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자의 목소리

 

 

故 김윤수 선생의 본격 평전을 고대하며

▶ 5·16쿠데타 군부권력의 기획으로 생겨난 어용단체가 사반세기 넘게 독장치는 문화예술계 상황을 두고 볼 수 없어 1988년 12월 23일, 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이하 민예총)이 출범했다. 민예총은 문학·미술·음악·사진·영화·춤·건축 등 여러 장르를 아우른, 이른바 진보진영 예술인들의 문화운동 결사체였다. 고은 김윤수 조성국 세분이 공동의장으로 이름을 걸었고, 신경림 시인은 사무총장 직무를 맡았다.

이후 사단법인으로 전환한 민예총이 창립 30돌을 맞아 간소하게나마 자축행사를 준비하던 즈음에 공교롭게도 김윤수 선생의 부음을 들었다. ‘공교롭다’고 한 것은 민예총 탄생의 한 주역이었던 선생께서 당신의 돌연한 별세로써 민예총의 존재감을 세간에 새삼 상기시키며 쇠잔해진 조직의 기운을 마지막까지 북돋워주시는구나, 그리 여겼기 때문이다. ‘고 김윤수 선생 민족예술인 장(葬)’은 자연히 창비와 민예총이 주관하였다.

장례식을 통해 여태껏 미처 몰랐던 선생의 놀라운 인품의 면면이 회자되었다. 이다지 올곧고 맑게 사신 어른을 가까이 지내면서도 왜 제대로 못 알아봤던고, 왜 좀더 살갑게 모시지 못했던고, 통회스럽고 부끄러웠다. 김윤수 선생과 “불똥이 요 녀석” 사이엔 손톱 아래 박힌 가시 같은 일화가 하나 얽혀 있는데, 그런 내가 하필 ‘민예총 이사장’ 명패를 달고서 당신을 영결하게 되었으니 감회가 더욱 각별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예의 ‘가시’가 박힌 지 일년 남짓 지난 2004년 가을, 광주비엔날레 사상 초유로 대통령이 참석한 개막식 행사 때 이동 차편 한자리에 일부러 나란히 앉은 내가 선생의 손을 슬며시 감싸 쥐자 차마 뿌리치진 않되 차창 밖으로 눈길을 돌려 짐짓 외면하시던 그 냉담의 심사를 나는 어리석게도 이제야 비로소 바로 새겨읽는다.

선생 떠나시고 겨울 한철이 거의 끝나갈 무렵 『창작과비평』 2019년 봄호에 실린 「민족예술의 등불, 김윤수 선생의 삶에 대한 증언」(유홍준)을 접하게 되었다. 반갑기 그지없는 그 글을 민예총 회원들 모두 회람할 수 있도록 때마침 곧 열릴 제31차 정기총회의 자료집에다 수록하고 싶었지만 ‘무단전재 방지턱’에 걸렸다. 하여 대신, 김윤수 선생의 애제자로서 장례위원장 역할을 기꺼이 감당한 유홍준 선배가 한겨레신문에 기고하였던 추도사 「김윤수, 민족예술 마을의 느티나무 같은 분」을 공유하는 것으로 아쉬움을 달랬다.

부박한 세상에 사표로 받들 만한 스승이 조직의 좌장으로 계셨으니, 또한 그 생애를 남다른 순발력과 빼어난 필치로 기록하여 동시대인들에게 두루 선사하는 문장가가 든든한 동지로 있으니, 민예총은 참 다행이지 않은가! 머지않아 ‘김윤수 소전(小傳)’을 넘어선 본격 평전이 독자와 만나게 되기를 고대한다.

박불똥 bdsee@hanmail.net

 

삼일절을 맞아 되새기는 3·1운동 100주년

▶ 삼일절을 집에서 낮잠만 자며 보낼 수는 없다는 생각에 정기구독하는 『창작과비평』 봄호를 정독해보기로 했다. 마침 ‘3·1운동의 현재성: 100주년에 부쳐’라는 제목으로 특집이 실려 있었다. 임형택은 「3·1운동, 한국 근현대사에서 다시 묻다」에서 3·1운동은 한국 근대의 본격적인 출발 지점이고 근현대가 안고 있는 대립 갈등의 발원처라고 규정하였다. 3·1로 해서 민족해방투쟁이 활발해지고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었기에 3·1운동은 혁명이고, 미완의 혁명인 3·1은 진행 중이며 촛불 또한 이와 유사한 성격의 혁명이라는 역사적 의미를 배울 수 있는 글이었다. 백영서는 「연동하는 동아시아와 3·1운동」에서 촛불혁명이라는 또다른 역사적 전환을 경험하면서 1919년과 2019년의 대화를 적극 시도하고 지난 백년의 역사를 근본적으로 되돌아보자고 제안한다. 3·1을 과대포장하는 역사적 남용은 피해야겠지만, 이를 세계사 차원에서 사례 비교하며 재규정하자는 필자의 조심스러운 제안에서 더 나아가 ‘구세대의 파괴라는 한층 더 보편적인 의미’를 살려 ‘3·1운동’보다는 ‘3·1혁명’으로 불러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지막으로 이남주는 「3·1운동, 촛불혁명 그리고 ‘진리사건’」에서 촛불혁명을 진리사건으로 받아들이고 그 성과를 굳히는 정치국면을 만들어내자고 주장한다. 일단은 한반도 평화프로세스를 한반도체제 건설로 이어가야 하고 선거법을 개정해 한반도체제로 전환을 이룰 정치연합을 구축하는 데 힘을 실어주자는 그의 제안이 의미심장하게 다가왔다.

구용훈 ggussy@naver.com

 

봄과 함께 피어난 젊은 시인들

▶ 한해의 첫 시작답게 등단 십년차 이내 시인들로 시란이 구성된 점이 좋았다. 이들의 방향성을 가늠해보는 재미가 있었는데, 개인적으로 첫 시집을 기대하고 있는 시인들의 시에 먼저 눈길이 갔다. 우선 곽문영은 등단작을 읽을 때부터 느꼈지만 신인이라는 협소한 틀에 가둬놓기에는 아쉬울 만큼 이미 중견의 스펙트럼을 지니고 있었다. “너는 소리 없이 돌을 내려놓았다 멀리서 소리만 들으면 한 사람이 오래 고민하며 두는 것처럼 들릴 수도 있었다” “우리가 함께 보낸 모든 날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처럼 모든 돌이 놓인 순서를 기억하지 못했다 그곳에서는 우리도 얼마든지 큰 집을 가질 수 있었다”(「밤 바둑」)와 같은 진행에서 보이듯 가까운 곳에서 먼 곳으로 뻗어나가는 보폭이 너무나 원숙해서 그가 어디로 향하는지 알고 싶다면 숨을 죽인 채 그의 발걸음이 울리는 쪽으로 귀를 기울여야 할 것이다. 최백규의 시를 읽을 때는 그의 등단작부터 자라오던 거친 소년 화자가 긴 성장통을 마치고 자신을 좌절시키던 현실을 넘어 앞으로 걸어나가는 발전을 보는 것 같았다. “수척한 등을 씻겨주다보면 창밖을 바라볼 때가 많다 신도 무언가 만들어놓고 당황했을 것이다” “도축당한 짐승들은 어떻게 될까 인간이 그린 천국과 지옥에는 인간밖에 없어서”(「천국을 잃다」) 같은 문장을 읽고 있으면 그가 바라보는 신이라는 존재도 꼭 한곳으로만 머물고 있지는 않은 것 같아서 다행스러웠다. 그리고 배수연의 「나와 너와 누」, 서윤후의 「하룻밤」을 비롯한 시들도 꽤 인상 깊었다. 아름다운 신진 시인들이 그려나갈 미래처럼 어쨌거나 봄을 지나며 모든 것은 또다시 피어나고 있다.

정여름 jn97_@naver.com

 

체념과 포기의 삶

▶ 황정은의 「파묘」와 백수린의 「아직 집에는 가지 않을래요」를 읽으며 계속해서 여성들의 포기와 체념에 대해 생각했다. 처가 쪽 산소에는 벌초도 하지 않는 법이라며 뒷짐 지고 모른 척하던 남편을 둔 이순일(「파묘」)과 일을 그만두고 매일 반복되는 삶을 사는 희주(「아직 집에는 가지 않을래요」). 그녀들은 나이만 다를 뿐 걸어가고 있는 하루는 똑같다. 자식과 남편을 위해 밥을 하고 빨래를 하고 청소를 한다. 그녀들의 일은 엄마이기에 당연한 것으로 치부되며 돈을 벌어오는 생산적인 활동에 비한다면 편한 일이라고 폄하된다. 부인이 자기 집 제사 준비하는 것은 당연시하면서 부인을 키워준 외할아버지의 묘에 가는 것은 귀찮아하는 이순일의 남편과, 아내가 발레를 보러 가고 싶다 하니 애들은 어쩌느냐는 희주의 남편. 그녀들은 나도 나가고 싶다, 화를 내기보다는 알았어, 받아들이고 단념한다. 어차피 그렇게 해도 바뀌지 않으리란 걸 알기 때문이다. 화를 내기에도 너무 지치고 피곤한 것이다.

오랜 체념은 굳은살이 된다. 뜯고 뜯어 여린 살을 보이게 만들어도 그 위로 다시 굳은살이 박인다. 마치 원래 그 자리에 있던 것처럼. 여성들의 포기와 체념은 여성으로 태어난 순간부터 마음 어딘가에 자리 잡는다. 사회와 가정을 이루는 구성원들에게 이미 굳어진 고정관념은 뜯기고 버려져도 되살아난다. “어차피 울고불고 해봤자 바뀌지 않는 일에 에너지를 쏟기에”(163면)는 일상에 익숙해져버린 희주와 외할아버지 유골을 멋대로 수습하는 인부들에게 제대로 따지지 못하는 이순일. 한해가 시작되는 계절에 이 두 사람의 이야기를 읽으며 나는 이 땅의 모든 ‘그녀들’을 생각했다.

이현아 lee030161@naver.com

 

‘우리’ 그리고 연대

▶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나는 용산참사에 대해 거의 알지 못했다. ‘용산참사’라는 말은 많이 들어보았지만 그 안에 담긴 무게나 사건의 본질에 대해서는 무심했다. 나에게 2009년은 중3이 되던 해다. 서울 태생이 아닌 나는 용산이 서울 어디라는 사실도 잘 몰랐다. 그만큼이나 먼 사건이었고 성인이 된 후에도 마찬가지였다. 십년이라는 시간이 흘렀으니 이미 지나간 일일 거라 생각했고, 이제 와 어설프게 공감하고 분노해봤자 무력감과 자책감만 들 게 분명해 보였다. 그런 마음으로 김일란 감독의 「완성되지 못한 ‘우리’의 애도」를 읽기 시작했다.

‘연대(連帶)’라는 말에 대해 생각했다. ‘나’만의 싸움에서 ‘우리’의 싸움으로 전환되는 지점들에는 항상 연대가 존재한다. 하지만 그간 내게는 할 수 없는 일, 해서는 안 되는 일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그 감정의 기저에는 자격이 부족하다는 생각이 있었다. 그런데 3월 27일 열린 낭독회에서 김일란 감독은 연대를 ‘곁에 있는 것, 곁에 가는 것’이라고 설명해주었다. 또한 자신과 피해자를 동일시하는 것은 연대가 아니라고 말했다. 연대한다는 것이 결코 피해자와 같아진다는 뜻이 아닌데 오히려 나는 반대로 피해자와 같아져야 연대하는 것이라 생각했던 것 같다. 연대 자체에 너무 많은 의미를 부여하고 애써 짐을 키워 ‘내가 할 수 없는 것’으로 규정했던 것은 아닐까.

십년은 짧지 않은 기간이었으나 우리가 모르는 것들은 아직 남아 있다. 십년이 흐르는 동안 ‘우리’ 중 누군가는 사라졌고, 누군가는 포기했으며, 누군가는 꿋꿋이 달리고 있다. 그리고 새로운 ‘우리’도 있다. 비록 작은 마음이지만 나 역시 우리의 목소리로 소망한다. 올해는 오래 기다려온 진실이 규명되고 ‘우리’의 애도가 완성되기를.

방지민 myheather77@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