 관점은 우리의 이분법적인 사고 속에서 가학적인 것으로 변질될 수 있거나 피해망상에 불과한 것을 발견해내고 그 메커니즘을 통찰하려 한다는 점에서 나름대로 의미를 지닌다.

하지만 어느 쪽이든, 더 중요한 문제는 드러나지 않고 있다. 관행적 표현으로서‘편협한 민족주의’도 문제지만, 모든 소수적인 관점들이 가치있다는 식의 공허한 탈식민주의도 탈이다. 그런 와중에 이 논란은 오로지 저널리즘적인 방식으로 확대·재생산되었을 뿐이다. 이 소설에 대한‘세밀한 읽기’는 어디서도 눈에 띄지 않는다. 그 결과, 우리는 여전히 하나의 견고한 이분법에 사로잡혀 있게 된다. 이러한 지적 성찰의 결핍은 최근 우리 사회의 전반적인 경향인 듯하다. 세밀한 읽기를 동반하지 않은 주장이 공허한 메아리만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그러나 상황이 어려울수록, 우리가 기대야 하는 것은 주장(doxa)을 넘어서 진정한 앎(epistèmè)에 이르는 노력이 아닐 수 없다. 구체적이고 객관적인 논거들을 동반하는 끊임없는 미세한 질문과 성찰 들이 요청되는 것이다.

우리의 논의는 텍스트 자체로 돌아가지 않으면 안된다. 우선 나는 이 소설이 왜 우리말로 번역되어서 『요코 이야기』라는 예쁜 책이 되었는지 이해할 수 없다. 이 소설을 번역해 내놓은 출판사에서는 이 작품이 중국은커녕 일본에서조차 번역되어 있지 않다고 자랑스럽게 밝히고 있는데, 그러한 사실 자체가 우리나라에서는 번역되어야 한다는 반증이 될 수는 없다. 또한 지금까지 대부분의 논자들이 한국어판 『요코 이야기』를 텍스트로 삼고 있다는 점도 문제로 지적되어야 한다. 여기서 구체적으로 언급할 수는 없지만, 번역본은 책의 내용 및 형식에서 원전과 여러가지 차이점들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에서 우리는 한국어판 『요코 이야기』가 아니라, 미국의 청소년들이 직접 접했을 텍스트를 통해 이 소설을 분석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저자 요코 카와시마 웟킨스(Yoko Kawashima Watkins)는 매년 미국의 학교에 초청받아 이 이야기를 직접 학생들에게 해주었다는데, 이 소설이 그들에게 빚어낸 세계-이미지는 어떤 것이었을까? 내가 사용한 판본은 맥듀걸 리텔(McDougal Littell) 출판사에서 1986년에 나온 것으로, 원제는‘So Far from the Bamboo Grove’(대나무숲 저 멀리)이다. 본문에 인용하는 소설 내용은 내가 직접 번역한 것임을 알려둔다.

 

 

2

 

이 소설에는 만주국 관리의 딸인 요코가 1945년에 한국에서 일본으로 탈출해 새로운 삶을 꾸리기까지의 우여곡절이 담겨 있다. 일단 잘 읽힌다는 점에서 『요코 이야기』는 소설로서 분명한 장점을 지니고 있다. 많지 않은 분량에 쉽고 간명한 문체에는 사람들을 압도하는 서사들이 담겨 있다. 나는 이 소설의 어떤 대목은 눈물겹게 읽어야 했다. 그런데 어쩌면 문제는 바로 이렇게 흘러넘치는 감동에서 찾아야 하는 게 아닐까? 모든 분석되지 않은 감동은 위험하다. 그것이 지닌 파장이 큰 반면에 독선을 야기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소설에서는 그것이 더욱 은밀한 형식 속에 숨겨져 있다. 바로 열두살 소녀의 모습으로. 번역본은 명백히 그러한 매혹에 눈먼 형태가 아닐까?

뒤에 서술하겠지만 이 소설은 치밀한 서사전략의 결과물이다. 그것은 열두살 소녀에게서 자연스럽게 나오는 것이 아니라, 작가에 의한 지적 조작의 산물일 수밖에 없다. 이는 정교한 꼭두각시놀음을 연상케 한다. 소설을 읽는 동안, 우리는 한 소녀가 겪어야 했던 가슴 아픈 순간들에 온통 시선을 빼앗긴다. 하지만 배후에서 그녀를 움직이는 작가에게도 그와 동일한 순진함을 기대할 수는 없다.

그러므로 『요코 이야기』를 제대로 읽기 위해서는 이 소설에 드러난 것과 드러나지 않은 것, 말해진 것과 말해지지 않은 것, 이 모든 선택과 배제가 구체적으로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살피지 않으면 안된다. 순진한 감동이 아니라 정치(精緻)한 정치학이 요구된다는 말이다. 이 소설이 단지 열두살 먹은 소녀의 순진성의 소산이라고 여길 수는 없다. 어떠한 의미의 손상이나 첨삭 없이 한 소녀의 기억을 과거로부터 온전히 되살려낸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작가가 왜 이러한 기억을 이런 방식으로 과거 속에서 불러내야 했을까 우리는 묻지 않을 수 없다.

만일 『요코 이야기』가 단지 하나의 허구일 뿐이라면, 이 소설에서 어떤 세부들이 역사적 사실에 부합하는가 따지는 일은 무의미하리라. 설령, 함북 청진의 나남(羅南)에 대나무숲이 존재하지 않을지라도 문학으로서 그것은 충분히 자연스럽다. 소설을 읽으면서 나는 바람이 만들어내는 대나무숲의 변화무쌍한 소리들을 직접 듣는 것 같았고, 일본으로 쫓겨가는 요코의 가족을 태운 기차가 그녀가 태어나고 자란 고향집을 지나칠 때의 풍경도 눈에 잡힐 것처럼 선연했다.

하지만 왜 유독 이 소설을 두고 이러한 논란이 벌어지는가를 우리는 또한 충분히 이해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것은 바로 이 소설이 자기 체험을 꾸밈없이 그려낸 것이라는 작가 자신의 전제로부터 비롯되었다. 이 소설을 놓고 벌어진 수많은 논란에 대해서 작가 쪽이 내놓은 가장 효과적인 반박은 바로 이것이다. 요컨대, 그녀는 그때 그것들을 실제로 겪었고 또 보았다는 것. 그리고 당시 그녀는 어린아이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 소설의 내용은 상상의 산물이 아니라 자신이 직접 경험한 사실 그대로이지만, 만일 이러한‘사실’이 뜻밖에도 한국인들에게 상처가 되었다면 그야말로 죄송할 따름이라는 것. 이게 작가의 노회한 답변일 때, 역으로 이 소설 속에 구축된 세계가 작위적인 것임을 밝히고 거기에서 어떤 숨은 의도를 찾아내는 일이 좀더 절실하지 않았을까?

바로 그런 맥락에서라면, 어떻게 저 북방의 도시 나남에 대나무숲이 있는가라는 물음은 결코 사소한 게 아니다. 하물며 인민군의 존재1나 그 무렵 그 지역에 미군의 폭격이 있었는가 여부 등은 나름대로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1. 작품 속‘인민군’에 관한 서술이 정확한 사실에 근거한 것 같지는 않다. 원문에는‘Anti-Japanese Communist Army’라고 표기돼 있는데, 이를 ‘인민군’으로 번역하는 일은 한국이라는 나라에 낯설고 무지한 작가가 만들어낸 환상에 대해, 실제 역사 속에서 그에 맞는 이름을 찾아주기 위해 고심하는 일과 다를 바 없다. 서구인들이 아프리카 원주민을 아무렇게나‘마사이족’으로 호명하는 것처럼, 작가는 그저 자기 가족을 둘러싼 위협의 대상에 그런 어정쩡한 이름을 갖다 붙였을 따름이다. 그러므로 나는 이를‘항일공산군’이라고 그대로 옮겨 부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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