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문

 

고향은 부칸입니다

 

 

이향규 李向珪

한양대 에리카캠퍼스 글로벌다문화연구원 연구교수. 저서 『후아유』 『나는 조선노동당원이오: 비전향장기수 김석형 구술기록』(공저) 등이 있음.

hyangkue@hanmail.net

 

 

런던한겨레학교에 가다

 

여러번 확인했다. “정말 할 수 있겠어? 매주 토요일인데? 최소한 석달은 해야 하는데?” 린아는 할 수 있다고, 자원활동을 해야 한다면 거기서 하고 싶다고 했다. 잘됐다.

런던한겨레학교에 대해 알게 된 것은 그 얼마 전이었다. 이 학교의 최이사를 만난 것도 인연이라면 인연이겠다. 지난해 여름 통일연구원에 있는 선배가 런던 외곽 뉴몰든(New Malden) 지역의 북한 커뮤니티에 대한 조사차 영국에 왔다. 그때 선배의 인터뷰에 동행했다가 최이사를 만났다. 그는 북한에서 의사였다. 이 학교가 필요한 이유를 그는 이렇게 설명했다. “처음에는 아이들이 인근에 있는 체싱턴(Chessington) 한글학교에 다녔습니다. 그런데 그 학교에는 한국에서 온 주재원 자녀들이 많아서 그곳의 수업은 여기서 태어나서 계속 이곳에서 살 우리 아이들의 수준과 필요에 맞는 교육과는 거리가 있었습니다. 차로 이십분 정도 가야 하는 거리도 아직 자동차가 없는 부모들에게는 부담이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마을에 아이들을 위한 학교를 만들기로 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2016년 1월 세워진 것이 런던한겨레학교이다. 독지가의 도움과 학부모의 봉사로 시작했단다. 재정이 어려우리라는 것은 쉽게 짐작할 수 있는 일이었다. 지금은 학생이 사오십명 정도라고 했다. 영국에서 북한 사람들이 만든 한글학교라니. 기회가 되면 꼭 가보고 싶었다.

그즈음 린아는 ‘디오브이’(The Duke of Edinburgh’s Award인데 줄여서 DofE라고 말한다) 활동을 하면서 자원활동할 곳을 찾고 있었다. 디오브이는 청소년 스카우트 활동 같은 건데, 3개월 이상 자원활동하는 것도 그 과정 중 하나였다. 한겨레학교에서 자원활동해보는 건 어떻겠냐고 물어봤을 때 린아가 선뜻 하겠다고 해서 반가웠다. 나는 그동안 이 학교가 궁금했지만, 맥락 없이 방문하는 것이 폐가 될까봐 조심스러웠다. 혼자서 자원활동을 할 수도 있겠으나 쉬이 엄두가 안 났다. 혼자서 하면 아무래도 먼 거리를 핑계 삼아 빠지는 날이 생길 것 같았다.

자식 일만큼 부모를 강제하는 힘, 당장 움직이게 하는 동력은 없다. 부지런히 수소문해서 런던한겨레학교의 교장선생님과 통화했다. 전화하기 전에 걱정이 들긴 했다. 자원활동가가 많아서 우리 자리가 없을지도 모른다. 마음이 급해졌다. 그래서 청소든 간식 준비든 학교에 필요한 일이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했다. 젊은 교장선생님은 그런 건 다 학부모들이 하니까, 괜찮으면 보조교사를 해달라고 했다. 그 말이 어찌나 반갑던지, 우린 일단 한 학기 4개월 동안은 책임지고 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렇게 시작된 일이다. 2018년 9월부터 12월까지 우리는 토요일을 그곳에서 보냈다.

 

첫날이 되었다. 수업은 1시 반에 시작하는데 아침 일찍 집을 나섰다. 우리 집에서 한겨레학교까지는 70마일(약 113km)이니 두시간이면 갈 텐데, 초행길이라 시간을 두배는 잡아야 할 것 같았다.

영국에서 운전은 어째 익숙해지기가 어렵다. 주행방향이 반대인 것은 오히려 괜찮은데, 도로 폭이 좁고 제한속도가 구간마다 달라서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한다. 다른 차들은 쌩쌩 잘도 달리는데, 어쩌다가 단속 카메라에 찍히는 건 우리같이 어리바리한 사람이므로. 그리고 주행속도가 내겐 너무 빨랐다. 어떤 도로는 차선이 하나밖에 없는데 제한속도가 50마일(약 80km)이다. 나는 초집중해야 50마일을 겨우 맞춘다. 그래도 가다보면 늘 내 앞은 텅 비어 있고, 백미러로 보면 뒤로 차들이 줄줄이 따라온다. 그러면 뒤차가 뭐라 하지 않아도 마음이 급해진다. 풀숲에 차를 세우고 뒤차들을 다 보낸 적도 여러번 있었다. 제일 적응이 안 되는 것은 회전교차로이다. 영국은 모든 도로망이 신호등 없이 회전교차로로 연결되어 있는 것만 같다. 오른쪽으로 차가 오는 것을 잘 보고 자연스럽게 들어가야 하는데, 정지선에만 서면 ‘꼬마야 꼬마야’ 노래를 부르면서 하는 긴 줄넘기에 들어갈 때처럼 가슴이 콩닥거렸다.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하고 뉴몰든으로 떠났다. 운전대를 꽉 잡고 허리를 꼿꼿하게 세우고.

첫날은 그야말로 ‘멘붕’이었다. 긴 여름방학 후의 첫 수업인데다 하필이면 교사 두명이 사정이 생겨 오지 못했다. 우리는 졸지에 한반씩을 맡게 되었다. 아이들은 오랜만에 만났다고 반가워하며 뛰어다니고, 우리는 오분도 지나지 않아 혼이 나갔다. 쉬는 시간에 린아를 만났다. “엄마, 나 울 것 같애.” “나도.”

부장선생님이 준 인쇄물로 세시간 동안 뭔가를 했는데,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하나하나 보면 참하고 예쁜 아이들이, 열명이 되니 무적의 군단이 된 것 같았다. 넋이 나가 있던 시간이 절반은 되었다. 방심했다. 열살 전후의 아이들이 모이면 어떤 에너지가 되는지 그새 잊어버렸다. 수업이 끝나고 린아와 부둥켜안았을 때는 둘 다 권투 경기가 끝난 후의 선수 같은 모습이었다.

뉴몰든에 온 김에 한국 슈퍼마켓에서 장을 보겠다고 그 저녁에 떠난 것이 잘못이었다. 내비게이션을 따라갔는데도 어딘가 골목에서 진입을 잘못했는지 꼬불꼬불한 주택가가 나왔다. 내비게이션은 경로를 수정한다고 계속 삑삑거리고 이미 날은 저물어서 어둑한데, 차가 갑자기 ‘펑’ 하는 폭발음을 내더니 멈춰버렸다. 심장이 귀 속에서 빠르게 뛰었다. 겨우 차를 길옆에 세웠다. 나와 보니 앞바퀴가 완전히 내려앉은 상태였다. 뉴몰든은 자전거도로와 자동차도로 사이에 한뼘 높이의 턱을 세워놓았다는 걸 오면서 눈여겨보긴 했는데 이렇게 도로 중간에 그 턱이 있을 줄은 몰랐다. 그걸 정통으로 들이받은 것이다. 다리가 덜덜 떨려서 서 있기도 어려웠다. 주택가 도로 한복판에는 행인도, 차도, 나와보는 사람도 없었다.

그런데 신기한 일이 벌어졌다. 얼마 안 되어 한 남자가 다가왔다. “괜찮아요?” 다급하게 대답했다. “안 괜찮아요! 차바퀴가 터졌어요! 제발 도와주세요!” 그가 몸을 숙이고 앞바퀴를 살펴보는데 윗옷에 새겨진 글자가 보였다. ‘차량 수리’(Car repairing service). 그는 도대체 어디서 나타난 걸까? 분명 근처에 지나는 차도 사람도 하나 없었는데…… 그가 자기 차로 가더니 비슷한 타이어를 가지고 와 교체해주었다. 노임도 비싸게 부르지 않았다. 꿈같이 해결되었다. 집으로 오는 길에 말했다.

“린아야, 기도는 말이야, 살면서 나쁜 일이 생기지 않게 해달라고 하는 게 아니라, 나쁜 일이 생겼을 때 곁에 있어달라고 하는 것 같애. 오늘처럼 말이야. 좀 기적 같지 않았니?”

“좀 그렇긴 했지.”

그렇다고 그후에 집으로 오는 길이 순탄했던 것은 아니다. 고속도로 진입을 잘못해서 엉뚱한 마을을 한시간은 헤맸다. 회전교차로 출구를 못 찾아 같은 자리를 여러번 뱅뱅 돌아야 했다. 낮에도 어려운데 가로등 하나 없는 칠흑 같은 밤에는 도저히 불가능한 시속 50마일 외길을 기어서 집에 도착하니 밤 12시가 되었다. 긴 하루였다.

 

 

아이들이 이 학교에 오기까지

 

오가는 길이 익숙해지는 데는 한달쯤 걸렸다. 그 무렵 학교에서 우리의 역할도 분명해졌다. 한 학기는 책임지겠다는 자원교사 두명이 생기자 학교는 세 반을 다섯 반으로 나눴다. 수준에 맞게 반을 나누는 것은 꼭 필요한 일인데 교사를 더 쓸 여력이 없어서 그동안 하지 못했다고 했다. 린아는 한글을 갓 뗀 어린이들에게 받침 있는 글자와 단어를 가르쳐주는 2반 담임이 되었고, 나는 어느 정도 문장을 읽고 쓸 수 있는 학생들을 가르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