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상록

 

개념의 숲

 

 

고은 高銀

시인. 1933년 군산 출생. 1958년 등단. 시집으로 최근의 선집 『어느 바람』을 포함해 『문의마을에 가서』 『새벽길』 『조국의 별』 『남과 북』 『두고 온 시』 『백두산』 『만인보』 등 다수.
*이 글은 세계 각 지역의 지식인들에게 동일한 개념어 일람표를 보내어 그 다양한 정의(定義)들을 모아 책으로 내기 위한 한국측의 원고이다. 2003년 안으로 빠리의 라 디페랑스(La Différence) 출판사에서 간행될 예정이다.–필자

 

 

절대

만약 절대에 갇혀 있다면 이 세계는 얼마나 부자유하겠는가. 다행히도, 대지에 절대가 없는 것처럼 인간에게 절대가 없다.

절대는 무(無)이다. 있는 것은 오직 상대를 벗어나려는 바닥 모를 욕망이 있을 뿐이다.

 

부조리

관계의 시작, 까뮈는 다시 태어나서 그 이상의 것을 지향해야 한다.

 

활동

세계는 운동의 시간과 공간이다. 죽음 또는 흙속의 암반(岩盤)도 운동이다. 이 운동을 자기화(自己化)하는 것이 활동이다.

한밤중 잠든 삼라만상 일체가 활발하다. 하물며 역사 속의 선악이랴.

 

자기소외

소외는 필요하다. 인간에게 자기소외가 없다면 사회의 무자각적인 분자(分子)에 지나지 않는다.

나는 브레히트 연극이론에서의 ‘소외효과’에 주목한다. 극으로부터 현실을 소외시킴으로써 관객이 극에 몰입하지 않게 하는 것, 그래서 극과 현실을 구별함으로써 현실이 더욱 극명해지는 것.

하지만 정신으로서의 자기소외는 이미 유적(類的) 존재로부터의 소외와 차이가 있다.

 

사랑(愛)

소유에의 장님. 헌신에의 장님. 이 두 장님만이 사랑을 완성한다.

 

혼(魂)

인간에게 남은 마지막 유산이다. 그러나 부상당한 유산이다.

 

고뇌(苦惱)

20세기 말부터 고뇌는 미라가 되었다. 살려내야 한다. 지금 나는 고대의 숲이던 현대의 사막을 걸어간다.

 

귀족계급

귀족계급은 만찬장에만 존재한다. 만찬이 끝난 밤중에는 천민계급으로 돌아간다.

 

예술

종교의 장식물이었다.

지금은 상업의 장식물이다.

그러나 그 이전과 그 이후의 예술 없이 인간은 없다.

 

무신론

유신론 때문에 무신론이 있다. 무신론은 인간의 자기승화를 반영한다.

 

타자(他者)

나의 욕망이 증강할수록 타자는 증가한다.

아니다. 세계에 나는 없다. 있는 것은 타자들뿐이다. 타자로서의 공(空).

 

전위(前衛)

전위에는 청춘이 있다.

전위는 패배하므로 아름답다. 그 패배 뒤에 새로운 시대가 온다.

전위는 외부로부터 살해당할 뿐 아니라 내부로부터 깨지는 달걀껍질이다.

 

아나키즘

여기 이데올로기가 있다! 생태공동체 이데올로기가.

오 국가는 불선(不善)이다.

 

야만

문명의 밖에 남은 야만은 고향이고 구원(救援)이다. 그러나 문명 속의 온갖 야만이야말로 원시의 순수인 야만을 학살한다.

 

통속

나는 통속의 자식이다. 나는 통속의 아버지이다.

나는 나를 경멸한다.

나는 나를 학대한다.

 

창녀가 주부보다 더 통속이다.

무녀(巫女)보다 천사가 더 통속이다.

 

미(美)

미는 모든 가치의 귀결이며 인간이 궁극적으로 실현해야 할 세계의 내용이다. 진리는 진(眞)도 선(善)도 넘어서 미이다. 그러나 미에 대한 추(醜)에 미는 무력하다. 아 슬픈 미!

 

행복

행복은 철학의 지옥이다. 시의 무덤이다.

 

선(善)

선을 행하지 말라

그렇다면 악을 행할 것인가

선을 행하지 말라 했거늘

하물며 악이라니

 

악은 순수하지만

선은 그 일부분이 왠지 위선이다.

 

자본주의

자본주의 성숙단계에서도 자본주의 종말이라는 손님은 끝내 오지 않는다. 그러나 나는 기다린다.

자본주의는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인간의 본능과 욕망의 소산(所産)이다. 세계화 자본주의는 자본주의의 타락이다. 인간의 욕망을 스스로 제어하는 정신이 특히 미국사회에 생장(生長)해야 한다. 아시아의 몇 지역에 만연하는 천민자본주의여 가라.

 

검열

검열의 본능은

검열의 대상을 확대한다.

그러나 검열은 자유를 역설적으로 발전시킨다.

언론 출판의 자유가 모든 자유의 모체이므로 권력은 검열의 맹수가 되는 것이다.

 

원인

인과론이 싫다. 원인과 결과는 수학의 기본이 아니다. 원인은 원인들의 집합이고 그것들의 복합적인 과정은 길다.

 

중심(中心)

이제까지의 중심은 범죄였다. 독선이었다.

우주 어디에도

지역 어디에도 중심은 없다.

 

중심으로서의 권위를 타파하라

그러지 않으면

세계는 지난날의 제왕과 노예로 돌아가리라

 

오 해방의 모든 변방! 모든 무수한 중심들!

 

기회

히말라야 빙벽 혹은 아이거(Eiger) 북벽(北壁)의 얼음이 녹을 때를 위하여 배를 만들어라. 그러기 전에 북풍을 기다리는 열매들이 있다. 제 가지에서 떨어지기 위하여.

 

물(物)

기계적 유물론을 떠나라. 물(物)은 객체가 아니다. 물(物)은 현상이다.

 

시민(市民)

인민은 본질적이다.

시민은 현실적이다.

그래서 인민은 없고 시민만 있는 것처럼 보인다.

시민사회의 밑바닥에는 노예의 지층이 자리잡고 있다. 그 밑바닥에는 원시공산사회의 유골과 공룡의 배설물 화석이 자리잡고 있다.

 

상업

인간의 약탈행위를 변화시킨 것

싸게 사고

비싸게 파는 행위

아 농경시대 정기 시장은 생의 축제였다!

 

공동체

수많은 실패를 거듭하지만 공동체의 꿈 없이는 현세는 절망이다. 그러나 수많은 공동체의 이론들을 경계하라. 그 이론들이 잠드는 것도 경계하라.

 

커뮤니케이션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다

저것이 있으므로 이것이 있다

이것과 저것 사이

언제나 오고 가는 나그네 있다.

 

아이덴티티

아이덴티티는 있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이다. 아이덴티티는 단일하지 하고 복합적이고 혼혈적이기까지 하다.

 

세계화 속의 자아는 독립이 아니라 연합이다.

독립은 고아이다. 독립은 세계화의 손쉬운 먹이이다.

 

환상(幻想)

과학에 절망하지 말라. 너에게 환상이 있지 않느냐.

환상은 네가 떠나온 모태(母胎)이며 네가 가지고 온 유전(遺傳)이다.

 

나는 환상의 주인이다라는 랭보의 말밖에 무엇을 더 말하겠느냐.

 

상(像) 이미지

이미지로 눈뜨고

이미지로 잠든다.

 

내재성

관념으로 가는 길에 그것이 있다.

종교로 가는 길목에도 그것이 있다.

 

불가능

모든 것이 가능한 세계는 낭설이다.

불가능이 세계의 가능성이다.

 

무의식

의식의 밭보다 더 큰 들판이 무의식이다.

제6식으로서의 의식 이후 제7식 제8식까지 가거라.

거기에 그대 내생의 시작이 있다.

 

개인

근대 인간은 개인을 발견했다.

근대 이후의 인간은

개인의 한계를 발견했다.

 

발명

발명하는 고독은 내적이다

발견하는 고독은 외적이다

 

발명하는 고독을 찬미하라

 

연기와 증기 가득한 씰루엣의 밤

그 밤을 통째로 새우는

불사(不死) 영약(靈藥)을 발명하는 자를

여인이여 유혹하지 말라.

 

무한

무한에는 조국이 없다.

 

정보

바야흐로 정보의 권력이 군림하고 있다.

총소리가 나지 말아야 한다

총소리는 낡았다

보병과

포병도 낡았다

현금도 낡았다

왕족도 낡았다.

 

무구(無垢)

어린아이에게도 때[垢]가 있다.

어린아이의 마음에도 때가 끼어 있다.

 

순진무구, 그것은 소멸이 낳은 어린아이이다.

 

유희

일의 가치와 놀이의 가치는 서로 양보한다.

 

유한계급과 룸펜프롤레타리아의 시간을 놀이로 전화(轉化)시킬 것.

 

환희

삶의 약이며 치유(治癒)이다.

왜 인류는 축제를 도처에서 개최하는가.

 

향락

나의 향락은 책에 있다

나의 향락은 술에 있다

나의 향락은 스크린에 있다

나의 향락은 아직 혁명에 있다

나의 향락은 여행에 있다

나의 향락은 유한(有限)에 있다

나의 향락은 순간의 이성(異性)에 있다.

 

정의(正義)

정의는 힘인가

아니 정의는 가장 힘있는 꿈인가

 

판단

나는 1년 중 대부분을 판단정지 상태로 지낸다

나는 깨닫기 위해서가 아니라

취하기 위해서

이 세상에 태어났다.

 

이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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