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자의 목소리

 

 

『창작과비평』 114호 외

 

 

『창작과비평』 114호

대학에 진학한 이래로 고등학교 때보다 확실히 더 많은 양의 책을 읽고 있지만, 내가 읽는 책들은 대부분 소설이었다. 어느 순간부터 인문사회과학 분야의 책을 읽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찾은 것이 다름아닌 『창작과비평』이었다. 무엇보다도 인문사회과학 서적 출판에 힘써오던 창작과비평사였기에 믿고 구입했다. 그리고 그 믿음 그대로, 책은 나를 실망시키지 않았다.

이번 겨울호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테러와 전쟁에 관한 ‘특집2’였다. 물론 테러의 주범으로 지목된 오사마 빈 라덴과 지금까지 그리 중요하게 여겨지지 않은 이슬람문명, 문명의 공존과 충돌 등에 대한 많은 서적들이 출간돼 지금까지도 베스트쎌러로 서점 한구석을 차지하고 있지만, 이는 현상적인 사건으로부터 비롯된 것이었기에 이슬람문명의 이해나, 이번 사태의 성격에 대한 이해를 위해서는 많이 부족하지 않았나라는 생각이 든다. 한데 겨울호 이희수님의 『이븐 바투타 여행기』에 대한 서평을 읽고 특집을 읽기 시작하니 이슬람에 대한 것들이 좀더 눈에 들어왔다. 테러 해결은 이슬람 문명에 대한 근본적인 이해에서부터 비롯될 수 있음을, 또한 이번 테러와 전쟁이 단순히 단편적인 사건에 의해 발생한 것이 아니라, 이전부터 이어진 미국과 아프가니스탄, 팔레스타인·이스라엘 문제 등과 맥을 같이함을 명확히 알 수 있었다.

시 역시도 인상깊은 게 많았다. 8·15 통일대축전 기간에 낭송했다는 김준태님의 「白頭여, 통일의 빛나는 눈동자여」나 백무산님의 「통일 이데아」 같은 시들은 신선하게 보였고, 어느정도 사회의 씁쓸한 단면들을 엿볼 수 있어서 좋았다.

전수정 quartz2@netian.com

 

황현산의 ‘서정주론’을 읽고서

서정주만큼이나 한국문학사에서 많은 논란을 불러일으킨 작가가 또 있을까? 그러나 그의 문학을 숭배하는 쪽이든 양지만을 좇아 살아간 그의 삶의 내력 때문에 그를 반대하는 쪽이든 그를 바라보는 시각에는 공통적인 전제가 하나 있다. 여하튼 그의 시들은 풍요로운 언어의 보고로서 민족언어의 경지를 한 차원 높인 뛰어난 작품이라는 것이다. 황현산의 서정주론은 놀랍도록 치밀한 독해를 통해 서정주 시의 내적 담론의 구조를 해체하고 시인의 사상적 근원을 해명함으로써 서정주 시의 평가에 대한 기존의 전제 자체를 허무는 도전적인 작업이었다. 특히  서정주 시 전체를 장악하는 비평적 카리스마와 문학의 내적 원리를 치밀하게 탐색함으로써 서정주를 둘러싼 좌우 양편이 가진 언술구조의 허약함을 뛰어넘는 비평의 학적 가능성을 과시했다.

황현산은 서정주의 시를 ‘공교롭다’고 표현했다. 현실의 공간을 초월적 과거, 기원의 시간으로 연결시키며 거기에 영원하고도 절대적인 삶의 의미가 있다는 듯 ‘시적 허용’의 최대치를 교묘히 이용하는 그의 소위 ‘마술적 언어’는 기실 ‘말장난’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 황현산의 논지의 핵심이다. 황현산이 서정주식 지혜의 말씀과 토속적 언어의 구사에서 읽어내는 것은 언어의 마술이 아니라 오히려 내적 논리의 허약함이다. 내적 논리의 허약함은 미학적 결함으로 이어지며 미학적 결함은 필연적으로 삶의 윤리적 파탄으로 이어진다. 결국 ‘공교롭다’는 말은 진정성 없는 ‘말재주’에 우리가 그동안 너무 과도한 의미를 부여해왔다는 뜻이다. 서정주식의 교묘한 언어의 유희와 기원의 시공간을 오가는 지혜의 말씀은 장자적 절대자유와도 아주 먼 거리에 있다. 황현산의 글은 “미당의 시세계는 책임없이 아름답다”로 끝을 맺는다. 시와 소설, 비평의 진정성이 의심받는 시대에 황현산의 비평은 모처럼 문학의 미적 책임의 문제를 진지하게 제기하고 있다. 결국 문학의 미적 원리는 삶에 대한 책임의 문제, 곧 윤리의 문제와 결부된다. 그것은 한편의 ‘시’가 곧 정치적 사건임을 의미한다.

함돈균 husaing@freechal.com

 

신인소설가 권채운·표명희의 작품을 읽고

권채운의 「겨울 선인장」은 죽음이 멀지 않았음을 순순히 받아들이는 노파의 이야기이다. 하지만 그것은 삶의 체념과는 사뭇 다르다. 늦은 밤 허기를 달래려 밥통을 그러안는 노파의 모습은, 시간의 흐름에 순응하는 것과 그 시간을 미분한 순간순간의 생명력에 조응하는 것이 다르지 않음을 보여준다. 표명희의 「야경」에서 주인공 Y는 암 투병 때문에 몸을 가누지 못하는 엄마를 간병한다. Y는 날마다 엄마가 잠든 한밤중에 수영장을 찾는다. 누구나 일상 안에 갇혀 있다는 사실에 자위하며 수영장을 왕복하는 Y의 다양한 몸짓〔泳法〕은 되레 경쾌하기까지 하다. 그런데 우연의 일치인지 두 소설은 삶의 마지막 지점에 있는 인물을 전면 혹은 측면에 배치하여 고립과 단절을 자초한다. 그 안에서의 전복이, 이 시대의 파편화되어가는 소설가(그리고 우리 모두)의 잔영과 겹치는 건 왜일까. 두 소설가가 타자와의 접촉면을 확장하는 공간으로 성큼 나서기를 기대해본다.

서울시 관악구 신림9동 235-3 이호범

 

계절이 바뀔 무렵에 어김없이 배달되는 『창비』를 보며 문학을 읽고 시대를 보게 된다. 가을호의 언론개혁 관련 좌담은 언론주도층과 권력에 대해 극단적으로 양분되어 있는 민심을 차분히 일러주었으며 공감하는 바가 적지 않았다.

그런데 오랫동안 권위와 문학성을 꿋꿋하게 지켜온 창비에서 대학생이나 신인작가들에게는 조금 인색하지 않았나 생각한다. 『창비』에서 신인·대학생을 위해 지면을 할애했으면 좋겠다. 기성작가들에게서 나올 수 없는 참신함도 있을 터이고 그들만의 세계를 보일 것도 같다. 그렇게 할 만한 창비가 아닌가.

서울 서초구 잠원동 58-16

신반포10차아파트 315동 702호  정진규

 

 

반론

 

백제대향로를 둘러싼 이상한 담론들

비평이나 리뷰는 객관적 평가와 진실에 대한 탐구를 전제로 하는 것이다. 그것이 지켜지지 않을 때 비평과 리뷰는 자칫 파당을 낳고, 담론구조를 왜곡시킬 뿐이다. 본인의 저서 『백제금동대향로』에 대한 지난호 최병헌 교수의 글은 제대로 된 비평이라고 보기 힘들며, 백제대향로와 능산리 유적지를 둘러싼 담론의 핵심을 올바로 파악하지 못한 것이다.

본인은 책에서 부여의 능산리 유적지에서 목탑과 금당지가 확인된 것을 분명히 밝혔으며, 또한 능산리 유적지가 불교와 관련이 있음을 부정한 적이 없다. 다만, 백제 사찰로서는 전례가 없는 독특한 구조를 하고 있어 이에 대한 더욱 합리적인 해석이 필요함을 역설했을 뿐이다. 예컨대, 능산리 유적지의 강당터를 보면 동실(東室)과 서실(西室)의 두 건물지로 나뉘어 있고 그 주위를 회랑(回廊)으로 둘러치고 있는데, 이러한 양식은 일반사찰의 강당에서는 볼 수 없는 것이다. 게다가 서실의 건물지는 고구려의 전통신앙의 대상을 모신 국사(國社)터로 알려진 집안의 동대자(東臺子) 유적의 건물지와 동일한 구조를 갖고 있으며, 동실의 건물지 역시 고상식(高床式) 건물과 유사한 통칸구조로 되어 있다.

이는 능산리 유적지의 강당터가 불교와는 전혀 다른 성격의 종교유적임을 강력히 시사하는 것이다. 따라서 능산리 유적지에 대한 그 어떤 논평도 이 강당터의 독특한 구조에 대한 합리적인 설명 없이는 모두 겉핥기에 불과하다. 최교수는 능산리 유적지가 백제왕실의 고분군과 관련된 원찰이었다고 일방적으로 선언하고 본인의 책을 매도했으나 정작 중요한 강당터의 구조에 대한 해명이 없으니, 비평으로서나 학설로서나 모두 실효성이 없다.

본인은 책에서 미술사적 연구 등을 통해 백제대향로의 세계관이 고대 동북아의 샤머니즘에 바탕을 두고 있음을 밝히는 한편, 능산리 유적지가 당초 성왕이 사비로 천도할 때(538년) 부여에 세워진 신궁(神宮)터였을 가능성을 제시한 바 있다. (백제의 신궁에 대해서는 『일본서기』 흠명천황欽明天皇 16년조에 기록되어 있다.) 다만, 본인이 저서에서 밝힌 것처럼 신궁은 성왕 말기에 모종의 이유로 방치되었던 듯하며, 이후 목탑지에서 발굴된 사리감의 명문에서 드러난 것처럼, 위덕왕 13년(567년)에 들어서야 그것도 신궁의 앞마당에 불교식 목탑과 금당이 추가된 새로운 형태의 ‘신궁사(神宮寺)’로 복권이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목탑과 금당이 있다고 해서 단순히 불교유적으로 결론내릴 것이 아니라 거기에 포함된 또다른 종교적 요소들을 밝혀내어 그 정확한 의미연관을 해명하는 것이 능산리 유적지를 둘러싼 논쟁의 핵심이 된다. 이것은 경우에 따라서는 백제, 나아가 삼국시대의 정신문화를 불교와 도교 중심으로 보아오던 기존의 시각에 대한 전면적인 재검토까지 포함하는 것이다.

능산리 유적지가 여느 사찰터와 다르다는 것은 이 유적지를 직접 발굴조사하고 중간보고서를 낸 김종만 연구원에 의해서도 이미 지적된 바 있거니와, 이곳에서 출토된 기와편이 공주시대의 기와와 연결된다는 사실은 사비천도를 전후하여 이곳이 조성되었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따라서 최교수의 원찰 운운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지 알 수 있다.

이런 최교수의 부당한 태도는 박물관 측의 신중치 못한 태도와도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예컨대, 부여박물관에서는 백제대향로의 사상적 배경으로 박물관측의 연화화생설과 신선사상설을 기초했던 조용중 학예사가 뒤에 자신의 학설을 뒤집는 논문을 발표했음에도 불구하고, 백제대향로의 안내문에 여전히 연화화생설과 신선사상설을 확정된 정설인 양 유포하고 있으며, 강당터의 구조에 대한 적절한 해명 없이─사실상 괄호쳐놓고─능산리 유적지를 능사(陵寺)로 발표한 것이다. 어디 그뿐인가. 박물관 관계자들은 수거된 목간(木簡)에서 보희사(寶喜寺)란 명문이 확인되자 능산리 유적지를 성급히 보희사로 추정했다. 그러나 보희사란 목간은 얼마 뒤에 다시 확인된 자기사(子基寺) 목간과 마찬가지로 물표임이 확인됨으로써, 오히려 이들 목간은 보희사나 자기사에서 이곳 신궁사에 보내온 물품의 꼬리표였을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다.

한편 최교수는 스스로 밝히고 있듯이 1994년 백제대향로가 공개되었을 때 그 사상적 배경을 설명한 연화장 이론을 신문에 기고한 바 있으며, 그뒤 이를 보강하여 논문으로 발표했다. 그의 논지는 백제가 도교를 융합한 양(梁)나라의 불교를 받아들였으므로, 백제대향로 역시 불교와 도교를 표현했으리라는 것이다. 그러나 백제대향로가 양나라가 아닌 북위향로를 모델로 하고 있는 점이라든지,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동탁은잔이나 고구려 고분벽화와 연속성을 갖고 있음을 고려하면, 그의 주장은 지극히 소박한 견해에 불과하다.

끝으로, 최교수는 마치 본인이 “한국문화의 원류를 찾아 그것을 계승 발전시키려고 노력하는 것만이 바람직한 일이라고 생각”했다고 했는데, 오히려 본인은 책에서 “민족 없는 문화는 존재할 수 없지만, 민족만을 앞세운 문화 역시 존재할 수 없”음을 분명히한 바 있다. 자기 문화의 원류를 찾아 그것을 보편적 시각에서 계승 발전시키는 것은 언제나 유효한 것이다. 무릇 지금 내가 서 있는 이 땅과 이 현실을 떠난 인문학이란 사상누각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작금의 인문학 위기가, 김우창 교수도 지적했듯이, 외래담론만을 추수하느라 우리 문화의 천착에 소홀히해온 결과임을 안다면, 그리고 이 땅의 많은 이들이 정체성 문제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을 생각한다면, 마땅히 나는 누구인가, 나는 어디서 왔는가 하는 화두로부터 시작함이 옳지 않겠는가.

서정록/『백제금동대향로』 저자

 

하정일 교수의 글에 답함

113호의 내 글 「90년대문학 성찰의 좌표를 찾아서」에 대한 반박이 주를 이룬 지난호 하정일의 「도전과 기회 사이에서」에 대해 앞으로의 건설적인 논의를 위해 몇마디 답한다. 근대극복의 문제에 대해 하정일은 “근대의 물질적 토대가 자본주의인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근대가 자본주의로 몽땅 환원되지는 않는다”면서 “근대는 다양한 근대‘들’이 경쟁하는 장”이라고 본다. 그러나 정말 쟁점은 다양한 근대들이 어떻게 생겨나서 어떻게 서로 경쟁하느냐를 밝히는 것이다. 자본주의는 자신과 융합할 수 없는 사회체제나 가치체계들을 부단히 파괴하고 변형시키면서 발전해왔다. 다시 말해 근대를 통틀어 시기마다 구체적 모습은 다르지만 자본주의와 자본주의 아닌 것 사이의 갈등이 빚어내는 갖가지 양상을 우리는 발견하는 것이다. 산업혁명 직전 18세기 영국 농촌의 무르익어가던 자본주의 농업경영과 민중에게 그때까지 당연시되던 ‘도덕경제’ 사이의 모순에서 비롯된 잦은 식량폭동이 좋은 예이다. 멀리 갈 것도 없이, 우리 근대문학사에서 개개 작품의 민중적·민족적 면모를 그 역사적 맥락에 비추어 분석하는 작업 자체가 이미 그러한 갈등과 포섭, 대치와 변형의 복잡한 역사를 전제한 일이다.

전지구적 자본주의의 21세기에 우리 모두는 단일하고 동질적인 ‘근대’ 안에 함몰되고 말았다고 하는 이도 있겠지만, 우리가 읽는 예술작품들과 땀흘리며 살아가는 민중의 기억과 문화 속에서 여전히 근대는 복합적이고 역동적인 것이다. 그 점에서 “근대의 해방적 가능성을 키워나가려면 근대의 복잡성에 대한 인식이 선행되어야 한다”는 하정일의 주장에 동의한다. 그러나 ‘자본주의로 환원되지 않는 다양한 근대들’에 대한 구체적 분석이 없는 한 모호하다는 비판에서 자유롭기는 어렵다. 하정일은 “근대극복이란 자본주의 극복을 포함하되 그것보다 더욱 포괄적인 과제”라면서, 이는 근대가 “자본주의로 환원될 수 없는 넓이와 두께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며 그래서 근대 이후의 구체적 상을 그리기 어렵다고 말한다. 이런 표현과 논법에 매달리다 보면 자칫 근대극복은 더욱 어려워질 듯하다. 근대의 복잡성에 대한 정당한 인식의 요구가 근대와 자본주의를 은연중 분리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지 않은가. 참된 실천적 쟁점은 ‘자본주의적 근대’와 구별되는 ‘근대(들)’이 전자와 어떻게 대결함으로써 그같은 모습을 획득했는지, 또 그것이 어떻게 ‘자본주의적 근대’를 넘어서기 위한 효과적인 자원으로 활용되고 발전될 수 있는지 찾아내는 것이다. 하정일의 발상이 그 자신이 날카롭게 비판하는 “단절론적 탈근대 담론”의 실천적 무력함을 얼마나 확실히 극복했는지 궁금하다. 이 문제가 민족문학론 갱신과 근대극복의 실천적 자세를 견지하려는 우리 둘에게 공통의 이론적 과제이자 쉽지 않지만 피할 수 없는 지적 모험임을 다시 강조한다.

그리고 하정일의 반론에 담긴 주변부자본주의론 중심의 80년대 사회구성체논쟁에 대한 다소 긴 정리는 분단체제론, 민족문학론의 쟁점을 피해가는 감을 떨칠 수 없다. 내 문제제기는, 백낙청처럼 분단체제를 세계체제의 하위체제로 보는 것이 아니라 국가간체제이되 특수한 형식의 국가간체제로 본다는 발언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불투명하다는 물음이었다. 분단체제론에 담긴 중요한 문제의식이 바로 한반도에 자리잡은 두 개의 ‘특수한’ 불구적 국가의 적대성과 상호의존성이 아니었던가. 글 마무리에서 “꼭 최근 작품을 다루어야 민족문학론의 발전에 기여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면서 마치 내가 그런 취지의 비판을 한 듯이 적고 있으나, 다시 읽어봐도 그런 구절은 눈에 띄지 않았다. 단지 조정래든 은희경이든 문학비평의 백미인 구체적 작품론이 더 탄탄해야 한다는 비판일 따름이었다. 오해 없기를 바라며, 하정일 교수의 건필을 빈다.

김명환/문학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