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평론

 

가능한 불가능

최근 ‘시와 정치’ 논의에 부쳐

 

 

신형철 申亨澈

문학평론가. 평론집으로 『몰락의 에티카』가 있음. poetica7@hanmail.net

 

 

 

이명박정부가 출범한 지 2년 가까이 되어간다. 몇가지 경우의 수 중에서 최선의 하나를 제외하면 나머지는 모두 똑같은 최악일 뿐이라고 생각하는 이들은 지난 2년이 특별할 게 없다고도 한다. 그런 말들은 차선의 실현을 위해 진흙탕을 뒹굴어야 하는 현실정치의 실상과도 거리가 있을 뿐 아니라, 미세한 차이들에 주의를 기울이고 거기서 영혼의 개별성과 세계의 징후를 읽어내는 문학의 기질과도 이질적인 것이어서 곧이들리지 않았다. 실로 지난 2년이 가져온 변화는 극심했다. 여느 분야에서도 마찬가지였겠지만 문학 역시 사태를 외면할 수 없었을 것이다. 덕분에 지난 1년 동안 ‘시와 정치’라는 논점을 둘러싸고 많은 글들이 발표되었다.1 『창작과비평』 2008년 겨울호 특집 ‘문학이란 무엇인가’에서 본격화된 논의가 같은 잡지 2009년 겨울호 특집 ‘우리 시대 문학/담론이 묻는 것’에서 얼마간 일단락된 느낌이 있어 그간 발표된 글들을 정리해 읽었다. 좋은 글들이 준 자극 덕분에 기왕의 생각을 교정하기도 했고 한편으로는 논의가 답보상태에 처한 것은 아닌가 하는 아쉬움을 느끼기도 했다. 시인들의 고투를 격려하고 비평가의 역할을 다시 생각해보는 것으로 독후감을 대신하려고 한다. 시인들은 무엇을 원하는가, 비평은 무엇을 해야 하는가,라는 두개의 물음을 차례로 묻자.

 

 

1. 시인들은 무엇을 원하는가?: 직접적으로 정치적이면서 첨예하게 미학적인-진은영의 경우

 

모든 것이 한 진지한 시인의 고뇌로부터 시작됐으니 그 물음을 다시 묻고 이야기를 시작해야 하겠다. “이주노동자와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투쟁을 지지하며 성명서에 이름을 올리거나 지지 방문을 하고 정치적 이슈를 다루는 논문을 쓸 수도 있지만, 이상하게도 그것을 시로 표현하는 것은 쉽지가 않다.”(진은영, 69면) 보다시피 이 문장에는 두개의 욕망이 개입돼 있다. 첫째, 이 시인은 직접적으로 정치적이기를 원한다. ‘모든 전위문학은 본질적으로 불온하다’(김수영)는 명제로 자족하는 이들이 많지만, 이 시인은 구체적으로 정치적일 수 있는 방법을 찾고 있어서 물음이 급박해졌다. 시인은 시만 잘 쓰면 된다는 식의 겸손한 무관심 속에서는 이런 물음이 생겨날 수가 없다. 둘째, 이 시인은 첨예하게 미학적이기를 원한다. 그녀는 “이상하게도 그것을 시로 표현하는 것은 쉽지가 않다”고 적었지만, 아니다, ‘그것’을 시로 표현하는 것은 쉽다. 어려운 것은 ‘좋은 시’로 표현하는 일이다. 이것은 첨단의 미학적 감각을 갖고 있을 뿐 아니라 어떤 명분과도 그것을 맞바꿀 생각이 없는 시인만이 던질 수 있는 물음이다. 요컨대 직접적으로 정치적이면서 동시에 첨예하게 미학적이고 싶다는, 결코 흔치 않은 이중의 욕망만이 저런 고백을 하게 한다.

이 시인의 질문을 넘겨받아 적잖은 평론가들이 ‘시와 정치’라는 주제를 놓고 새삼스러운 고민을 시작했지만 그 와중에 우리는 그 이중의 욕망 중 하나로부터 조금씩 멀어진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앞서 말한 대로 진은영(陳恩英)은 ‘직접적으로 정치적이기를’ 원한다. 이 시인은, 비정규직 혹은 이주노동자 등과 관련된, 그러니까 매우 구체적인 현안들에 입장을 표명하고 싶어한다. 그리고 어떻게 하면 시로 그럴 수 있는 것인지를 자문하고 있다. 그러나 이후의 논의들에서는 초점이 미묘하게 바뀐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잘 안된다, 어떻게 하면 되는 것일까’를 묻는 것에서 ‘잘 안된다, 왜 안될 수밖에 없는 것일까’를 묻는 것으로 말이다. ‘시인의 욕망’에 대한 물음이 ‘시의 본질’에 대한 물음으로 전환되었다고 하면 맞을까. 화제가 어느덧 ‘시란 무엇인가’로 바뀌면서, 시란 ‘본래부터’ 이러저러한 것이기 때문에 시와 정치라는 논제는 아주 특수하고 제한된 방식으로만 이해되어야 한다,라는 결론들이 경쟁적으로 제출되었다. 시인은 난제를 제시했고, 그 난제를 손쉽게 해결하기보다는 그 난관 속에서 난관과 싸우며 겨우 써나가고자 했는데, 비평가들은 어떤 독창적인 해답을 단호하게 제시해야 한다는 책임감 속에서 세련된 논리적 건축물을 만드는 데 더 골몰한 것은 아닌가. 시란 무엇인가에 대해서라면 누구나 한마디쯤은 할 수 있고, 또 거기에는 정답과 오답이 있다기보다는 더 맞고 덜 맞는 답이 있을 뿐이어서 답이 많을수록 좋기는 하지만, 급박한 물음을 던지면서 모험에 나서려는 시인에게 때로 그런 말들은 힘 빠지는 훈수가 될 수 있다. 시인이 시의 정치적 힘을 과거와는 다른 방식으로 확장시켜나가려고 할 때, 비평가들은 과거의 과오를 되풀이해서는 안된다는 걱정 때문에 다소 소극적으로 대처한 듯싶다.

예컨대 서동욱(徐東煜)은 “시는 본성상 바로 실재하는 사물과 상관없는 이런 이미지를 통해 탄생”(429면)하며 그런 의미에서 “시인은 비(非)진리에 관여하는 자”(431면)라는 두 명제를 단호하게 제시하는데, 상대적으로 덜 음미된 어떤 측면에 조명을 가할 수야 있겠으되, 그 과정에서 이렇게 원천봉쇄에 가까운 논리를 구사할 필요까지 있을까 싶다. 첫째, 이미지에 대해서. 내가 보기에 시의 최소단위는 ‘시적으로 운동하는 언어’이다. 이미지는 시가 그 최소단위에 기초해 구축하는 시적인 것의 한 측면일 뿐이다. 시에는 이미지뿐 아니라 육성에 가까운 진술들도 존재하고 그것들은 탁월한 이미지에 버금가는 시적 효과를 산출할 수 있다. 시의 이 부분을 간과하면 우리는 김수영, 고은, 황지우, 최승자의 ‘직설적인’ 어떤 시들이 불러일으키는 시적 스파크를 설명할 길이 없다. 둘째, 진리에 대해서. 서동욱은 “문학은 진리이다” 같은 말들을 “유치하기 짝이 없는 ‘유사종교적’ 발언”(426~27면)이라고 신랄하게 지적하는데, 어떤 시인이 (저 글이 비판하는 바 그대로) 무슨 만고불변의 형이상학적인 진리의 담당자임을 자임하고 나서는 경우에 대해서라면 일리가 있는 비판일 수 있지만, 바디우 식으로, 천상의 대문자 진리(Vérité)가 아니라 (역사의 현장에서 발발하는 사건들을 통해 개시되는) 다수의 진리들(des vérités)을 추구하면서 그 진리들이 산출되는 공정 중 하나로 예술을 지목하는 식의 유연함을 발휘하는 경우라면, 시가 진리를 떠맡는다고 말하지 못할 이유가 없다.[2. 정작 서동욱은 바디우를 바디우 자신이 (다수의 진리 산출 공정들 중 하나인 시〔예술〕에 철학을 봉합시켜버렸다는 이유로) 비판한 하이데거와 같은 계열로 간주한다. “양자 모두 시의 중요한 국면을 ‘진리에 대한 접근’에서 찾고 있”(426면)기 때문이라는 것인데, 이렇게 바디우의 진리 개념이 하이데거의 그것과 갖는 차이를 간과하고 둘 다 ‘진

  1. 발표순으로 정리해본다. 진은영 「감각적인 것의 분배-2000년대의 시에 대하여」(『창작과비평』 2008년 겨울호); 김행숙·서동욱·심보선·신형철 좌담 「감각적인 것과 정치적인 것 사이에서-오늘날 시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문학동네』 2009년 봄호); 이장욱 「시, 정치 그리고 성애학」(『창작과비평』 2009년 봄호); 서동욱 「시와 비진리-이미지의 논리」(『세계의문학』 2009년 여름호); 김형중 「문학과 정치 2009-‘윤리’에 대한 단상들 2」(『문학과사회』 2009년 가을호); 강계숙 「‘시의 정치성’을 말할 때 물어야 할 것들」(『문학과사회』 2009년 가을호); 강동호 「존재론적 비명으로서의 시적인 것-시적인 것과 정치적인 것에 대한 단상」(『창작과비평』 2009년 가을호); 조연정 「무심코 그린 얼굴-‘시’와 ‘정치’에 관한 단상」(『문학수첩』 2009년 겨울호); 백낙청 「현대시와 근대성, 그리고 대중의 삶」(『창작과비평』 2009년 겨울호); 함돈균 「잉여와 초과로 도래하는 시들-주체 과정으로서의 시 그리고 정치」(『창작과비평』 2009년 겨울호); 김춘식·서동욱·조강석·조연정·진은영 좌담 「우리 문학의 이전과 이후-2000년대 이전과 이후의 우리 시」(『문장 웹진』 2010년 1월). 본문에서 인용할 경우 이름과 면수만 적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