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단

 

거리의 소멸, 경계의 소멸

디지털혁명과 유전자혁명이 초래할 21세기의 변화

 

이필렬 李必烈

방송통신대 교양과정부 교수.

 

 

20세기 과학기술은 입자가속기, 우주개발, 핵개발 등으로 대표된다고 할 수 있다. 이들 과학기술은 거대하고 중앙집중적이며 이데올로기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이 특징이다. 이와 달리 21세기의 과학기술은 규모가 크지 않고 분산적이며 자본과 친밀한 모습을 지니게 될 것으로 보이는데, 바로 그렇기 때문에 인간의 생활세계 속에 더욱 깊숙이 침투하여 인간 삶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킬 것이다. 21세기에는 20세기말에 세상을 뒤흔들며 나타난 정보기술과 생명조작기술이 과학기술의 중심으로 자리잡고, 이들로 인해 촉발된 ‘디지털혁명’과 ‘유전자혁명’이 급속도로 전개되는 양상을 보일 것이다. 이 두 혁명이 초래할 사회적·문화적 변화에 대한 가장 적절한 표현은 거리의 소멸(축소)과 경계의 소멸(약화)일 것이다. 혁명이 전개됨에 따라 지금까지 극복 불가능한 것으로 여겨진 공간적·시간적 거리가 점차 사라져갈 것이고, 지역이나 국가 간의 경계는 물론 식물과 식물, 동물과 동물, 식물과 동물, 남성과 여성, 청년과 노년, 부모와 자식, 어머니와 아버지 사이의 경계 그리고 더 나아가서 생물과 무생물 사이의 경계, 현실과 환상 사이의 경계마저 소멸되어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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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간적·시간적 거리의 소멸, 지역과 국가간 경계의 소멸은 인터넷으로 대표되는 정보기술의 발달로 나타난 것이다. 인터넷은 도시의 발명이 만들어낸 인공적인 공간과 비교될 만한 일종의 “인공적인 생활공간”으로 전세계 모든 곳을 하나로 연결하고,1 연결된 사람에게는 전세계를 그들 주변의 공간과 같은 것으로 만든다. 이 공간 속에서 사람들은 공간과 시간의 제약을 거의 받지 않고 자유롭게 의사소통과 이동을 경험한다. 물론 여기서 이동이란 피와 근육의 움직임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지적인 활동을 위한 이동을 말하는데, 육신의 움직임이 필요하지 않은 인간의 모든 활동은 실체적인 거리가 존재하지 않는 인터넷 속의 싸이버공간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사실 산업사회를 거쳐 정보사회로 들어오면서 인간활동 중에서 육신을 움직여야만 하는 활동은 점점 줄어들어왔다. 원시수렵사회나 농경사회에서 육신의 움직임은 거의 모든 활동을 위해 필수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정보사회를 넘어 지식사회로 자리잡게 될 21세기에 육신을 움직여야만 이루어질 수 있는 활동의 비율은 크게 줄어들 것이 분명하다.

디지털혁명이 극도로 진행되면 실체적인 것의 움직임이란 오직 재화의 이동을 위한 것뿐이고, 지식과 관련된 움직임은 거의 사라지게 되리라는 전망을 할 수 있다. 20세기에는 지식을 얻기 위해 학교나 도서관을 찾아다녔고 물건을 사기 위해 시장과 백화점으로 이동했으며 병이 나면 병원의 의사를 찾아갔지만, 21세기에는 시간을 소비하며 공간을 이동할 필요 없이 가상공간 속의 다양한 학교와 도서관을 찾아다니게 될 것이고, 싸이버쇼핑몰에서 다종다양한 물건을 뒤지면서 고르게 될 것이며, 가상공간 속에 자리잡은 가상의사나 통신망으로 연결된 의사로부터 진단과 처방전을 받게 될 것이라는 전망을 할 수 있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지적인 활동과 관련된 노동을 하는 경우도 직장에 갈 필요 없이 어느 장소에서나 일을 완수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사람들 사이에서 실제의 육체적·정신적 접촉이 그리워질 때면 만남을 위한 이동이 일어나겠지만, 가상현실 기술이 발달하여 현실공간에서 육체의 접촉이나 감각을 통해서 느낄 수 있는 감정을 싸이버공간에서 재현하는 단계가 되면 이같은 감정을 느끼기 위한 이동도 불필요해질지 모른다.

현실과 환상 사이의 경계의 소멸은 바로 가상현실 기술로 인해 일어나게 되는 현상이다. 가상현실 기술은 아직 걸음마 단계로 볼 수 있지만 급속도로 발달하고 있고, 현재에도 항공기나 전투기 조종연습에서는 실제와 거의 동일한 수준의 가상현실이 재현된다. 가상현실 속에서 조종사들은 곡예비행을 하거나 위험한 상황에 부딪쳤을 때 현실에서와 마찬가지로 맥박수가 늘어나거나 속이 울렁거리거나 식은땀을 흘리는 등의 경험을 한다. 가상현실 기술이 과학기술의 실험, 의학의 해부나 수술 등 다른 분야에도 적용되면, 이러한 가상현실 속에서 실험하고 수술하는 연구자나 의사는 가상현실에서 벌어지는 일을 조종사들이 그랬던 것과 마찬가지로 실제 상황에서 벌어지는 것과 조금도 다름없는 ‘현실’로 체험하게 될 것이다. 가상현실에서는 실체가 있는 것을 조작해야 할 필요가 없기 때문에 현실 속에서 불가능한 상황까지도 만들어내어 가상체험을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공상과학영화를 가상현실 속에 재현해놓으면, 이 현실 속에서는 우주선을 타고 빛의 속도로 우주를 날아다니고 「스타트렉」에서와 같이 순간적으로 공간이동을 하며 ET와 같은 우주생물체와 교류하는 체험을 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은 모두 환상이지만, 이때 가상현실 속에 들어가 있는 사람의 가상체험은 현실세계에서의 체험과 거의 동일하기 때문에 그는 현실에서는 불가능한 상황, 즉 환상을 마치 현실인 양 느끼게 된다. 그는 적어도 가상현실 속에 머무르는 동안은 환상과 현실을 구분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가 만일 가상현실과 실제현실 사이를 오가면서 환상과 현실에서 동일한 체험을 겪는 일을 자주 반복하게 되면, 그는 가상과 실재를 구별할 수 있는 이성적 능력을 상실해갈 것이고, 그에게 환상과 현실의 경계는 점점 불분명해질 것이다.

아직은 정보기술이나 생명공학처럼 급속하게 발달하고 있는 것 같지는 않지만 이들 분야와 마찬가지의 폭발력을 지닌 신경공학—마음·두뇌의 작용에 대해서 공학적으로 연구하는 학문분야—이 발달하면 가상현실과 현실, 나의 경험과 타인의 경험, 나의 감정이나 타인의 감정도 서로 구분하는 일이 어려워질 것이다. 가령 신경공학·정보기술·생명공학이 하나로 융합되어 두뇌의 신경회로에 극소형 컴퓨터칩을 연결할 수 있게 되면 두뇌의 능력이 증진되는 것 이상의 엄청난 변화가 일어날 수 있다. 이미 눈의 망막신경을 컴퓨터칩과 연결하여 시력을 회복시켜주는 일이 성공했는데, 이는 시작에 불과할 뿐 앞으로 두뇌 속에 컴퓨터가 삽입되어 인간의 정신작용과 컴퓨터의 능력이 결합될 날도 올 것이다. 영국의 컴퓨터공학자 워윅(K. Warwick)은 자신의 몸을 컴퓨터와 연결하기 위해 왼쪽 팔 속에 칩을 넣는 실험을 성공적으로 끝마쳤고, 다음 단계로 칩을 팔 속의 신경세포와 직접 연결시키는 실험을 준비하고 있다. 그는 이 실험을 스스로 “컴퓨터와 하나가 되려는”, 그럼으로써 궁극적으로 “인간이 싸이보그공동체로 진화”하는 데 ‘기여’하려는 계획이라고 말한다.2 이 과학자의 실험이 계획대로 진행되면 어느 한 사람의 경험이나 지식은 두뇌나 인체 신경망과 연결된 컴퓨터의 무선전송을 통해 여러 사람과 공유될 수 있을 것이고, 그 결과 여러 사람이 한가지 기억을 공유하는 일이나 텔레파시와 같은 것도 가능해질 것이다. 모든 인간이 싸이보그가 되고 이들 싸이보그가 컴퓨터 네트로 연결된 공동체를 상상해보라. 이들 사이에서는 한 싸이보그의 지식과 경험이 컴퓨터를 통해 다른 싸이보그에게 공유될 수 있으므로, 인간의 경우에는 개개인에게만 고유하게 간직되었던 지식과 경험 들의 경계가 사라지고 그럼으로써 싸이보그공동체의 일체적 감정이나 유대는 더욱 강화되는 일도 나타날 수 있는 것이다. 워윅은 일차 실험이 끝나고 컴퓨터칩을 팔에서 꺼냈을 때의 감정을 이렇게 표현했다. “방금 친구 하나가 죽은 느낌이었다.”

국가나 지역의 경계가 소멸되는 일은 이미 상당히 진행된 것처럼 보이는데, 이 또한 인터넷이 전지구를 연결하여 하나의 축약된 세계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언어의 장벽만 극복된다면, 인터넷을 통해 전세계 모든 곳의 사람들과 지식과 정보를 주고받을 수 있게 된 상황은 국가의 경계를 무의미하게 만든다. 물론 아직도 사람이나 재화의 출입에 대해서는 국가의 경계가 제한조건으로 존재하기는 하지만, 이를 제외한 다른 대부분의 경우에는 경계가 사라지고 있는 것이다. 국가권력은 자신의 입지가 흔들리는 것을 원치 않기 때문에 개개인의 전자적 의사전달과 정보교환을 강제로 막으려 할 수도 있고, 실제로 몇몇 나라에서는 인터넷 검열이 이루어지고 있다. 하지만 전체적인 조망이 어렵다는 네트워크의 특성을 고려하면 완벽한 검열이란 거의 불가능하다. 이러한 경계의 사라짐은 국가라는 인식틀에도 영향을 미쳐 국가 자체를 점차 작아지게 만들고 있으며, 급기야는 국가가 사라지고 말 것이라는 예측도 나오게 한다. 국가간 경계의 소멸은 지금까지 경계를 둘러싸고 숱하게 벌어졌던 충돌의 원인을 없앰으로써 “평화를 위한 강력한 동력”으로 작용할 수 있겠지만,3 외부로부터의 정치적·문화적·경제적 영향에 대항하여 내부의 정체성을 방어하거나 유입되는 것을 걸러내는 역할을 하던 장치가 사라져버린다는 점에서 국가 내적으로는 상당한 혼란을 가져올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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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물들간의 경계, 동물들간의 경계, 동물과 식물 간의 경계 소멸은 생명공학의 발달로 초래되는 것이다. 생명공학기술 중에서 얼마 전부터 과학기술의 최첨단으로 자리잡은 것은 유전자 이식기술과 생식공학기술이다. 유전자 이식기술의 핵심은 어떤 생물체의 염색체에 들어 있는 특정한 유전자 조각을 따로 떼어내고, 이 유전자를 다른 생물체의 유전자에 주입하여 새로운 유전자를 만드는 것이다. 이때 새로운 유전자를 주입받은 생물체는 이 유전자가 발현하는 특정한 성질을 보유하게 된다. 예를 들어 어두운 곳에서 빛을 발하는 반딧불 같은 곤충으로부터 발광유전자를 떼어내어 식물에 이식하면 이 식물은 밤에 빛을 내는 성질을 갖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아주 초보적인 유전자 이식에 지나지 않고 이러한 유전자가 이식되었다고 해서 식물로서의 성질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지만, 식물이 동물의 유전자를 지니게 되었다는 것은 동물과 식물의 경계가 소멸되기 시작했음을 의미한다. 앞으로 유전자 조작과 이식이 더 활발하게 진전되면 동·식물 사이의 경계는 더욱 불분명해질 것이다. 동물종들 사이의 경계는 동물과 식물 사이의 경계보다 더 빠르게 약화될 것이 분명하다. 이미 동물을 대상으로 한 유전자 이식 연구는 상당히 많이 진행되었고, 높은 지능과 관련된 유전자를 이식받은 생쥐, 생장이 빠르고 다른 생쥐보다 어깨가 훨씬 넓은 생쥐 등이 유전자 이식을 통해 만들어졌다. 인간에게 이식할 수 있는 심장을 대량으로 만들어내기 위해 인간에게 적합한, 이식했을 때 거부반응을 일으키지 않는 심장을 갖도록 유전자 조작된 돼지도 태어났다. 인간이 필요로 하는 각종 단백질을 몸속에서 만들어

  1. Florian Rötzer, Megamachine Wissen, Frankfurt/Main: Campus 1999, 8면.
  2. Kevin Warwick, “Cyborg 1.0,” Wired 2000년 2월호.
  3. 프랜씨스 케언크로스 『거리의 소멸ⓝ디지털혁명』, 세종서적 1999, 358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