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 갈림길에 선 한국 시와 시비평
고도자본주의 시대의 사회생태적 상상력
김진경·하종오·백무산의 근작시
임홍배 林洪培
문학평론가, 서울대 독문과 교수. 주요 평론으로 「시와 혁명」 「주체의 위기와 서사의 회귀」 「현실주의 논쟁의 교훈과 노동소설의 진로」 「괴테의 세계문학론과 서구적 근대의 모험」 등이 있음. limhb059@snu.ac.kr
1
김진경(金津經)은 『슬픔의 힘』(문학동네 2000)에 부친 자서(自序)에서 “세상이 사람의 속도를 넘어 사물의 속도로 진입한” 지 이미 오래된 자본의 시대에 맞서는 시의 존재방식을 이렇게 말하고 있다.
속도가 빨라지면 차도의 폭이 점점 좁아져 마침내 하나의 선 속에 사라지듯이 나날이 빨라지는 속도가 모든 풍경과 관계를 소멸시킨다.
이 속도 속에서 시란 과연 무엇일까?
속도가 뱉어낸 모래알로 이루어진 거대한 사막, 시는 그 사막 위를 지루하게 걷고 있는 낙타인지도 모르겠다. 낙타는 거대한 초원을 꿈꾼다. 그 꿈을 포기한 건 아니지만 이제 가끔 숲 한구석에 웅크리고 온몸으로 세계를 느끼는 짐승에게만 허용되는 죽음의 문과 그 너머의 영원한 시간이 느껴지기도 한다.
이러한 발언은 시집 『지구의 시간』(실천문학사 2004)에까지 이어지는 시적 사유의 전개양상을 명료하게 보여준다. 그것은 요컨대 모든 인간관계와 사물의 질서를 자본의 운동 속에 포섭시키는 현실을 다름아닌 자연사(史)의 과정으로 파악하는 방식이다. 90년대 이래 시단에 유행처럼 번진 자연서정시에서 흔히 자연은 현실의 피안으로 설정되지만, 김진경의 사회생태적 상상력에서 자연은 현실에 대한 비판적 성찰의 매개물인 동시에 현실의 작동원리 자체로 내재화된다. 그래서 시인은 자연사를 관통하는 생성소멸의 철칙이 어떻게 사회현실의 내적 원리로 작동하는가를 ‘죽음의 문턱’에서 ‘온몸으로 세계를 느끼는 짐승’의 감각으로 감지한다. 가령 “천천히 시멘트를 되새김질하는/믹서기를 등에 얹고/거리를 질주하는 레미콘차”는 “지질학적 자본의 시대가 발명해낸/육식공룡”(「레미콘차」)으로 표상된다. 더 많이, 더 높이, 더 빨리 뭔가를 쌓아올리기 위한 레미콘의 질주에서 시인은 제어되지 않는 포식성으로 인해 멸종한 육식공룡의 질주를 보는 것이다. 이 ‘육식공룡’은 일단 현실의 추상을 통해 얻어진 관념의 유비물이지만, 관찰자인 ‘나’까지도 육식공룡의 먹이사슬 속에 위치시킴으로써 그것은 다시 관념이 아닌 현실이 된다.
그놈이 거침없이 곁을 지날 때면
맹렬히 움직이고 있는 그놈의 이빨
바퀴 밑으로 나는 빨려들어가버린다
그리고 잘 되새겨진 시멘트 범벅을
소화액처럼 확 뒤집어쓴다
나는 나날이 잘 소화되고 있다
―「레미콘차」(『슬픔의 힘』) 부분
이렇게 ‘나’의 일상을 규제하는 불가항력을 일단 현실로 승인하는 ‘나’는 마침내 육식공룡의 ‘살점’이 되어 어쩔 수 없이 공룡의 속도에 끌려가면서도 “매일매일 그놈의 위장 속 같은/아파트로 돌아와 몰래몰래 탈출을 꿈꾼다”. 그렇지만 시의 마지막 연에서 유보하듯 “시멘트 범벅 속에서 날아오르는 것”은 사막의 낙타가 초원을 꿈꾸는 것처럼 지난한 일이다. ‘죽음의 문 너머의 영원한 시간’을 느끼는 일은 온몸의 촉수가 죽음의 문을 향해 열려 있을 때만, 그리하여 자연사의 일부인 인간사회가 자연생태적 순환의 바깥에 있지 않다는 것을 온몸으로 체감할 때만 비로소 가능할 것이다. 김진경의 시가 ‘육식공룡’의 다양한 변주를 시도하는 것은 그 때문이다. 그의 시에서 그로테스크한 이미지들이 종종 등장하는데, 물고기는 청동의 물속을 헤엄쳐다니고(「청동 물속을 헤엄쳐다니는」, 같은 책), 잡식성의 인간은 끈끈이주걱으로 변종이 되며(「사람도 때로는 끈끈이주걱일 때가 있다」, 『지구의 시간』), 내셔널 지오그래픽 채널에 힘입어 지구적 차원의 ‘청정’ 관광상품이 된 자연공원의 사자와 홍학은 환경주의자가 먹다 버린 빵조각의 형상으로변형된다(「내셔널 지오그래픽」, 『슬픔의 힘』). 이 그로테스크 시편들은 ‘모든 풍경과 관계를 소멸시키는’ 사물화의 원체험에 대한 미메씨스를 통해 자본주의적 일상에서 자연스럽게 여겨지는 일체의 삶의 방식을 낯설게 보여주면서 지금과는 다른 삶의 방식을 절박하게 촉구하고 있다.
자연과 인간, 인간과 기계를 동일한 생태계의 벡터(verctor)로 포착하는 이러한 시적 사유는 「레미콘차」에서 보듯이 주로 이질적 시공간을 중첩시키는 방식을 취한다. 다음 시도 그런 경우다.
뜯어먹다 만 초식동물의 몸뚱이처럼
노숙자 하나 건너편 벤치에서 입을 벌린 채 혼곤히 잠들어 있다
주위 풀밭이 온통 핏빛이다
―「겸손한 여생」(『슬픔의 힘』) 부분
「레미콘차」 같은 시가 다분히 산문적 진술로 기우는 것과 달리 이 시는 일상의 한 장면을 간명한 이미지로 응축하고 있다. 노인네들이 장기를 두고 비둘기 모이도 주는 한가로운 공원풍경에서 시인은 얼핏 “영양들이 한가하게 되새김질하는 초원”을 떠올리지만, 그 평화로운 일상의 심연 사이로 노숙자의 곤핍한 모습이 “뜯어먹다 만 초식동물의 몸뚱이처럼” 처절하게 시야에 들어온다. 그 몸뚱이가 일순간 ‘핏빛 풀밭’의 대극적 이미지로 시의 전경에 클로즈업되면서 나날의 안위조차도 생존의 바닥으로 내몰리는 사람들을 양산하는 사회질서에서 자유롭지 못함을 섬뜩하게 일깨우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일상의 작은 단면을 사회적 차원으로 확대하여 투시하는 방식은 최근 시집 『지구의 시간』의 표제작에서 일상의 축과 지구적 시간이 엇물리는 양상으로 펼쳐진다.
애기배추를 갉는 토끼와
갉아먹힌 애기배추 그루터기에 속이 상하는 나와
통학버스와
이 아침밥의 시간들과
그 위에 저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폭탄을 퍼부을 수 있는 시간들과……
―「지구의 시간」 부분
각각의 시행은 한 개인의 일상에서 서로 무관해 보이는 원근의 관심사를 나열하고 있다. 인용된 부분의 앞에 각 시행의 정황이 길게 서술되어 있지만, 그 대목까지 함께 읽어보아도 이 마지막 연에서 병치된 상황들 상호간의 연결고리는 쉽게 드러나지 않는다. 미완의 종결로 그런 궁금증은 더욱 증폭된다. 알다시피 이처럼 우발적 계기들의 동시적 병존을 즐겨 구사한 것은 초현실주의자들이다. 그들이 시간의 흐름을 그 어떤 인과율로 구성하지 않고 우연의 연쇄로 해체시킨 것은 포디즘(Fordism) 시대에 진입한 자본의 작동방식이 개개인의 삶을 표준화하는 경향에 대한 저항의 의미를 지니며, 그들이 자본주의적 삶의 합리화 기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