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원일 金源一

1942년 경남 김해 출생. 1966년 대구매일신문 신춘문예 당선. 장편 『불의 제전』 『늘푸른 소나무』 『마당 깊은 집』 『슬픈 시간의 기억』 등이 있음. pine2545@hanmail.net

 

 

 

고난일지

 

 

74년 4월

통행금지 시간이 가까워서인지 집집마다 전등불이 꺼졌고 주위가 조용했다. 후줄근한 점퍼 차림에 등산모를 눌러쓴 김씨는 한길을 피해 골목길만 골라 길을 둘러서 집으로 가는 걸음이었다. 김씨는 친지집이나 후배들 자취방을 옮겨다니며 하루나 이틀씩 기식했으나 때가 때인지라 재워주는 측이 시한폭탄이라도 들여놓은 듯 두려워했고 그 역시 눈치가 보여 닷새 만에 귀가를 결정한 참이었다. 긴급조치 4호라는 전대미문의 초강경 대통령 특별담화 발표가 있은 지난 3일 이후 그는 신변에 불안을 느껴 집을 나와선 며칠에 한번꼴로, 그것도 통금을 앞둔 야밤에만 집에 들렀다가 어둠이 걷히기 전에 집을 나섰다. 그렇게 집 떠나 한달 가까이 바깥에서 싸돌 동안 집안 생계를 책임진 처보다 두 딸애 모습이 자주 눈에 밟혔다. 김씨는 여염집 벽에 붙어 걷다 후딱 뒤돌아보거나 걸음을 멈추고 한참 동안 인적 없는 어두운 골목길 뒤쪽을 살피기도 했다. 가로등이 없는 컴컴한 골목길은 어둠속에 희미한 꼬리를 보인 채, 따라붙는 미행자가 감지되지는 않았다. 그래도 누군가가 자기 뒤를 밟고 있다는 불안감이 마음을 옥죄어왔다. 펄떡이는 가슴을 널빤지가 누르고 군홧발이 널빤지를 밟고 지나갈 때마다 심장이 터질 듯 펌프질했다. 구토 증세마저 있어 속이 매스껍고 신물이 목구멍을 넘어왔다. 그는 점심때 서문시장 채소전 어귀의 노점에 쭈그리고 앉아 지게꾼 둘과 함께 국수 한그릇을 먹었다. 갓 삶아낸 국수에 멸치국물 한 국자를 붓고 호박 고명을 얹어 간장 양념친 국수였는데, 좌판을 벌인 젊은 새댁과 제 엄마 일손을 거드는 단발머리 딸애를 보니 예전 엄마와 누이 생각이 나서 자꾸만 목이 메었다. 그게 체했는지도 몰랐다. 육이오전쟁 와중 적수공권(赤手空拳)으로 고향을 떠나 어린 세 자식을 거느리고 대구로 나온 엄마는 오갈 데가 없어 한동안 역 대합실 피난민 사이에 섞여 노숙하며 구걸질부터 시작했다. 김씨는 숙식만 해결해주면 된다며 일자리를 찾아 떠돌다 칠성동 기찻길 옆 방앗간의 심부름꾼이 되었다. 먼 친척의 도움으로 엄마가 처음 잡은 일거리는 역전 마당에서 벌인 좌판으로, 채를 썬 묵 한줌을 콩국물에 얹어주는 묵장사였다. 엄마는 돈을 조금 모으자 비산동 판잣집에 방 한칸을 사글세로 얻고는 교동시장 골목 모퉁이에 좌판 펴고 국수장사를 시작했고 초등학교조차 그만둔 어린 누이가 엄마 장사일을 도왔다. 엄마는 연세 들고도 일손을 놓지 않고 그렇게 억척스레 살았으나 강원도 최전방에서 군복무중이던 김씨 아우가 총기오발 사고로 죽은 뒤부터 상심해하며 자주 자리에 눕더니 환갑을 못 넘겨 아들 뒤를 따라갔다.

봄밤의 부드러운 대기를 뚫고 먼데서 숨가쁜 호루라기 소리가 들렸다. 김씨는 걸음을 멈추고 귀를 기울였다. 고함소리나 발걸음 소리는 들리지 않고 호루라기 소리만 단절음으로 몇차례 이어지다가 그쳤다. 학원강사 겸 근로자학교 교사인 박군의, 오늘은 밤도 늦었으니 주무시고 가라는 말을 뿌리치고 그의 자취방을 나설 때가 밤 열한시였으니 아직은 통금시간이 일렀다. 야간순찰에 나선 사찰형사가 앞서 가는 거동 수상해 뵈는 통행인을 쫓거나 밤늦게 다니는 청년학생을 불심검문하려 뒤쫓고 있는지 몰랐다. 도망치는 자를 따라가는 어지러운 발걸음 소리가 환청으로 들렸다. 그는 요즘 신경이 극도로 예민해져 대수롭지 않은 작은 일에도 금방 연상이 그런 쪽으로만 줄기를 뻗었다. 신경의 가닥들이 난마처럼 얽혀 극도로 날카롭다는 것쯤은 김씨 자신도 알고 있었다. 자기 목을 벨 듯 면도날이 눈앞에 스쳐가 깜짝깜짝 놀랄 때도 있었다. 유신헌법이 선포되기 전까지만도 내가 이토록 과민반응으로 들볶이지는 않았는데, 하고 자신의 나약함을 딱하게 여겼으나 성격 탓이려니란 결론에 이르면 더 무엇을 탓할 수 없었다. 그는 빈농의 자식으로 시골 초등학교를 졸업한 후 대구로 나와 어린 나이에 생활전선에 뛰어들었다.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야간학교를 다니며 청년기에 이르기까지 몸소 터득한 신조가 있다면, 의리있는 진실한 인간이 되자, 하층 민중들의 복지 향상을 위해 그들과 함께 살아야 한다는 다짐이었으나 자신을 실천력 강한 배포 큰 성격이라고 생각해본 적은 없었다. 소년기부터 세상살이에 부대껴 매사에 회의적인 소심한 성격이었다. 어쩌다 뜻 맞는 동지들을 만날 때도 열심히 자기주장을 떠드는 쪽이 아니라 조용히 듣는 편이었고, 좌중의 언성이 높아지면 “누가 듣겠심더. 목소리 좀 낮추이소” 하고 주위를 둘러보며 들뜬 분위기를 자제시키곤 했다.

박통은 72년 10월 17일 국회 및 정당을 해산하고 전국에 비상계엄령을 선포한 뒤, 개헌 국민투표를 실시하여 유신헌법을 확정했다. 이어 12월 17일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 선거를 실시한 끝에 23일 첫 집회를 열어 간접선거로 제8대 대통령에 당선되었고 27일에 취임했다. 요식행위로 일사불란하게 진행된 공포 분위기의 두달 여, 뜻있는 사람들은 유신헌법을 두고 웬 전제군국주의의 부활이냐 싶어, 박통이 한시절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동아시아 제패 성전’에 앞장섰던 타까끼 마사오(高木正雄)였음을 새삼 환기했다. 유신헌법 철권통치 아래 세상은 한동안 숨죽여 고즈넉했으나 73년 10월 2일 서울대학교에서 처음으로 유신반대 데모가 터졌다. 연이어 여러 대학이 유신헌법철폐 데모에 나서고 동맹휴학에 들어갔다. 대학은 조기방학이 실시되었으나 12월에 들어 종교계와 지식인들의 개헌지지서명운동이 확산되자 74년에 들어 1월 8일, 박통은 유신헌법 논의를 금지하는 초헌법적인 긴급조치 1호와 비상군법회의를 설치한다는 긴급조치 2호를 선포하고, 시범삼아 이를 위반한 민주인사들을 체포해 군법회의 재판에 회부시켰다. ‘겨울 공화국’이 된 한반도는 한파가 휩쓸었고 사람들은 밟으면 꺼질 살얼음판을 딛듯 조심스럽게 운신했다. 대학이 새 학기로 문을 여는 3월을 시작으로 학내 써클활동이 본궤도에 오르는 4월을 두고 ‘3·4월 위기설’이 파다하더니, 4월 3일 동시다발로 서울의 각 대학들이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민청학련)이란 이름으로 유신헌법철폐 전단을 뿌리고 반정부 데모에 나섰다. 그날 저녁 10시에 대통령은 특별담화를 통해 ‘이 조치를 위반한 자 및 비방한 자는 사형·무기, 또는 5년 이상의 유기징역에 처한다’는 긴급조치 4호를 선포했다. 이어 대학이 집결한 서울을 필두로 지방대학이 있는 도청 소재지 대학가와 시내 거리에는 사복형사와 경찰들이 깔렸다. 수사당국은 각 대학의 운동권 학생 수배자 명단에 따라 이들을 색출 연행하느라 거주지를 덮쳤고, 거리에서는 청년학생의 불심검문이 무작위로 행해졌다.

김씨는 서른아홉 나이로, 대학을 졸업한 지 햇수로 십년에 가까웠다. 그는 방앗간, 철공소, 자동차 정비소, 방직공장 직공으로 옮겨다니며 야간고등학교를 졸업하자 대구 청구대학 법학과 야간부에 적을 두고는 군복무를 마쳤고, 등록금 조달이 어려워 서른에 들어서야 가까스로 대학 졸업장을 쥘 수 있었다. 나이가 나이인지라 나한테까지 닥칠 절박한 상황이 아니니 과민성부터 털어버려야 한다고 다짐해도 그는 그게 쉽지 않은 나날이었다. 김씨는 사일구학생혁명 이후, 반공법 위반으로 2년 6월 실형선고를 받고 감옥생활을 겪었기에 그 당시의 암울했던 나날들이 자꾸 떠오름은 어쩔 수 없었다. 한국 헌정사상 그 사례가 없는 초법적인 긴급조치 4호가 발동된 이번엔 아무래도 신변에 위해가 닥칠 것만 같은 불길한 예감을 떨쳐내기가 쉽지 않았다. 지난 3일 박통의 특별담화 선포가 있은 뒤, 우선 연락을 끊고 몸을 피하라는 전갈이 전화를 통해 동료로부터 날아든 이후, 김씨는 일체의 연락선을 끊었다. 동료들의 안부가 궁금해도 이를 자제하지 않으면 안되었고, 자신의 일터였던 ‘침산공단 직업상담쎈터’와 ‘근로자 학교’에도 발을 끊었다. “봇물 터질 듯한 대학생들의 유신헌법철폐 데모를 차단하자는 데 우선 목적이 있겠지만 진보적인 민주인사의 대량구속 또한 시작될 걸세. 우선 몸부터 피하고 보세. 당분간 연락을 끊겠네.” 이선생 사무실에 김씨가 공중전화를 냈을 때 선생 말이 그랬다. “지난 삼월 하순에 들어 운동권 학생들의 대대적인 검거가 시작되었다는 정보가 있심더. 지금 서울에선 그 색출로 이 잡듯 뒤지고 있어 나도 쫓기듯 대구로 내려왔어예. 이럴 땐 피신하는 게 상책입니더.” 서울을 다녀온 홍형도 전화에서 그런 말을 했다. 김씨도 일면 머리기사로 대문짝만하게 실린 박통의 특별담화를 4일자 조간신문에서 읽은 바 있다. ‘작금 우리 사회의 일각에서 공산주의자들이 상투적으로 전개하는 적화통일을 위한, 이른바 통일전선 초기 단계적 불법활동 양상이 대두되고 있다. 이같은 불순요인을 발본색원함으로써 국가의 안전보장을 공고히 다지고자 헌법 절차에 따라 긴급조치를 선포하게 되었다.’ 박통의 이 발언은 선언적인 위협을 넘어서서 반정부 활동을 주도하는 청년학생이나 유신헌법에 비판적인 인사들을 공산계열과 연계시켜 그 어떤 올가미를 씌울 계획적인 음모가 당국에 의해 은밀히 진행되고 있음을 암시하고 있었다. 김씨는 출옥 후 64년에 중앙정보부가 조작한, 자신도 처음 들어본 당 명칭인 ‘인민혁명당 사건’에 연루되어 스무날에 걸쳐 고문을 당한 끝에 기소되었으나 무죄로 석방된 바 있었다. 그는 사일구학생혁명 직후 고조된 통일열망과 남북협상 재개에 발맞추어 출범한 사회당 민주자주통일 중앙협의회 산하 경북지역 민주민족청년동맹(민민청)의 대학책 총무간사 일을 맡은 바 있었다. 총무간사 직책은 밖으로 나서서 눈에 띄게 활동하는 일이 아닌, 기부금과 회비의 출납을 관장하는 서무일이었다. 그러다 오일륙군사쿠데타로 박이 권력을 잡자 혁신계 수배자 명단에 그의 이름이 올랐다. 그는 피신하던 중에 고향에서 체포되어 2년 6월형을 산 바 있다. 출옥 뒤 내성적인 성격과는 상관없이 어느 사이 진보적인 투사로 알려져 곤혹스러웠으나, 외유내강이 바로 김형을 두고 하는 말이란 주위의 부추김을 그는 내심 수긍했다. 같은 생각을 가졌던 대구지방 혁신계 동지들과 친분을 맺자 그는 그들이 추천하는 사회과학 이론서로 학습하는 과정을 거쳐 냉전체제 종식, 외세 없는 자주적 민족통일에 열성적인 지지자가 되었다. 그가 뜻이 맞는 동료들과 자주 만나 군사정권의 통치행태를 두고 비판적인 대화를 나누곤 했던 게 인혁당으로 둔갑되었던 것이다. 박통의 발언이 왠지 십년 전 악몽과 연계되어 그의 마음을 압박해옴을 어쩔 수 없었다.

다시 고향으로 내려간다? 오늘낮 달성공원에서 석간신문을 훑어보다 김씨는 그 생각을 했다. 열흘 전 고향으로 피신해 재종숙네 과수원 창고에 숨어 사흘을 지냈는데, 아무래도 여기가 안전한 곳이 못된다는 재종형의 말에 따라 새벽같이 고향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창녕경찰서 정보과에서 형사가 두 차례나 마을로 들어와 친인척 집을 샅샅이 돌며, 근간에 김종호가 고향을 다녀간 사실이 없냐고 꼬치꼬치 캐물었다는 것이다. 언제까지 수사기관의 눈 기이며 대구 바닥을 헤매고 다닐 수야 없지 않은가. 김씨는 다시 고향으로 내려가 양식과 반찬감을 지고 고향 뒷산 성산성터에 땅굴이라도 파고 들어앉아 곧 닥칠 당국의 검거선풍이 가라앉을 때까지 두더지처럼 생활하는 게 첩경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고향에서 돌아온 뒤 그는 주로 달성공원과 그 옆 서문시장을 어슬렁거리며 낮시간을 보냈다. 사람들 틈에 섞여 있는 게 그래도 처신에 안전했던 것이다. 달성공원은 벚꽃놀이가 한창이라 들놀이나 소풍 나온 사람들로 밤이 이슥토록 왁실덕실 붐볐다. 우리나라 몇 손가락에 드는 공설시장인 서문시장에서는 사람이 많이 끓는 곡물전, 어물전, 채소전을 배회했다. 물건을 사고파는 장사꾼과 장꾼들의 흥정을 뒷전에서 넘겨다보노라면 초조하고 불안한 상념에서 잠시나마 헤어날 수 있었다. 예나 지금이나 근로대중이 살아가는 생활현장은 장거리에서 가장 잘 드러났다. 한푼이라도 더 받으러 뜨세지게 구변을 풀고, 한푼을 깎겠다고 시세를 따지고 물건 트집을 잡는 그들의 입씨름을 보면, 한여름 무성하게 자라는 잡초 같은 그들의 팍팍한 삶에 코끝이 찡해지기도 했다.

김씨의 코끝에 꽃향기가 은근하게 묻어왔다. 눈을 주니 판자담장 위로 가지를 뻗은 앵두나무의 튀밥같이 자잘한 흰 꽃이 어둠속에 뽀얗게 드러났다. 김씨는 잠시 걸음을 멈추고 꽃에 눈을 주었다. 문득 영국 시인의 유명한 시 「황무지」 첫 구절이 떠올랐다. ‘4월은 잔인한 달……’ 시인의 시작 의도야 어쨌든, 사실이 그랬다. 진정 74년 4월은 잔인한 달로 역사에 남게 될 것이다. 꽃샘추위조차 자취를 감추어 본격적인 봄날로 접어드는 4월이면 자연은 순환에 맞추어 푸나무들이 잎 피워 푸르름을 떨치고 갖가지 꽃이 피어나는 좋은 절기이다. 달성공원에는 벚꽃과 진달래에 이어 철쭉이 잇달아 꽃망울을 터뜨렸다. 그러나 올해 4월의 이땅은 동서남북조차 분간할 수 없는 암흑천지가 되고 말았다. 경찰국가이듯 철저한 통제로 자유를 묶고 전제정치로 장기집권을 획책하는 독재자가 계절을 거꾸로 돌려세워 4월을 혹한의 잔인한 달로 바꾸어놓았다. 김씨의 후각은 앵두꽃의 향기조차 순수한 마음으로 감지할 수 없었다. 시대의 형편을 읽지 못한 채 무심하게 피는 꽃이 원망스럽고, 한편으로 자신의 처지처럼 절기를 잘못 짚고 피어난 듯 잔망스런 꽃이 불안해 보였다. 앵두나무 밑둥치를 잘라버리면 꽃과 잎이 금방 시들 테지. 그러나 뿌리가 튼튼하다면 내년에 밑둥치에서 다시 연약한 줄기가 나와 잎을 피울 거야. 한두 해 기운을 추슬러 줄기가 성큼 자라 가지를 치면 4월에 다시 꽃이 피고 여름이면 숯불 같은 빨간 열매를 맺겠지. 그러나 인간은? 나무의 가지에 해당되는 팔다리는 몰라도 몸통이 잘리면 그것으로 생명이 다하는 것 아닌가. 그의 생각이 또 엉뚱한 비약으로 옮아가 불안이 마음을 저몄다. 인간의 태어남과 죽음이 자연의 섭리대로 관장되어야 하는데, 인간이 인간의 죽음을 강제함으로써 비극을 낳는다. 전쟁 전후의 격동기에 수많은 사람이 억울하게 죽었고, 아버지 역시 허무히 죽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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