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김하기

1958년 경남 울산 출생. 1989년 『창작과비평』으로 등단. 소설집 『완전한 만남』 『은행나무 사랑』, 장편 『항로 없는 비행』 『천년의 빛』 등이 있음. ljy0313@thrunet.com

 

 

고추방에 누워

 

 

1

 

언제나 고추방은 내게 어머니 자궁 속같이 아늑하다. 따뜻한 온돌방에 붉은 고추가 마르면서 올라오는 매운 김이 몸으로 스며든다. 추석연휴가 시작되기 이틀 전에 올라왔으니 벌써 엿새째 이 방에 누워 있다. 이 방에서 지낸 지 하루 만에 먼 여행에서 걸려온 독감은 뚝 떨어졌다. 지금 누워 있는 내 모습이 좀 기이하게 보일는지 모른다. 머리맡엔 소주병들이 어지러이 나뒹굴고 있고 나는 두 팔을 벌린 채 방안 가득 널린 고추 위에 누워 있다. 한달 전 회사가 최종 부도처리가 되고 수배가 떨어지자 나는 배낭을 꾸리고 여행을 떠났다. 정처 없이 전국을 떠돌다가 고향으로 내려와 고추방으로 숨어든 건 추석 이틀 전 밤이었다.

자정이 넘어 고모집 대문을 두드렸다. 고모는 놀란 눈으로 나의 두 손을 덥석 잡고는 주르륵 눈물부터 쏟았다. 고모, 내가 왔다는 걸 누구에게도 알려서는 안돼. 난 고모에게 몇번이고 다짐을 주었다. 고모는 겉으로 보기엔 눈꼬리와 입매가 위로 휘어져 야무져 보이지만 실은 마음이 헤프고 눈도 약간 할개눈이다. 젊은 남편이 죽은 뒤 정신이 폭삭 내려앉아 그렇게 되었다는 말도 있고 아궁이에 불을 때는데 난데없이 시커먼 흑돼지가 불 속에서 튀어나와 놀라자빠진 뒤로 그렇게 되었다는 말도 있다. 어쨌거나 고모에게 중요한 말은 재삼재사 다짐해두지 않으면 안된다.

“고모, 특히 철상이한테는 내가 왔다는 말을 절대로 해선 안됩니다.”

철상이는 죽마고우지만 경찰이다. 최말단 순경에서 시작하여 승진을 거듭한 끝에 지금은 이곳 Y서에서 경무과장으로 근무하고 있다. 고모는 내가 오면 제일 먼저 옆집의 철상이에게 뽀르르 달려가 연락을 취하곤 했다. 하지만 철상이는 그의 성격으로 봐서 오랜 친구라 하더라도 죄가 있다면 법대로 처리할 위인이다.

“윤도는 언제 온답디까?”

“갸는 명절이 닥치면 늘 일찍 내리왔데이. 내일 올 끼다. 효자 아이가.”

“그럼 윤도 올 때까지 멀방에 있을게요.”

윤도는 고모의 아들이고 나에게는 고종사촌이다.

“그 방에 고추를 늘어놔서 매불낀데.”

“괜찮아요. 감기에는 매운 게 그만이죠.”

멀방은 내가 태어난 방이기도 하다. 세월이 흘러도 이 방에 들어올 때면 어머니의 품안에 들어온 듯 아늑하고 편안했다. 멀방, 안채에서 멀리 떨어진 방이라 해서 멀방이라 불렀다. 지붕 천장에 박힌 굽은 소나무 서까래, 방을 가로지르는 두 개의 긴 시렁, 화롯불에 밤을 굽다가 태워먹은 장판지 자국은 변함없이 그대로 남아 있다. 멀방은 어머니와 아버지가 신행을 보낸 방이고 고모가 친정으로 몸을 풀러 와서 윤도를 낳은 방이기도 하다. 새마을운동으로 양잠 바람이 불었을 때는 누에를 치는 잠실이었고 텃밭 위에 본가를 새로 지은 뒤에는 퇴락하여 고추를 말리거나 쌀자루를 쟁여놓는 헌 창고가 되었다. 그러나 이 방만은 아직도 아궁이에 볏짚과 고춧대를 태워 방을 데우는 온돌방이다. 나는 늘어놓은 붉은 고추를 밀어내고 뜨끈뜨끈한 구들목에 시린 등을 붙이고 눕는다. 춥고 피곤한 여행에서 지친 몸에 온기와 매운 향이 스며들면서 밀린 잠이 쏟아지기 시작한다. 불땀 좋은 장작이 타는 소리가 타닥타닥 구들 밑 방고래까지 울린다.

가난하지만 꿈 많은 유년기를 보낸 이 방은 미물스런 세상과 아득하게 멀리 떨어진 순수한 영혼의 요람이었다. 바깥세상과는 문을 닫고 따뜻한 어머니의 뱃속 같은 멀방에서, 난 이혼한 뒤 처음으로 수면제와 신경안정제의 사용 없이 깊은 잠에 빠져든다.

 

 

2

 

회사가 부도나자 나는 배낭을 메고 집을 나섰다. 롯의 아내처럼 소금기둥이 될 것 같은 예감에 뒤돌아보지도 않고 서둘러 도둑촌이라 부르는 P동을 벗어났다. 오래된 집을 떠나는 데 미련이 없을 수는 없었다. 가장 아쉬운 것은 수족관의 금붕어들과 헤어지는 것이었다. 붉은 금붕어들 중에서도 십여년 묵은 홍백색의 비단잉어는 정말 대단한 놈이었다. 두 가닥 흰 수염을 길게 늘어뜨리고 정수리에서 꼬리까지 선홍색 붉은 반점을 곤룡포처럼 두르고 유유히 유영하고 있는 그놈을 보면 금붕어의 제왕다운 위엄이 있었다.

믿어지지 않겠지만 한번은 그놈이 도둑놈을 쫓아낸 일도 있었다. 도둑이 현관문을 따고 거실로 침입했을 때 잉어와 물고기떼들이 수족관 안에서 갑자기 튀어올라 용도리질치는 바람에 도둑이 혼비백산하여 달아났다. 우리 부부도 물고기의 퍼드덕거리는 난리법석에 잠이 깼는데 거실의 발자국, 열린 현관문과 대문 등을 종합해보건대 물고기 소리에 놀란 도둑놈이 제 발이 저려 도망간 게 분명했다. 하지만 잉어도 필사적으로 지켜낸 그 집을 나는 지키지 못하고 집달리에게 넘겨주어야 했다.

난 껍질이 터진 고추에서 씨를 받아 방에다 흩뿌려본다. 붉은 고추들이 금붕어떼로 변해 꼬리와 지느러미를 흔들며 우르르 몰려오는 듯하다. 고추씨가 동이 나자 나는 성한 고추를 툭 분질러 씨를 빼낸다.

문이 삐걱 열린다. 문짝이 맞지 않아 문 여는 소리가 유난히 크다. 고모가 식혜와 송편 한 접시를 들고 나타났다. 문을 닫을 때 주의를 한답시고 한참을 고개를 빼고 바깥 동정을 살피는 게 어설프고 오히려 나를 불안하게 만든다.

“윤도는 아직 안 왔습니까?”

“차가 막히는갑다. 오늘 저녁답에는 꼭 올 끼다. 자, 단술하고 핀인데 좀 묵어봐라.”

고모는 찬 식혜와 갓 쪄내 김이 모락거리는 송편을 내 앞으로 들이밀었다. 나는 식혜를 막걸리 사발 들이켜듯 죽 들이켜고는 송편을 하나 집어 으적이며 말했다.

“고모, 이렇게 폐만 끼쳐서 미안합니다.”

“야가 무신 범 물어갈 소리를 하노. 이기 남우 집이가? 내사 마 이 집을 니한테 줬시면 얼마나 좋았겠노 후회한다. 이 집이 내 명의가 된 뒤로 명절에 아무도 안 와 아무 재미도 없고…… 고추냄새는 안 매분가? 조카, 고추 말리는 방법을 말해주랴? 그건 먼저 응달진 곳에서 시들가서 말린데이, 응달진 곳에 시들구는 기 예삿일이 아이다. 메주나 곶감이 햇빛만 받으면 좋은 것 같아도 음기를 받지 않으면 공연히 곰팡이가 슬고 짓물러지는 벱이다. 남녀간에도 음양이 조화를 이뤄야 잘 사는 벱인데 너거 부부는 와 그렇게 됐노? 명절날에 와서도 쌈닭처럼 싸우더니 겔국 그렇게 되고 말았구나.”

고모는 촛점이 약간 옆으로 빗나간 할개눈으로 나를 쳐다보며 말한다. 고모는 조금 긴 말을 하면 뭔가 맥락을 잃어버리고 고모의 눈동자처럼 촛점이 약간 빗나가게 된다. 하지만 그 말이 틀린 건 아니다. 회사가 부도나기 전에 가정이 먼저 파탄났다. 채권자들은 부도 직전에 우리가 이혼을 한 건 재산을 빼돌리려는 위장이고 악질적인 사기극이라고 성토했지만 우연의 일치일 뿐 일년 전부터 우리 부부는 실질적인 별거에 들어가 있었다. 내가 회사일에 매달리느라 가정에 소홀히한 건 이혼법정에서도 인정했다. 하지만 아내가 아들놈의 가정교사와 불륜을 범한 건 도무지 용납하기 힘들었다. 난 쇠망치로 뒤통수를 맞은 듯 멍했지만 아내와 결별할 생각은 없었다. 자식을 생각해서라도 절름거리며 함께 살기로 했다. 그러나 아내 쪽에서 완강하게 이혼을 요구했다. 증오의 감정을 식히는 냉각기를 가졌으나 말 그대로 냉각기는 마지막 남은 정마저도 싸늘하게 식혔다.

이혼을 한 뒤 한동안 자유로웠다. 난 끝말잇기를 하듯 아귀찜을 먹고 찜질방으로 갔다가 룸쌀롱에 가기도 했다. 때론 영혼의 안식처를 찾아 교회와 사찰과 성당을 순례하기도 했으나 나에 대해 내린 결론은 허무한 낙오자라는 생각이었다. 회사마저 급속하게 내리막을 치닫고 있었으니.

 

 

3

나는 마치 악마의 주술에 포박된 듯 백제의 고도 부여를 향했다. 백제가 망할 때 삼천 궁녀가 꽃처럼 떨어져 죽었다는 그곳, 삼천 사람이 떨어져 죽은 곳이라면 삼천 한번째 사람도 실수 없이 떨어져 죽을 것이다. 더욱이 부여 길은 초행길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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