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김세희 金世喜

1987년 전남 목포 출생. 2015년 『세계의문학』 신인상으로 등단. lalie0077@naver.com

 

 

 

가만한 나날

 

 

1

 

첫 출근을 앞둔 일요일, 나는 대학로에서 우연히 재화 언니를 만났다. 구름 끼고 쌀쌀한 바람이 불던 오후였다. 그때 스물여섯이던 나는 출근을 앞두고 마음의 준비를 한답시고 종일 원룸에 혼자 있다가, 괜히 잡생각만 가득해지고 점점 압박감이 들어서 집 밖으로 나갔다. 마로니에공원 쪽으로 좀 걷다가 아이쇼핑을 할까 싶었다. 밤에는 엄마와 통화하고 일찍 잠자리에 들어야지.

지하철역 출구의 계단을 꽉 메운 사람들이 규칙적으로 밀려오는 파도처럼 일렁이며 끊임없이 지상으로 올라오고 있었다. 나는 그 앞을 지나다가, 누군가를 기다리는 듯 출구 한쪽에 서 있는 재화 언니를 보았다. 영어학원에 다닐 때 친하게 지낸 언니로, 그때 언니는 이미 회사원이었다. 길에 서서 서로 근황을 전하다가, 나는 내일부터 작은 마케팅회사에 출근한다고 말했다. 언니는 활짝 웃으면서 축하해주었다. 그러더니 내가 몹시 긴장한 상태라는 걸 알아채고 깔깔 웃으며 놀려댔다.

“맞다! 너 인생 첫 출근이지! 완전 떨리겠네?”

나는 갑자기 매달리고 싶은 심정이 되어서, 언니의 팔을 붙잡고 사회생활 선배로서 조언해줄 게 없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언니는 놀려대기를 멈추고 진지하게 고민하더니 말했다.

“음, 이렇게 생각하면 어떨까? 너 자신을 프로라고 생각하는 거야. 나도 어디서 들은 얘기인데, 난 도움이 됐거든. 신입이어도 난 아무것도 몰라, 난 초짜야,라고 생각하는 것보다 나는 프로야, 나는 프로페셔널해, 마음가짐을 그렇게 갖는 거지. 난 이 일을 프로답게 해낸다, 그런 자세로다가.”

언니가 계속해서 말했다.

“난 일할 땐 좀 까칠한 편이거든. 약간 완벽주의자 기질이 있어서. 그렇게 안 보일지 모르지만 내가 좀 그렇단다? 그래서 공과 사를 더 구분하려고 하는 편이야. 그런데 일할 때 말고 회식하거나 할 때는 일부러 좀 풀어. 바보 같은 소리도 하고. 그럼 사람들도 오히려 좋아해.”

그때 언니가 무슨 말을 했어도 나는 황금처럼, 귀인의 귀띔처럼 받아들였을 것이다. 다음날 아침 출근하는 만원 지하철 안에서, 그리고 낯선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가는 순간까지도 나는 주문을 외듯 나는 프로다, 나는 프로다, 중얼거리고 있었다.

신입은 나를 포함해 세명이었다. 회의 준비로 어수선한 사무실에서 우리는 서로 어색한 목례만 나눈 채 앉아 있다가 9시 정각에 복도 맞은편 회의실로 이동했다. 앳된 얼굴의 직원이 빠른 걸음으로 테이블을 빙 돌며 자료를 나누어주었다. 프린트 열기가 채 식지 않은 따끈따끈한 종이를 집어드는데, 어쩐지 쑥스러워서 입가가 실룩거렸다. 진짜 회사원이 되었구나, 실감이 났다. 나는 입가의 실룩거림을 억제하며 이런 회의라면 오십번쯤은 참석해봤다는 얼굴로 종이를 팔락팔락 넘겼다.

자료는 영업팀, 홍보팀으로 나뉘어 있었고, 팀별로 지난주 주요 업무 내용과 이번주에 진행할 업무가 칸 안에 정리되어 있었다. 블로그 후기 마케팅이 주력인 광고대행사로, 신생이지만 규모가 아주 작은 건 아니었다. 영업팀장이 의자를 당겨 앉으며 업무보고를 시작했다. 지난주 계약을 따낸 곳 중에 더진코리아가 있었다. 오랫동안 공을 들인 끝에, 이번에 런칭한 실내포차 브랜드의 광고를 맡았다. 네이스에 ‘실내포차’를 키워드로 검색했을 때 블로그 검색 결과 1페이지 안에 더진포차 맛집 후기가 노출되는 것이 계약조건이었다.

“신입도 세명이나 뽑았으니, 걱정 없겠죠?”

영업팀장이 넌지시 어깨를 들먹이며, 배턴을 넘긴다는 듯 말했다. 홍보팀장—사십대 초반 남성—이 머쓱한 웃음을 지으며 말을 받았다.

“그렇게 만들어야죠.”

그가 바로 나의 상사가 될 사람이었다. 신입들은 모두 홍보팀에 속했다. 블로그를 관리하고 의뢰받은 후기를 작성하는 일을 전부 홍보팀에서 했다. 다른 두 사람은 어떨지 몰라도, 마케팅 쪽으로 경력을 시작하는 점이 내게는 중대한 의미가 있었다. 국문과 출신이지만 3학년 때 이미 전공을 살리지 않고 일반 기업에 취직하는 쪽으로 진로를 잡았다. 시간이 좀 걸리더라도 첫발을 제대로 디디는 게 중요하다는 얘기를 귀에 못이 박이도록 들었고, 맞는 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정작 회사에 입사할 때는 전공 덕을 보았다. 인문학 전공자를, 그것도 글솜씨가 있는 지원자를 우대한다고 적혀 있었던 것이다. 꽤 시간이 걸렸지만, 그래도 결국 원하는 분야로 취업했다는 사실에 나는 오랜만에 성취감을 맛보았다.

 

 

2

 

그렇게 사회생활의 긴 이력이 시작되었다. 회의의 감흥은 곧 사라졌다. 매주 회의의 연속이었다. 특히 월요일은 ‘본격적으로’ 회의에 들어가다가 점심시간이 되곤 했다. 그중 가장 중요한 건 콘셉트 회의였다. 새로운 블로그 계정을 열 때마다 콘셉트 회의를 했는데, 처음엔 그게 뭔지 몰랐다. 테이블 앞에 팀원들이 둘러앉았고, 팀장이 선배들을 빙 둘러보며 말했다.

“자, 이번엔 어떤 인물을 만들어볼까?”

한 선배가 자료를 한장씩 나눠주었다.

—익스트림 스포츠를 즐기는 30대 후반의 돌싱남.

큰 테마 아래 그가 구상한 인물의 라이프스타일과 관심사가 정리되어 있었다. 친한 형을 모델로 만들어본 인물이라고 했다. 그는 평일 출근 전에 한강변을 따라 자전거를 타고, 주말엔 암벽등반을 다니며, 여름엔 써핑을 한다. 그는 형제가 몇명일까? 즐겨 방문하는 커뮤니티는, 챙겨 보는 예능 프로그램은 무엇일까?

팀장은 상상력을 강조했다. 그는 말하곤 했다. 사람들은 바보가 아니다. 블로그를 광고글로 도배하는 방식으로는 살아남을 수 없다. 딱 보면 광고 느낌이 오는 리뷰는 더이상 통하지 않는다. 기계적인 문구 말고, 상상력을 발휘해서 진짜 살아 있는 사람의 목소리를 내야 한다. 네이스는 블로그마다 등급을 매겼고, 일정한 점수에 도달해 ‘최적화 블로그’가 되면 그때부터 게시글이 검색 결과의 상위에 올라갔다. 그러면 광고에 투입할 수 있었다. 상당한 시간과 노력이 필요한 일이었다.

팀장은 우리 신입들에게도 각자 ‘1호기’를 준비하라고 했다.

“첫 블로그는 평생 기억에 남는 법이지. 잘 생각해서 준비해봐.”

그날부터 고민이 시작되었다. 웬만한 이력을 가진 웬만한 캐릭터는 선배들이 만든 것 중에 이미 다 있었다. 내가 들어본 적도 없는 온갖 트렌디한 관심사를 가진 인물들. 나는 나의 이력, 관심거리 중에 차별화될 만한 것이 뭐가 있을까 고민하다가 가장 좋아하는 고전소설의 주인공을 떠올렸다.

일주일 뒤, 우리 세 사람은 회의실 테이블 앞에 둘러앉았다. 마지막으로 팀장이 들어왔다. 홍성식—나보다 다섯살이 많았다—의 인물은 홍대와 합정에 이어 당시 새로이 핫플레이스로 떠오르기 시작한 망원동에 거주하는 30대 초반 힙스터 남자였다. 예린씨—나와 동갑이었다—는 뮤지컬을 비롯해 고급 문화생활을 향유하고 배우의 ‘출근길’ ‘퇴근길’까지 챙기는 등 단순한 소비자가 아니라 스스로를 문화산업의 일원으로 여기는 30대 중반 전문직 여성을 내세웠다.

그리고 내 차례였다. 홍성식은 내 자료에 첫 눈길을 준 순간, 피식, 또는 그와 거의 흡사하게 들리는 짧은 소리를 뱉었다. 그가 나를 세상물정 모르는 문과 출신 애송이라고 여기고 있다는 게 느껴졌고,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그는 나를 거의 딱하다는 듯 바라보았다.

그러나 팀장은 의외의 반응을 보였다. 돌이켜보면 막 시작된 내 사회생활 이력에서 중대한 기점이 된 장면이었다.

“아, 채털리 부인이라는 말 오랜만에 듣네. 명작 중의 명작이지. 대학 때 이 소설을 원서로 읽었는데 말이야.

그는 내 1호기 구상이 담긴 종이를 한 손에 들고 훑어보았다. 원서를 끼고 캠퍼스를 거닐던 때를 회상하는 듯 입가에는 수줍은 미소를 띠고 있었다. 알고 보니 그는 지방 국립대학의 영문과 출신이었다. 그는 무척 작은 체구에, 오른쪽 광대뼈 위로는 찰흙 반죽을 납작하게 붙여놓은 것 같은 흉터가 있었다. 선천적인 것인지 후천적으로 생긴 것인지 짐작하기 어려운, 표면이 매끈매끈한 붉은 흉터였다. 그러나 아주 흉하지는 않았고, 얼굴에 난 큰 점처럼 가장 먼저 눈에 띄고 어쩌다 저런 흉터가 생겼을까 궁금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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