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 문학이란 무엇인가
감각적인 것의 분배
2000년대의 시에 대하여
진은영 陳恩英
시인. 시집으로 『일곱 개의 단어로 된 사전』 『우리는 매일매일』이 있음. dicht1@hanmail.net
1. ‘새로운 노래, 더 나은 노래’
하프 켜는 소녀가 노래 불렀다.
진실된 감정과 잘못된 음조로,
하지만 난 그녀의 연주에
무척 감동받았다.
하이네(H. Heine)의 『독일. 겨울동화』(홍성광 옮김, 창비 1994)의 한 연을 읽으며 나는 웃었다.‘그래, 그런 시들이 있었지. 소박하지만 진실된 감정으로 나를 울리고 웃게 했던 시들이……’내가 혼잣말을 하면서 떠올린 것은 대단한 스타일 실험은 없었으나 삶의 생생한 진상으로 스무살 무렵의 나를 흔들어놓았던 시들이었다. 박노해나 백무산 또는 그들을 열심히 흉내내던 문청들의 어설프지만 열정에 가득 찬 시들.
그러나 다음 연으로 넘어가자 이런 상념이 엉뚱한 것임이 밝혀졌다.
사랑과 사랑의 아픔,
희생과 모든 고통이 사라지는
저 위, 보다 나은 저 세상에서의
다시 만남을 노래했다.
(…)
그녀는 오래된 체념의 노래를,
거대한 패거리인 민중이
울고 보챌 때 얼러 잠재우는
하늘의 자장가를 불렀다.
나는 그런 방식, 그런 텍스트를 알고 있어,
지은이들도 알고 있어.
그들이 몰래 술 마시며 남 앞에선
물을 마시라고 설교한 것을 알고 있어.
새로운 노래, 더 나은 노래를,
오, 벗들이여, 그대들에게 지어주겠노라!
우리는 여기 지상에서
하늘나라를 벌써 세우려고 한다.
우린 지상에서 행복을 희구하며,
더이상 궁핍함을 원치 않는다.
부지런한 손이 번 것을
게으른 배가 탕진해서는 안된다.
-『독일. 겨울동화』 제1장 부분1
왜 나는 엉뚱하게도 하프 켜는 소녀의 노래로 80년대 민중시들을 떠올렸던 것일까?
나는 그 시들에 깊이 공감했고 그 시대에 그 시들의 존재 자체를 사랑했지만, 아무리 노력해도 그렇게 쓸 수가 없었다. 지상에서 하늘나라를 세우는 일에 이의가 없을뿐더러, 그 일을 위해 새로운 노래, 더 나은 노래를 짓는 것이야말로 진심으로 희망하는 일이지만, 막상 펜을 들면 지금도 이 일만큼 힘들게 느껴지는 것이 없다. 이주노동자와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투쟁을 지지하며 성명서에 이름을 올리거나 지지 방문을 하고 정치적 이슈를 다루는 논문을 쓸 수도 있지만, 이상하게도 그것을 시로 표현하는 것은 쉽지가 않다. 사회참여와 참여시 사이에서의 분열, 이것은 창작과정에서 늘 나를 괴롭히던 문제이다. 나는 이 난감함이 많은 시인들이 진실된 감정과 자신의 독특한 음조로 새로운 노래를 찾아가려고 할 때 겪는 필연적 과정일 거라고 믿고 싶다.
많은 이들이 입을 모아 2000년대 들어서 낯선 감각과 새로운 어법으로 무장한 젊은 시인들이‘집단적’으로 출현했다고 말한다. 이들의 출현에 대한 반응, 이 집단에 대한 정의는 다양하다. 소통불능의 자폐적이고 이기적인 문학이라는 신랄한 비판이나 조금만 더 자아 밖으로 나오라는 애정어린 충고에서부터, 여러분이야말로‘도래’할 문학적 민중이 될 거라는 뜨거운 격려에 이르기까지, 상이한 반응들의 폭발에 정작 시인들은 당황했다. 새로운 시들을 둘러싼 이 논의들은 여러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겠지만, 적어도 내게는 나를 난감하게 만드는 문제, 즉 문학과 윤리 또는 미학과 정치의 관계에 대해 영원 회귀하는 질문들 그리고 그 대답들로 느껴진다.
그래서인지 얼마 전 신간 서적들 가운데 ‘미학과 정치’라는 부제가 붙은 자끄 랑씨에르(Jacques Rancière)의 『감성의 분할』2을 발견했을 때 나는 먼 친척 아저씨가 보내온 달콤한 과자상자를 받아든 아이처럼 설레었다. 혹시 이 상자 속에는 나의 오랜 허기와 미각을 동시에 만족시켜줄 것이 들어 있지 않을까?
2. 감각적인 것의 분배
미학과 감성론
사실‘미학’으로 번역되는 독일어 Ästhetik는 넓은 의미에서(칸트적인 의미에서)‘감각의 수용능력을 다루는 학’이며 곧 감성론이다. 그러나 우리는 일반적으로‘미학’이라는 용어를 훨씬 더 좁은 의미로 받아들여, 주로 미적 판단과 미적 감수성의 문제를 다룸으로써 예술을 독자적인 성찰과 연구의 대상으로 삼는 학문활동으로 이해한다. 그러나 이러한 이해에는 이미 예술이나 문학에 대한 특수한 관념이 전제되어 있다. 우리는 예술이나 미학이 좀더 넓은 의미의‘감각의 수용능력’과 관련된 것이라기보다는‘주관적 정서나 감정적 변양(modification)’을 다루는 자율적이고 독립적인 영역이라고 전제한다. 그리고 거기에는 암암리에 예술은 다른 인간활동들에서 분리시켜 다루는 것이 가능한 단독적 활동이라는 견해가 수반된다.
랑씨에르의 작업은 바로 이런 관념에 문제를 제기하는 것에서 출발한다. 그는 문학을 비롯해 예술 전반을 독립적이고 자율적인 영역으로 상정하는 것, 즉 예술을 단독적인 것으로 간주하는 것을 지난 “두 세기 동안에만 존재했던” 근대적 현상으로 보면서, 근대예술에 대한 성찰을 통해 예술에 대한 고정관념과 그로부터 발생하는 문제들을 검토한다. 국내의 몇
- 『독일. 겨울동화』 12~13면. ↩
- Jacques Rancière, Le Partage du Sensible: Esthétique et Politique, La Fabrique-Éditions 2000. 이 글의 번역은 『감성의 분할』(오윤성 옮김, 도서출판b 2008)과 The Politics of Aesthetics(trans. Gabriel Rockhill, Continuum 2004) 두 번역본을 참고했다. 본문에서는 (국역본;영역본)으로 면수를 표기한다. 자끄 랑씨에르에 대해서는 다음을 참고하라. 진태원 「평등의 원리에 대한 옹호」, 『대학신문』2007.11.1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