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이주혜 李柱惠

2016년 창비신인소설상으로 등단.

소설집 『그 고양이의 이름은 길다』, 장편소설 『자두』 등이 있음.

leestori@hanmail.net

 

 

 

장편연재 3

계절은 짧고 기억은 영영

 

 

머리 긁어봐.

밥상 맞은편에서 엄마가 말했다. 시옷은 오른손의 숟가락질을 멈추지도 않고 왼손만 대충 들어 뒤통수를 긁었다. 이제 시옷은 오른손으로 국을 떠먹거나 젓가락질을 하면서도 왼손으로 머리를 긁을 수 있다. 엄마는 벌써 며칠째 밥상머리에서 시옷에게 머리를 긁어보라고 요구했고 시옷은 건성건성 구는 것처럼 보여도 일부러 뒤통수에서 가장 아래쪽을 골라 긁었다. 심사가 뒤틀리면 아예 대놓고 목덜미를 긁었다. 시옷이 뒤통수 아래쪽을 긁을 때마다 엄마의 눈빛은 크게 흔들렸고 곧 울 것 같은 표정으로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그즈음 엄마의 감정은 도무지 종잡을 수 없이 요동쳤고 시옷은 그런 엄마가 미웠다.

머리 한번 긁어봐.

엄마가 처음 이렇게 말했을 때 시옷은 어리둥절하게 오른손을 천천히 들어 정수리 한가운데를 살짝 긁었더랬다. 엄마는 불안한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시옷의 손이 향하는 방향을 집요하게 쫓아갔다. 시옷의 손이 정수리 바로 위를 맴돌다 이마 쪽으로 내려가면 엄마의 얼굴에 잠시 빛이 들었고 뒤통수에 가까워지면 단박에 어두워졌다.

앞쪽을 긁을수록 기다리는 사람이 빨리 돌아온단다.

엄마의 아리송한 요구의 의미를 알려준 사람은 할머니였다. 영이 맑은 아이에게 머리를 긁어보라고 시킨 다음 아이가 이마에 가까운 자리를 긁을수록 기다리는 사람이 빨리 돌아온다고 믿는 일종의 점술이라고. 시옷이 정수리 뒤쪽을 긁을 때마다 엄마가 숟가락을 딱 내려놓고 이부자리에 드러눕는 일이 반복되자 보다 못한 할머니가 몰래 정답을 알려주었다. 할머니는 시옷과 단둘이 부엌에서 밥상을 치우면서 누가 들을세라 나직이 속삭였다.

이마 쪽을 긁어. 그래야 네 아빠도 빨리 돌아오고 네 엄마 맘도 편해진다.

진짜요? 내가 이마를 긁으면 진짜로 아빠가 돌아와요?

할머니는 김칫국물이 떨어진 밥상을 행주로 훔치다가 손을 멈추고 물끄러미 시옷을 보았다. 할머니 눈빛도 밥상머리의 엄마처럼 흔들렸다. 이윽고 할머니가 고개를 떨구고 행주질을 마저 하며 말했다.

죽은 사람 소원도 들어준다는데 산 사람 소원 하나 못 들어주겠냐? 게다가 네 엄마는 산 사람 두 몫이지 않으냐?

다음 날 아침 엄마가 또 머리 긁어봐, 했을 때 시옷은 보란 듯이 뒤통수 한가운데를 벅벅 긁었다. 엄마가 소리 나게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할머니가 흐느끼듯 한숨을 토해냈다. 나무 관세음보살. 시옷은 엄마가 바라는 것을 주고 싶지 않았다.

더러워.

엄마의 그 말이 한밤중 응접실에 내던져졌을 때 방금까지 기타 선율과 두 남자의 노래로 안온했던 공기는 차갑게 얼어붙었고 불량하면서도 늘 당당했던 제비다방 남자는 초라하게 찌그러들었다. 다음 날 눈을 뜨자마자 시옷은 잠옷 바람으로 응접실 문부터 열어보았지만 남자는 보이지 않았다. 벽에 기댄 채 축 늘어져 있던 남자의 국방색 배낭도, 남자가 소중하게 보듬어 안고 연주했던 기타도 사라졌다. 남자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고 함께 나직나직 노래했던 친구라는 남자도 없었다. 제비다방 남자는 어떤 흔적도 남기지 않았다. 남자가 머무는 동안 응접실에 자연스럽게 배어들었던 담배 냄새도, 전날 밤 시옷의 재채기를 일으켰던 매캐한 최루가스 냄새도 감쪽같이 사라졌다. 남자는 정말로 응접실에 머물다 갔던 걸까? 혹시 이 모든 게 미욱한 시옷의 착각이나 꿈은 아니었을까? 아니다. 시옷은 남자와 함께 가만가만 불러보았던 「고향의 봄」을 똑똑히 기억했다. 그의 길쭉한 손가락이 은회색 기타 줄을 튕길 때의 은근한 반동을 목격했다. 사내자식이 제법이네, 하고 하얀 담배 연기를 푸슬푸슬 피워올릴 때 살짝 기울며 웃는 입 모양을 보았다. 남자는 분명히 시옷의 곁에 존재했다.

먹이가 곧 나다. 높이 살고 싶으면 높은 것을 먹어.

할머니 눈에는 ‘영 불량해 뵈고’ 엄마 눈에는 ‘더러웠지만’ 시옷에겐 이런 말짱한 말도 해줄 줄 알았던 남자가 이제 없었다. 시옷은 빈 응접실의 싸늘한 공기를 노려보며 엄마를 용서하지 않겠다고 생각했다. 아빠가 사라지고 엄마와 할머니가 각자의 불행과 시름에 빠져 시옷을 모른 척했을 때 함께 노래를 듣고 노래를 불러준 유일한 사람이 제비다방 남자였다. 그런 남자를 엄마가 쫓아냈다. 제비다방 마담의 돈을 갚지 않고 도망친 사람은 아빠였고 남자는 ‘제 어머니가 엽차 팔아 모은 눈물겨운 돈’을 돌려받으려고 했을 뿐인데, 엄마는 남자를 추악한 악당 보듯 했다. 그래놓고 인제 와서 자꾸 시옷에게 머리를 긁어보라고 하다니. 아빠가 얼마나 빨리 돌아오느냐가 오직 시옷의 손길에 달렸다는 듯 모든 책임을 시옷에게 떠넘기고 있지 않은가. 엄마가 밉고 아빠가 원망스러웠다.

머리 한번 긁어봐.

엄마가 요구할 때마다 시옷은 뒤통수 쪽을 긁어댔다. 엄마는 노여운 눈길로 시옷을 내려다보았다. 마치 시옷이 집에 돌아오려는 아빠의 길목을 일부러 막고 있다는 듯이. 밥상 위에서 시옷과 엄마의 시선이 얽히며 불꽃을 튀겼다. 할머니의 한탄이 뒤늦은 연기처럼 피어올랐다. 아이고, 나무 관세음보살.

 

토요일 오후, 엄마가 애니네 집에 병문안을 다녀오라고 했다. 애니가 방송국에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시위대를 만나 다친 지도 일주일이나 지났다. 엄마와 조용히 불화하느라 시옷은 그동안 애니를 까맣게 잊고 있었다. 그날 시위대 밑에 깔린 애니를 구해준 사람은 어느 용감한 대학생 언니였고 쫓아오는 전경을 피해 기절한 애니를 안고 뛰어준 사람은 제비다방 남자였다. 그 사실을 떠올리자 엄마가 새롭게 미워졌다. 시옷은 눈을 살짝 내리깔고 입을 비죽이 내미는 것으로 자신의 원망을 표현해보았지만, 엄마는 그저 자기 할 말만 했다.

병문안은 빈손으로 가는 게 아니야. 이거라도 가져가.

엄마는 화단에 핀 붉은 모란을 이파리와 함께 잘라 꽃다발을 만들어주었다. 봉오리 상태보다 조금 더 벌어진 모란은 소담해 보였다. 모란은 아빠가 가장 아끼는 꽃이었다. 빚쟁이가 되어 사라지기 전 아빠는 봄마다 모란이 피기를 기다렸고 꽃이 피면 친구들을 불러 마당 평상에서 늦도록 술을 마셨다. 시옷이 할머니 심부름으로 안주 접시를 들고 가면 불콰해진 아저씨들이 앞다투어 지갑을 열고 시옷의 손에 지폐를 쥐여주었다. 그런 밤은 늦도록 자러 가지 않아도 엄마한테 혼나지 않았고 부엌에 맛있는 음식이 잔뜩 쌓여 있어서 좋았다. 올해 모란은 아빠 없이 혼자 피었다. 아무도 모란에 눈길을 주지 않았다. 엄마는 아빠가 빨리 돌아오길 바라며 매일 시옷에게 머리를 긁어보라고 닦달했으면서 아빠가 가장 아끼던 모란을 다섯송이나 댕강 잘라 꽃다발을 만들었다.

애니보다 애니 엄마가 더 모란을 반겼다. 애니는 침대 머리에 등을 기대고 앉아 있었다. 프릴이 잔뜩 달린 하얀색 잠옷을 입은 애니는 애니메이션 「알프스의 소녀 하이디」의 클라라처럼 파리했다. 애니 엄마는 유리 화병에 모란을 꽂아 애니의 책상에 올려놓고는 쟁반에 담은 쿠키와 오렌지주스를 가져다주었다. 애니 엄마가 방문을 닫고 나가자마자 애니는 순식간에 클라라에서 명랑한 하이디로 변신했다.

왜 이제 왔어? 심심해서 죽는 줄 알았잖아!

애니는 처음 입이 트인 사람처럼 일주일 동안의 이야기를 쉬지 않고 쏟아냈다. 병원에 가 엑스레이를 찍고 깁스를 하는 동안 무서워 죽는 줄 알았다고, 아니 그전에 대학생들 밑에 깔렸을 때 눈앞은 깜깜하고 온몸이 짜부라지는 느낌이 들어서 이제 꼼짝없이 죽는구나 싶었다고 했다. 평소에는 학교 가기 싫어 죽는 줄 알았는데 일주일이나 결석하고 집에 가만히 있으려니 지루해 죽을 것 같다고 했다. 애니는 죽는다는 말을 많이 쓰고 있었다. 시옷은 그날 시위대에 휘말리기 직전 낙타색 트렌치코트를 입고 무전기를 들고 있었던 ‘진짜 간첩’을 보자 애니가 겁을 먹고 얼어붙었던 순간을 떠올렸다. 장래희망이 탐정이고 늘 시옷보다 씩씩하게 앞서 걸어갔던 애니도 사실은 겁쟁이였던 걸까? 시옷은 자기보다 키가 한뼘이나 더 큰 애니가 한참 어린 동생처럼 느껴졌다. 시옷은 애니를 와락 끌어안았다.

많이 아팠어?

응, 아파 죽는 줄 알았어.

무서웠어?

응, 무서워 죽는 줄 알았어.

이제 괜찮아. 내가 왔으니까.

응. 근데 있잖아.

어.

나, 아프다.

시옷은 화들짝 놀라 애니를 놓아주었다. 애니는 깔깔 웃으며 남은 이야기를 마저 들려주었다. 일주일 동안 엄마 아빠를 졸라 얻은 인형과 장난감을 자랑했고 병문안을 와준 학급 친구들 이야기도 했다. 「들장미 소녀 캔디」의 테리우스를 닮은 반장 남자애가 장미 꽃다발을 들고 병문안을 왔다고 말할 때는 시옷의 어깨를 괜히 툭툭 쳤다. 시옷은 엄마가 보낸 모란 꽃다발이 부끄러웠다. 장미 꽃다발은 분명 꽃집에서 비싼 값을 치르고 사 와 고급스러워 보였을 것이다. 시옷은 풀이 죽었지만, 애니는 그런 시옷의 마음을 조금도 눈치채지 못한 것 같았다.

아 참! 보여줄 게 있어.

지금껏 새 장난감과 인형을 실컷 보여줘놓고 뭘 또 보여준다는 말인지. 방금까지 어린 동생처럼 안쓰러웠던 애니가 순식간에 욕심쟁이 큰언니로 보였다. 애니는 한껏 들떠서는 시옷에게 당장 옷장을 열어보라고 했다. 아무리 환자라지만 침대에 가만히 앉아 이래라저래라 하는 애니가 이제 못된 공주님 같고 시옷은 구박받는 시녀 같았다. 시옷은 입을 부루퉁하게 내밀고 마지못해 애니의 옷장을 열었다. 화려한 드레스가 잔뜩 걸린 애니의 큼직한 옷장 맨 앞쪽에 감색 세일러복이 단정하게 걸려 있었다. 방송국 어린이합창단 단복이었다.

이리 가져와봐.

시옷은 옷걸이째 단복을 꺼내어 들고 애니 곁으로 갔다. 애니의 새하얀 침대보 위에 내려놓은 감색 단복은 근사해 보였다. 애니는 지금은 합창단 연습에 나갈 수 없지만 가정의 달 특집방송 녹화 당일에는 이 단복을 입고 방송국에 가 노래할 거라고 말했다.

연습을 못했는데, 괜찮겠어?

시옷의 물음에 애니는 코끝을 살짝 찡그리며 웃었다.

입만 벙긋벙긋할 거야. 엄마가 그러는데 무대 맨 앞에 세워준다고 약속했대.

누가?

프로그램 피디 아저씨가.

시옷은 그런 말도 안 되는 약속을 한 사람이 지휘자 선생님이 아니라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감색 세일러복을 입고 무대 맨 앞에 서서 방긋방긋 웃으며 노래하는(아니, 노래하는 시늉을 하는) 애니는 정말 예쁠 것이다. 애니는 감색에 잘 어울리는 빨간색 리본을 달고 고개를 살짝 까딱이면서 노래하겠지. 하지만 그날 시옷도 애니 옆에서 맑은 목소리로 「고향의 봄」 2절 솔로를 부를 것이다. 시옷이 사랑하는 애니의 얼굴과 지휘자 선생님이 사랑하는 시옷의 목소리가 함께 전파를 타고 온 도시에 퍼질 것이다. 꼭 그렇게 될 것이다.

너도 단복 샀어?

애니가 물었다. 시옷은 시무룩하게 고개를 저었다. 엄마는 시옷만 보면 머리를 긁어보라고 하면서도 단복을 살 오천원은 주지 않았다. 매일 방송국에 다녀올 차비 백원을 줄 때도 땅이 꺼지게 한숨을 쉬었다. 돈이 있는데도 일부러 안 주는 게 아니란 걸 아니까 엄마를 원망할 수는 없었지만, 특집방송 녹화일이 다가올수록 끝내 단복을 구하지 못할까봐 막막했다. 어쩌다 단복 이야기를 꺼내도 엄마는 못 들은 척했고 할머니는 나무 관세음보살만 찾았다.

근데 너, 남자 단복을 입어야 하는 거 아냐?

애니가 갑자기 생각난 듯 물었다. 시옷도 단복을 구해야 한다는 생각만 했지 남자 단복을 입어야 한다는 생각은 하지 못했다. 방송국 어린이합창단에서 시옷은 ‘빈소년합창단에 들어가도 손색없는 미성의 소유자’이자 ‘맑은 소년’으로 통했다. 막막했던 마음 한 귀퉁이가 툭 터지며 눈물이 쏟아졌다. 밖에서 애니 엄마와 아빠가 들을까봐 한껏 숨을 죽였는데도 울음은 점점 격해질 뿐이었다. 애니가 어쩔 줄 몰라하며 시옷을 향해 손을 뻗었지만 깁스를 한 채로 시옷을 맘껏 안아줄 수도, 눈물을 닦아줄 수도 없었다. 애니의 눈시울에도 눈물이 그렁그렁 차올랐다. 애니는 울지 마, 울지 마, 하면서 저도 같이 울었다.

울음이 잦아들자 애니가 책상 첫번째 서랍을 열어보라고 했다. 깔끔하게 정리된 서랍 속에 애니가 말한 분홍색 보석상자가 있었다. 상자 안에는 애니가 문방구에서 사 모은 알록달록한 플라스틱 반지와 목걸이가 가득했다. 장신구를 쏟아내니 밑바닥에 두번 접은 천원짜리 지폐가 나왔다. 모두 삼천원이었다.

너 가져.

온갖 복잡한 감정이 한꺼번에 몰려왔다. 큰돈이 생겼다는 기쁨부터 시옷네가 가난해졌다는 것을 애니도 알고 있구나 싶은 초라함, 그래도 아직 이천원이나 모자란다는 막막함, 애니 엄마가 알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 엄마가 알면 당장 돌려주라고 할 텐데 싶은 야속함까지 모두 억센 손아귀가 되어 시옷의 작은 몸을 사정없이 흔들었다. 시옷은 어지러워 눈을 질끈 감았다.

이천원도 구해볼게. 요즘 엄마 아빠가 내 말은 거의 다 들어주거든.

욕망이 자존심을 이겼다. 시옷은 오른손에 지폐 석장을 꼭 쥔 채로 애니를 와락 끌어안고 말했다.

녹화 날까지는 꼭 구해야 해!

 

*

 

마웨: 아유, 그 돈 내가 주고 싶네.

고슴: 40년 전 오천원이면 지금 물가로 얼마나 될까요?

도치: 검색해보니 1980년에 짜장면이 오백원 정도였대요. 오천원이면 짜장면 열그릇 값이네요.

마웨: 내가 그 시절로 돌아갈 수 있으면 저 애기 만나서 오천원 주고 싶어. 애가 짠하잖아. 짜장면 열그릇이 문제야? 백그릇도 사줄 수 있어.

고슴: 그럼 40년 후의 시옷님한테 짜장면 백그릇 사주시면 되겠네요. 저는 옆에서 짬뽕 한그릇만 먹을게요.

도치: 저는 탕수육이요.

마웨: 거, 시옷님 일기나 마저 들읍시다.

 

*

 

특집방송 녹화를 일주일 앞둔 날 비상계엄령이 선포되었다. 시옷이 국민교육헌장만큼 어려운 ‘비상계엄령’이라는 단어를 똑똑히 기억하는 건 그 말을 텔레비전 뉴스를 통해서도 엄마의 입을 통해서도 여러번 들었기 때문이었다. 일요일이었다. 늦은 아침을 먹고 할머니 방에 느긋하게 엎드려 철 지난 만화잡지를 뒤적이고 있는데(아빠가 사라진 후 시옷에게 월간 만화잡지를 사주는 사람은 없었다) 엄마가 미닫이문을 드르륵 거칠게 열고 들이닥치더니 다짜고짜 시옷을 잡아 일으켰다.

따라와.

시옷은 쭈뼛거리며 엄마를 따라 안방으로 갔다. 방 한가운데 엄마가 책상 대신 사용하는 작은 밥상이 펼쳐져 있고 그 위에 물에 불어 귀퉁이가 찢어진 천원짜리 지폐 석장이 놓여 있었다. 시옷의 심장이 입 밖으로 튀어나올 것 같았다.

이 돈 어디서 났어?

애니가 준 돈을 바지 주머니에 넣고 다녔는데(가장 안전한 장소라고 생각했다) 더러워진 옷을 갈아입으면서 깜박 잊고 돈을 그대로 넣어둔 채 빨래통에 던져 넣었던 모양이었다.

어서 말하지 못해?

시옷은 고집스럽게 입을 꾹 다물었다. 시옷은 그 순간에도 오직 저 찢어진 돈으로도 단복을 살 수 있을까와 엄마의 밥상에 놓인 저 돈을 어떻게 되찾을 수 있을까만 생각했다.

너 설마…… 훔쳤니?

엄마의 말투에 경멸이 뚝뚝 묻어났다. 시옷은 아랫입술을 꾹 깨물고 엄마를 노려보았다.

이게 어디서 못된 것만 배워서!

엄마가 다급히 주위를 둘러보더니 전화기 옆에 놓인 먼지떨이를 집어 들었다.

이리 와.

시옷은 엄마 말을 무시하고 움직이지 않았다. 엄마가 먼지떨이를 거꾸로 쥐더니 무릎걸음으로 달려와 손잡이 막대로 시옷을 때리기 시작했다. 가느다란 대나무 막대가 한껏 휘어지며 시옷의 종아리와 허벅지에 무분별하게 닿았다.

말해! 이 돈! 어디서! 훔쳤어!

엄마는 매질 한번에 단어 하나씩을 강조하며 시옷을 때렸다. 다리에 불이 붙는 것 같았지만 시옷은 입술을 더 세게 깨물고 울음을 참았다. 엄마의 악다구니가 점점 커졌다. 밖에서 들으면 시옷이 엄마를 때리는 줄 알 것이다. 시옷은 울지도 않고 소리도 지르지 않겠다고, 그러는 순간 엄마에게 지고 말 거라고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엄마는 숫제 비명을 지르며 울부짖었다. 안방 문이 드르륵 열리며 할머니가 뛰어 들어왔다.

아이고! 관세음보살!

할머니는 엄마 손에서 먼지떨이를 뺏어 멀리 던져버리고 동시에 바닥으로 쓰러지는 시옷을 감싸 안았다.

아이고, 우세스러워라. 이게 무슨 일이냐그래.

엄마는 아직 분이 풀리지 않았는지 어깨를 격하게 들썩이며 씨근거렸다. 엄마의 얼굴은 눈물과 콧물로 엉망이었다.

얘가 글쎄 돈을 훔쳤어요!

아니야!

시옷이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훔치지 않았어!

할머니와 엄마가 더 해명해보라는 듯 동시에 시옷을 보았다.

애니가 줬어.

거짓말하지 마! 애니가 뭣 때문에 이렇게 큰돈을 줘? 너, 설마, 애니네 집에서 훔쳤니?

관세음보살!

아니야! 애니가 줬어!

애니가 왜?

애니가…… 합창단복 사라고……

순간 셋 다 각기 다른 표정으로 입을 다물었다. 시옷은 말을 맺지 못하고 아랫입술을 다시 깨물었고, 할머니는 두 눈을 질끈 감았으며, 엄마는…… 엄마는 얼굴 근육 전체를 씰룩이며 떨었다. 방 안에는 잠시 세 사람의 숨소리만 들렸다. 이윽고 엄마가 천천히 전화기 쪽으로 가 수화기를 들었다. 드르륵. 드르르륵. 드륵. 드르르르륵. 다이얼 돌아가는 소리가 크게 울렸다. 상대가 전화를 받기를 기다리는 동안 엄마는 싸늘한 눈빛으로 할머니 품에 안긴 시옷을 바라보았다.

지휘자 선생님? 여기 교동입니다.

시옷은 할머니 품에서 풀쩍 튀어오를 만큼 놀랐지만, 엄마는 여전히 시옷을 뚫어지게 바라보며 통화를 이어갔다.

죄송하지만, 앞으로 저희 아이, 합창단에 못 보냅니다. 선생님도 뉴스 보셨죠? 비상계엄령이 선포되었잖아요. 세상이 너무 험해서 아이를 밖으로 내보낼 수가 없어요. 지난번에도 방송국에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시위대를 만나 크게 다칠 뻔했어요. 예, 압니다. 아니요, 녹화도 못합니다. 아이가 많이 놀랐어요. 아직 어린 나이잖아요. 선생님이 이해해주세요. 예. 그럼 전화 끊겠습니다.

엄마는 수화기를 내려놓는 순간에도 시옷을 향한 시선을 풀지 않았다. 격하게 오르내렸던 엄마의 어깨가 잠잠해졌다. 그때 시옷은 깨달았다. 엄마는 지금 시옷에게 징벌을 가하고 있다고. 시옷이 소중히 여기는 걸 정확히 파악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