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 테러 이후의 세계와 한반도
개방화 속의 국민경제·민족경제·지역경제
이일영 李日榮
한신대 국제학부 교수, 경제학. 저서로 『중국의 농촌개혁과 경제발전』 『개방화 속의 동아시아: 산업과 정책』(공저)이 있음. ilee@hanshin.ac.kr
1. 시작의 실마리
<장면 1> WTO 농업협정에 따라 한국도 매년 국내보조금 감축 의무를 이행하고 의무수입물량(MMA)을 확대해왔다. 국내 쌀생산이 증대되는데 쌀소비는 급격히 감소하였다. 쌀 재고물량 감축을 위해 북한에 쌀 보내기가 시도되었으나, 주요 언론의 비판에 직면하여 무산되었다. 농림부장관 자문기관인 양곡유통위원회는 추곡수매가를 전년보다 4〜5% 인하해야 한다고 정부에 건의했다. 농민단체들은 강력히 반발했고, 마침내 정부는 2001년 12월 4일 추곡수매가를 동결하기로 했다. 이에 양곡유통위원회의 소비자 및 학계의 일부 대표들은 위원직을 사퇴했다.
이러한 장면들을 보면서 1980년대 초에 대학을 다녔던 필자의 입장에서는 격세지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그 시절 “직접적 생산자의 이익을 증대시키는 것이야말로 역사의 진보를 위한 것이자 경제학의 임무”라는 가르침에 가슴 두근거리던 기억이 생생하다. 지금 그때 초심을 되살려 ‘하강분해’중인 농민의 이익을 위하여 정부·노동자·시민·기업가를 설득해야 하는가?
주어진 조건·환경 등을 감안하면서 실행가능한(feasible) 대안, 새로운 ‘생각의 집’을 만들 필요가 있다고 생각된다. 이를 위해서 ‘민족경제론’은 그 일국경제·축소균형의 지향이 수정된다면 매우 의미있는 출발점이 될 것이다. 한국 경제학사에서 ‘민족경제론’만큼 ‘단계론’(경제정책론)의 방법론적 문제의식을 지닌 경우를 발견하기는 쉽지 않다. 국민국가적 시장이 전지구적 시장으로 이행하면서 자본이 국민국가를 공격하고 노동과 직접 상대하려고 하는 싯점에서, 민족경제론의 합리적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국민경제’의 의미는 새롭게 규정될 수 있다.1
이 글에서 논의하는 국민경제·민족경제·지역경제는 아직 현존하지는 않지만 멀지 않은 장래에 존재할 수 있는 것이다. 굳이 국민경제를 정의한다면 18세기 이래의 국민경제나 1945년 이후의 국민경제에 머무르지 않고, 세계시장과 교통하는 국민경제·민족경제로 외연을 확대하려 하면서 지역경제의 내포를 충실히하려는 경제이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가 구상하는 국민경제는 ‘국민경제·민족경제·지역경제’이다.
이제 세계시장, 국내시장, 국제경제기구, 국민국가, 동아시아, 민족분단, 계급·계층, 지역사회 등 미궁처럼 얽힌 경제문제들에 새로이 접근하면서 제기되는 문제는 다음과 같다.
첫째, 우리는 식량과 에너지를 스스로 공급할 수 없는 작은 나라라는 것, 또 내수시장만으로는 안정된 소득과 고용이 보장될 수 없어서 수출시장이 필수적이라는 것, 따라서 세계화 또는 개방의 문제가 주어진 여건이라는 것.
둘째, 경제위기 이후 일본을 필두로 하는 ‘기러기행렬’ 형태의 동아시아 분업구조가 동요하고 있다는 것, 중국이 ‘세계의 공장’으로 부상한다는 것, 세계 각국 제조업의 중국 진출 열기가 뜨거우며 한국의 기업들에도 중국 붐이 고조되고 있다는 것, 한국 제조업의 중국 진출로 한국경제에서 제조업은 사라지고 써비스업만 남지 않을까 하는 우려가 고조되고 있다는 것.
셋째, 보수진영에도 진보진영에도 남북간 분단문제를 무시했으면 하고 바라는 이들이 적지 않지만 종국에는 이의 해결을 회피할 수 없다는 것, 국제관계 또는 남북관계의 환경 악화가 북한의 개방정책 지연, 경제실적 악화, 북한의 체제 경색으로 이어지며, 이는 다시 관계 악화를 가져오는, 이른바 ‘분단의 악순환’이 계속된다는 것.
2. 드높은 세계화의 파도 속에서
<장면 2>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힌 후 유대인들은 메시아가 올 것을 확신하며 로마에 대한 투쟁을 계속했다. 로마제국은 명장 베스파시안을 파견하여 유대의 도시들을 장악해갔으며 그의 아들 티투스는 서기 70년 마침내 예루살렘을 함락했다. 그 과정에서 100만명 이상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유대인들의 저항은 계속되었고 최후의 항전은 3년 뒤 마사다 요새에서 이루어졌다. 마지막 남은 960명의 남자·여자·아이 들은 로마군에게 항복하기를 끝까지 거부하고 전원 옥쇄하였다.
개방에는 두 개의 얼굴이 있다
현재 우리가 당면한 개방화의 압력은 우리가 역사적으로 매우 새로운 국면에 들어섰음을 의미한다. 신자유주의적 세계화는 종래의 국민경제의 역할을 크게 약화시키고 있다. 혹은 그 성장의 자연적 결과로(성장동기이론), 혹은 그 독과점적 성격 때문에(산업조직이론), 그리고 연구개발·마케팅·지식 등을 거래할 수 있는 시장이 불완전한 경우 이들 거래를 기업 내부화하기 위해(내부화이론), 직접투자를 늘리고 전략적 제휴를 추진한다. 이제 초국적기업은 전세계에 입지를 두고 생산을 하며 세계시장을 대상으로 마케팅활동을 벌인다. 또 1980년대의 ‘금융혁신’을 통해 국민국가 단위의 금융규제는 급속히 약화되었다. 그리고 신기원을 이룬 정보기술의 혁신에 기초하여 정보라는 ‘필수품’이 세계 각지로부터 공급되었다.
이러한 세계화의 경제적 효과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논란이 있다. 한편에서는 포트폴리오(분산투자)의 국제적 다변화를 통하여 위험이 분산될 수 있고, 개발도상국에 유입된 자본이 성장을 위해 투자될 것으로 기대한다. 각국 정부의 방만한 정책이 제어될 수 있고, 장기적으로는 투자가 증가하여 생활수준이 향상될 것으로 전망하기도 한다.
그러나 다른 한편에서는 빈번하게 이동하는 금융자본이 돌연한 열광이나 공포에 의해 몰려다니게 됨으로써(herding) 오히려 위험이 증대될 수 있으며, 세계시장의 왜곡으로 부의 효율적 배분이 이루어지기 어려워지는만큼, 세계화가 국민경제 차원에서는 경상수지 악화와 거품 형성으로 귀결될 것을 우려하기도 한다. 사전에 위기를 억제하기보다는 사후적 처방으로 위기를 더욱 증폭시키는 경향이 있으며, 정책자율성의 제약 때문에 분배구조가 악화될 것이라고 주장한다.2
이러한 두 가지 관점 모두 나름대로 설득력있는 경제학적 근거를 제시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세계가 하나의 시장으로 통합되는 경향을 보이지만, 범세계적인 조절양식이 현재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세계시장의 실패를 교정하고 불공정한 거래 행태를 규제하기 위해서는 세계적인 차원의 조절양식이 필요하다. 그러나 이러한 ‘세계정부’가 성립되기 위해서는 현존하는 국민국가의 다양한 이해관계와 정치적 자율성을 넘어설 수 있어야 한다. 어쩌면 이는 영원히 오지 않을 ‘대동(大同)’세계의 꿈인지도 모르겠다.
현실세계에 존재하는, WTO로 대표되는 새로운 국제질서는 후진국들을 더 확실히 세계체제에 편입시키는 한편, 자신들 이외에 강력한 국민국가가 존재하지 않는 국제질서를 수립하기 위한 선진국, 특히 미국의 의도에 따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세계적 차원에서 과두체제를 제도화하는 것으로 볼 수 있으며, 이러한 세계질서를 건설하는 데는 힘의 논리가 크게 작동한다.
그러나 국제경제질서가 단순히 미국의 이익만을 관철시키는 일원적인 구조로 편성되고 있다고 볼 필요는 없다. 우선, 국제기구들의 입장에도 다양한 스펙트럼이 존재하며, 특히 WTO는 1국 1표의 원칙을 따르고 있기 때문에 형식적으로만 볼 때는 전례없이 민주적인 국제조직이다. 물론 WTO가 실제로는 강대국들 위주로 운영되지만, 형식상의 제도가 강대국의 행동반경을 제약하는 측면을 전적으로 무시할 수는 없다.3
또 미국의 입장도 현실적으로 하나로 확정되어 있다고 볼 수는 없다. 미국의 대외경제정책은 자국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일방주의, 다자간 무역라운드에 적극 참여하는 포용주의, EU에 대응하는 지역주의가 중첩되어 있다. 따라서 뉴라운드가 표류하여 교착상태에 빠질 경우 일방주의·지역주의가 강화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한편 동아시아의 경우에는 발전단계의 격차가 크고 뚜렷한 정치적 리더십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지역주의의 흐름이 형성되는 데는 상당한 시간이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우리의 입장에서는 신자유주의적 세계화, 미국·EU의 지역주의, 미국·중국 등 대국의 일방주의에 대응할 방책이 필요하다. 대체로 이는 국민국
- 박현채의 ‘민족경제론’에 대하여 이병천은 ‘국민경제와 민주주의의 정치경제학’으로, 박순성·김균은 ‘대안적 근대화 프로젝트 또는 민중적 민족주의’로 재평가한 바 있다. 한국사회과학연구소 편 『동향과전망』 2001년 봄호(통권 48호)의 특집 ‘박현채와 민족경제론’ 참조. ↩
- 이에 대한 좀더 구체적인 소개는 박복영 『자본자유화론에 대한 재고』, SIES Working Paper Series No.110, 서울사회경제연구소 2001 참조. ↩
- Ha-Joon Chang and Peter Evans, “The Role of Institutions in Economic Change,” 성공회대사회문화연구소 콜로키움, 2001.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