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문

 

고향은 부칸입니다

 

 

이향규 李向珪

한양대 에리카캠퍼스 글로벌다문화연구원 연구교수. 저서 『후아유』 『나는 조선노동당원이오: 비전향장기수 김석형 구술기록』(공저) 등이 있음.

hyangkue@hanmail.net

 

 

런던한겨레학교에 가다

 

여러번 확인했다. “정말 할 수 있겠어? 매주 토요일인데? 최소한 석달은 해야 하는데?” 린아는 할 수 있다고, 자원활동을 해야 한다면 거기서 하고 싶다고 했다. 잘됐다.

런던한겨레학교에 대해 알게 된 것은 그 얼마 전이었다. 이 학교의 최이사를 만난 것도 인연이라면 인연이겠다. 지난해 여름 통일연구원에 있는 선배가 런던 외곽 뉴몰든(New Malden) 지역의 북한 커뮤니티에 대한 조사차 영국에 왔다. 그때 선배의 인터뷰에 동행했다가 최이사를 만났다. 그는 북한에서 의사였다. 이 학교가 필요한 이유를 그는 이렇게 설명했다. “처음에는 아이들이 인근에 있는 체싱턴(Chessington) 한글학교에 다녔습니다. 그런데 그 학교에는 한국에서 온 주재원 자녀들이 많아서 그곳의 수업은 여기서 태어나서 계속 이곳에서 살 우리 아이들의 수준과 필요에 맞는 교육과는 거리가 있었습니다. 차로 이십분 정도 가야 하는 거리도 아직 자동차가 없는 부모들에게는 부담이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마을에 아이들을 위한 학교를 만들기로 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2016년 1월 세워진 것이 런던한겨레학교이다. 독지가의 도움과 학부모의 봉사로 시작했단다. 재정이 어려우리라는 것은 쉽게 짐작할 수 있는 일이었다. 지금은 학생이 사오십명 정도라고 했다. 영국에서 북한 사람들이 만든 한글학교라니. 기회가 되면 꼭 가보고 싶었다.

그즈음 린아는 ‘디오브이’(The Duke of Edinburgh’s Award인데 줄여서 DofE라고 말한다) 활동을 하면서 자원활동할 곳을 찾고 있었다. 디오브이는 청소년 스카우트 활동 같은 건데, 3개월 이상 자원활동하는 것도 그 과정 중 하나였다. 한겨레학교에서 자원활동해보는 건 어떻겠냐고 물어봤을 때 린아가 선뜻 하겠다고 해서 반가웠다. 나는 그동안 이 학교가 궁금했지만, 맥락 없이 방문하는 것이 폐가 될까봐 조심스러웠다. 혼자서 자원활동을 할 수도 있겠으나 쉬이 엄두가 안 났다. 혼자서 하면 아무래도 먼 거리를 핑계 삼아 빠지는 날이 생길 것 같았다.

자식 일만큼 부모를 강제하는 힘, 당장 움직이게 하는 동력은 없다. 부지런히 수소문해서 런던한겨레학교의 교장선생님과 통화했다. 전화하기 전에 걱정이 들긴 했다. 자원활동가가 많아서 우리 자리가 없을지도 모른다. 마음이 급해졌다. 그래서 청소든 간식 준비든 학교에 필요한 일이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했다. 젊은 교장선생님은 그런 건 다 학부모들이 하니까, 괜찮으면 보조교사를 해달라고 했다. 그 말이 어찌나 반갑던지, 우린 일단 한 학기 4개월 동안은 책임지고 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렇게 시작된 일이다. 2018년 9월부터 12월까지 우리는 토요일을 그곳에서 보냈다.

 

첫날이 되었다. 수업은 1시 반에 시작하는데 아침 일찍 집을 나섰다. 우리 집에서 한겨레학교까지는 70마일(약 113km)이니 두시간이면 갈 텐데, 초행길이라 시간을 두배는 잡아야 할 것 같았다.

영국에서 운전은 어째 익숙해지기가 어렵다. 주행방향이 반대인 것은 오히려 괜찮은데, 도로 폭이 좁고 제한속도가 구간마다 달라서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한다. 다른 차들은 쌩쌩 잘도 달리는데, 어쩌다가 단속 카메라에 찍히는 건 우리같이 어리바리한 사람이므로. 그리고 주행속도가 내겐 너무 빨랐다. 어떤 도로는 차선이 하나밖에 없는데 제한속도가 50마일(약 80km)이다. 나는 초집중해야 50마일을 겨우 맞춘다. 그래도 가다보면 늘 내 앞은 텅 비어 있고, 백미러로 보면 뒤로 차들이 줄줄이 따라온다. 그러면 뒤차가 뭐라 하지 않아도 마음이 급해진다. 풀숲에 차를 세우고 뒤차들을 다 보낸 적도 여러번 있었다. 제일 적응이 안 되는 것은 회전교차로이다. 영국은 모든 도로망이 신호등 없이 회전교차로로 연결되어 있는 것만 같다. 오른쪽으로 차가 오는 것을 잘 보고 자연스럽게 들어가야 하는데, 정지선에만 서면 ‘꼬마야 꼬마야’ 노래를 부르면서 하는 긴 줄넘기에 들어갈 때처럼 가슴이 콩닥거렸다.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하고 뉴몰든으로 떠났다. 운전대를 꽉 잡고 허리를 꼿꼿하게 세우고.

첫날은 그야말로 ‘멘붕’이었다. 긴 여름방학 후의 첫 수업인데다 하필이면 교사 두명이 사정이 생겨 오지 못했다. 우리는 졸지에 한반씩을 맡게 되었다. 아이들은 오랜만에 만났다고 반가워하며 뛰어다니고, 우리는 오분도 지나지 않아 혼이 나갔다. 쉬는 시간에 린아를 만났다. “엄마, 나 울 것 같애.” “나도.”

부장선생님이 준 인쇄물로 세시간 동안 뭔가를 했는데,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하나하나 보면 참하고 예쁜 아이들이, 열명이 되니 무적의 군단이 된 것 같았다. 넋이 나가 있던 시간이 절반은 되었다. 방심했다. 열살 전후의 아이들이 모이면 어떤 에너지가 되는지 그새 잊어버렸다. 수업이 끝나고 린아와 부둥켜안았을 때는 둘 다 권투 경기가 끝난 후의 선수 같은 모습이었다.

뉴몰든에 온 김에 한국 슈퍼마켓에서 장을 보겠다고 그 저녁에 떠난 것이 잘못이었다. 내비게이션을 따라갔는데도 어딘가 골목에서 진입을 잘못했는지 꼬불꼬불한 주택가가 나왔다. 내비게이션은 경로를 수정한다고 계속 삑삑거리고 이미 날은 저물어서 어둑한데, 차가 갑자기 ‘펑’ 하는 폭발음을 내더니 멈춰버렸다. 심장이 귀 속에서 빠르게 뛰었다. 겨우 차를 길옆에 세웠다. 나와 보니 앞바퀴가 완전히 내려앉은 상태였다. 뉴몰든은 자전거도로와 자동차도로 사이에 한뼘 높이의 턱을 세워놓았다는 걸 오면서 눈여겨보긴 했는데 이렇게 도로 중간에 그 턱이 있을 줄은 몰랐다. 그걸 정통으로 들이받은 것이다. 다리가 덜덜 떨려서 서 있기도 어려웠다. 주택가 도로 한복판에는 행인도, 차도, 나와보는 사람도 없었다.

그런데 신기한 일이 벌어졌다. 얼마 안 되어 한 남자가 다가왔다. “괜찮아요?” 다급하게 대답했다. “안 괜찮아요! 차바퀴가 터졌어요! 제발 도와주세요!” 그가 몸을 숙이고 앞바퀴를 살펴보는데 윗옷에 새겨진 글자가 보였다. ‘차량 수리’(Car repairing service). 그는 도대체 어디서 나타난 걸까? 분명 근처에 지나는 차도 사람도 하나 없었는데…… 그가 자기 차로 가더니 비슷한 타이어를 가지고 와 교체해주었다. 노임도 비싸게 부르지 않았다. 꿈같이 해결되었다. 집으로 오는 길에 말했다.

“린아야, 기도는 말이야, 살면서 나쁜 일이 생기지 않게 해달라고 하는 게 아니라, 나쁜 일이 생겼을 때 곁에 있어달라고 하는 것 같애. 오늘처럼 말이야. 좀 기적 같지 않았니?”

“좀 그렇긴 했지.”

그렇다고 그후에 집으로 오는 길이 순탄했던 것은 아니다. 고속도로 진입을 잘못해서 엉뚱한 마을을 한시간은 헤맸다. 회전교차로 출구를 못 찾아 같은 자리를 여러번 뱅뱅 돌아야 했다. 낮에도 어려운데 가로등 하나 없는 칠흑 같은 밤에는 도저히 불가능한 시속 50마일 외길을 기어서 집에 도착하니 밤 12시가 되었다. 긴 하루였다.

 

 

아이들이 이 학교에 오기까지

 

오가는 길이 익숙해지는 데는 한달쯤 걸렸다. 그 무렵 학교에서 우리의 역할도 분명해졌다. 한 학기는 책임지겠다는 자원교사 두명이 생기자 학교는 세 반을 다섯 반으로 나눴다. 수준에 맞게 반을 나누는 것은 꼭 필요한 일인데 교사를 더 쓸 여력이 없어서 그동안 하지 못했다고 했다. 린아는 한글을 갓 뗀 어린이들에게 받침 있는 글자와 단어를 가르쳐주는 2반 담임이 되었고, 나는 어느 정도 문장을 읽고 쓸 수 있는 학생들을 가르치는 4반 담임이 되었다.

아이들은 대부분 영국에서 태어난 2세였다. 영어는 유창한데 한국어는 잘 못했다. 나이는 여섯살부터 열세살 정도로, 부모님은 대부분 북한 사람들이었다. 이들이 이곳에 살게 된 사연은 다 다를 거다. 물어보지 않았으니 개인의 사정은 모르나, 내가 한국에 있었을 때 이해한 바로는 대강 이런 배경이리라 짐작할 수 있었다.

2000년대 중반부터 한국에서 살던 탈북민이 영국이나 독일, 캐나다로 가서 난민 신청을 하는 경우가 생겨났다. 주로 젊은이들이었다. 한국에서 경험하는 차별이 싫기도 하고, 이왕 고향을 떠나 살 바에는 잘사는 나라에서 살아보고 싶은 생각도 있었던 것 같다. ‘영어를 배우고 싶어서’ 떠났다는 청년도 봤다. 한국에서 영어 때문에 받는 스트레스는 거의 두만강을 넘을 때의 심정에 버금간다고 했다. 목숨 걸고 국경을 넘어본 경험이 그후 다른 국경을 넘는 일을 좀더 쉽게 만들었는지도 모르겠다.

한국을 등지고 해외로 떠나는 탈북자를 남한 사람들은 불편한 눈으로 바라봤다. 정부가 임대주택도 주고 정착지원금도 줬는데 결국 다른 나라로 떠나버리는 거냐며 배신감을 느끼는 사람도 있고, 한국에서 이들이 정착하지 못한 것이 우리 사회의 뿌리 깊은 차별 때문이라며 반성을 촉구하는 사람도 있고, 수완 좋게 ‘초국가적인’ 이동을 하는 이들을 내심 부러워하는 사람도 있었다. 나는 그 세가지 감정을 다 느꼈던 것 같다.

탈북청소년을 지원하는 일을 하기 시작한 2005년부터 북한에서 온 청년들을 제법 많이 만났다. 유능한 젊은이들도 많았다. 예의 바르고 영리해서, 우리가 ‘모범사례’로 소개한 청년들도 있었다. 그중 몇명이 한동안 안 보여서 물어보면, 영국으로 혹은 캐나다로 갔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그 말을 들었을 때의 복잡한 감정이란…… 한편으로 이해가 되기도 했다. 잘 지내지 못하면 ‘부적응사례’가 되고 잘 지내면 ‘모범사례’가 되는 관심이 부담스러웠겠다고 생각했다. 내 삶을 누군가가 끊임없이 들여다본다고 생각하면.

 

영국은 북한 난민을 가장 많이 받아들인 국가이다. 유엔자료를 보면 대략 700명이 난민제도의 틀에서 합법적으로 체류한다(UNHCR 2014년 인구통계를 보면 622명이 난민지위를 받았고 59명이 그 심사결과를 기다리는 보호신청자이다). 물론 한국에서 살았던 탈북민이 영국에 와서 난민 신청을 할 수는 없다. 이들은 이미 법적으로는 한국인이므로. 그러나 십여년 전만 해도 북한 난민에 대한 검증이 허술했고 북한의 인권상황에 대한 관심이 높았던 상황이라서 많은 이들이 난민지위를 받고 정착할 수 있었다. 한겨레학교 학생들은 대부분 이렇게 정착한 이들의 자녀였다.

난민 신청을 하게 되면 심사가 끝날 때까지 살 수 있는 집을 받게 된다. 정부에서는 이들을 집값이 싼 북부잉글랜드나 스코틀랜드, 웨일스 지역으로 보낸다. 그래서 이곳에 온 북한 사람들도 대부분 런던이 아닌 저 멀리 있는 지방에서 영국생활을 시작한다. 그러다가 어느 시점에 코리안이 많이 사는 뉴몰든으로 거주지를 옮긴다. 이미 정착한 이들의 도움을 받을 수도 있고 한국식당 등에서 일자리 찾기도 훨씬 수월하므로. 그렇게 모여든 사람이 700명 정도라니 영국에 있는 북한 사람들은 대부분 뉴몰든에 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우리가 첫날 만난 아홉살 여섯살 난 남매도 스코틀랜드 지방 글라스고우에 집을 받았다. 아이들의 엄마 말이 거기서 ‘차별을 견디지 못해서’ 얼마 전에 뉴몰든으로 내려왔다고 했다. 준비 없이 내려오는 바람에 학교 가는 것도, 병원 가는 것도 어려움이 많았다. 짐도 안 챙겨와서 날이 쌀쌀해지는데 아이들은 여름옷을 입고 있었다. 영어가 서툰 엄마가 어린아이 둘을 낯선 곳에서 기르는 게 정말 쉽지 않겠다는 생각을 했다.

한달쯤 지났을 때 여섯살 난 동생이 아파서 병원 응급실에 가야 했다. 병원에는 린아가 따라가서 아이 엄마와 의사 사이의 통역을 해주었다. 서너시간 동안 같이 있으면서 린아는 배운 것이 많았던 모양이다. 사회 시스템 밖의 목소리가 얼마나 억지로 들리는지, 그런데 현지 언어나 지역정보를 모를 때 이주민이 시스템 안으로 들어가는 것은 또 얼마나 것이 어려운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인은 어떤 노력을 해야 하며, 이웃은 무엇을 어떻게 도와주어야 하는지에 대해서.

린아와 나는 매주 뭔가를 배웠다. 다 새로운 일이었다. 영어를 쓰는 아이들에게 한글을 가르치는 것도, 열살 전후 아이들과 세시간 동안 ‘공부’를 하는 것도, 다른 배경을 가진 교사들과 소통하는 것도. 집으로 오는 차 안에서 우리는 그날 겪은 일을 서로 이야기했다. 그 순간은 린아가 열네살 먹은 딸이 아니라 동료 교사 같았다. 그래서인지 돌아오는 길은 훨씬 짧게 느껴졌다. 그 몇달 동안 아이들에게 가르쳐준 것보다 우리가 배운 것이 훨씬 더 많았다.

 

 

남과 북, 내 안의 구분

 

한겨레학교는 토요일 오후에 교회 강당을 빌려서 학교로 쓴다. 뉴몰든 시내 중심에 자리한 교회 마당에는 큰 느티나무가 있다. 아이들은 쉬는 시간이면 나무 밑을 둥글게 감싸는 철제의자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거나 잔디밭에서 노는 것을 좋아했다. 가을볕이 따뜻하고 바람도 적당해서 쾌적한 날이었다. 열두살 열세살 된 중학생 다섯명과 나무 아래에서 이야기할 기회가 있었다. 학생들은 수업시간에 바깥으로 나온 것만으로 기분이 좋아 보였다.

이 아이들에게 꼭 한번 물어보고 싶은 것이 있었다. 사람들이 “어디서 왔냐?”고 물어서 “코리아에서 왔다”고 대답하면 “노스냐 싸우스냐”(North or South)고 물어보지 않느냐고, 그러면 너희는 뭐라고 답하느냐고. 나는 영국에 사는 북한 사람들이 이 질문에 뭐라고 답하는지 늘 궁금했다. 그래서 이미 어른들에게는 물어본 적이 있었다. 그들은 “노스에서 왔다고 말한다”고 대답했다. 그 말이 너무 선선해서 그걸 은근히 물어본 내 복잡한 마음이 오히려 불순하게 느껴졌다. 청진에서 온 김씨는 이런 이야기도 했다. “노스에서 왔다고 하면 대단하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어요. 여기까지 오는 길이 힘들었을 텐데 용감하다고.” 여기 사는 북한 사람들은 북한에서 왔다는 것을 굳이 감추려고 하지 않았다. 이미 답을 얻었음에도, 같은 질문을 아이들에게 또 하고 싶었던 것을 보면 나는 어떻게든 남과 북을 구별하는 집착에 갇혀 있었던 것 같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이렇게 구별하는 마음에는 내가 남한 사람이라는 우월감이 깔려 있었다. 그래서 그때를 떠올리면 지금도 부끄럽다.

아이들에게 질문하면서 내가 예상한 답은 이 셋 중에 하나였다. ‘나는 싸우스에서 왔다고 해요.’(싸우스가 더 잘사니까.) 아니면 ‘노스에서 왔다고 해요.’(부모님 고향이 노스니까.) 아니면 ‘그걸 왜 물어보냐고 해요.’(짜증나니까.) 기대하는 답도 그에 대한 해석도 이미 가지고 있으면서 뭘 얻겠다고 그렇게 물어봤나 모르겠다. 그런데 아이들은 그렇게 말하지 않았다.

벌써 나무를 타고 올라가서 가지 위에 걸터앉아 있는 남학생이 무심하게 말했다. “그날 기분에 따라 달라요. 어떤 때는 노스라고 하고 어떤 때는 싸우스라고 해요.” 다른 남학생은 이렇게 말했다. “나는 어떨 때는 이스트(east), 어떨 때는 웨스트(west)라고 하는데.” 한 학생은 자기는 중국에서 태어나서 애초에 ‘중국에서 왔다’고 답한다고, 그래서 북이냐 남이냐는 질문은 받아본 적이 없다고 했다. 한 아이는 코리아가 노스와 싸우스로 나뉘어 있는 것도 처음 알았다는 얼굴이었다. 아이들은 이 질문에 별로 신경 쓰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심각한 건 나밖에 없었다. 그런 아이들의 반응이 어이없기도 하고 신선하기도 했다. 이 아이들은 나나 내가 한국에서 만났던 아이들보다 훨씬 자유로워 보였다. 나무같이 싱그러운 아이들을 물끄러미 보다가 질문을 바꿔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이제 ‘그들에게’ 자신이 어디 출신이라고 생각하는지 묻지 말고, 왜 자꾸 그들에게 그 질문을 하는지 ‘나에게’ 물어야 할 것 같았다.

내가 이 질문에 집착하는 이유는, 오랫동안 이 질문이 중요했기 때문이다. 전에 일했던 무지개청소년센터나 한국교육개발원 탈북청소년교육지원센터에서는 북한에서 온 청소년들이 한국사회에 잘 적응할 수 있도록 돕는 여러 사업을 했다. 이 청소년들 열에 일곱은 자신이 북한에서 왔다는 것을 감추고 학교생활을 했다. 굳이 물어보지도 않는데 북한에서 왔다고 먼저 말하고 다닐 필요는 없겠지만, 많은 아이들이 이 사실을 굳이 ‘감춰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학교생활을 마음 졸이면서 어렵게 하고 있었다. 북한 억양을 빨리 없애려고 노력했고, 한동안은 말에서 티가 날까봐 입도 열지 않았다. 친구들과 길을 가다가 엄마를 만나면 엄마가 말을 걸까봐 조마조마하며 모르는 척 지나갔다. 엄마도 자식의 그 마음을 알고 비켜 지나가주었다. 북한에서 왔다는 것은 숨겨야 하는 일이었다. 그때 우리는 여러 연구결과를 활용해서, 자신이 어디 출신인지를 밝히고 생활하는 것이 한국생활에 적응하는 데 도움이 된다고 조언해주었다. 교사연수에서도 이 아이들이 겪는 어려움을 이야기하고 자신의 출신지에 대해 긍정적인 태도를 가질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했다.

그 당시 내가 아이들에게 바랐던 것은, ‘나는 북한에서 왔어. 그렇지만 하나도 꿀리지 않고 당당해’라는 마음가짐을 갖는 것이었다. 북한 출신이라는 것이 명백히 약점이었던 한국사회에서, 이들이 자존감을 잃지 않도록 도와주고 싶었다. 자기 출신지를 좀더 쉽게 밝히는 방법으로 북한에서 왔다고 하지 말고 청진이나 온성에서 왔다고 말하는 것이 어떻겠냐고 제안하기도 했다. 남한과 북한을 대립시키지 말고, 청진이나 온성을 부산이나 광주처럼 그냥 도시로 보면 어떨까 싶어서. 그 방법이 아이들의 부담을 줄여주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아니었을 것 같다. 어쩌면 ‘어디 출신이냐, 남이냐 북이냐’라는 질문이 중요해지면 질수록, 거기에는 이렇게 대답하라는 훈수가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아이들은 더 힘들 수도 있었다. 그냥 어디서 왔다는 생각을 안 하고 사는 것이, 당당해야 한다고 다짐할 필요조차 없는 것이 가장 마음 편한데, 정작 나는 자꾸 이런 걸 강조해서 아이들을 더 주눅 들게 했을지도 모른다. 영국에 와서까지 그 질문을 버리지 못하는 나를 보면서, 그 질문에 이렇게 가볍게 대답하는 아이들을 보고서야 알았다. 정작 이 질문에 갇혀 있었던 것은 나 자신임을.

 

 

아이들과 시를 읽다

 

아이들 공책 검사를 하면서 맞춤법을 고쳐주었다. 매사에 열심인 열살 난 앤절라의 공책을 보다가 손이 멈췄다. 눈이 먼저 웃었다.

 

나는 뉴카슬에서 태어났어요.

아빠는 부칸에서 태어났어요.

엄마 고향은 부칸입니다.

내 고향은 론돈입니다.

 

‘부칸’을 북한이라고 고쳐주고 싶지 않았던 것은, 부칸이라는 나라의 느낌이 좋았기 때문이다. 그건 ‘북한’이라는 이름에 담긴 많은 이미지를 순식간에 날려버리는 신기한 힘을 지녔다. 부칸이라는 말은 부탄이나 네팔을 연상하게 했다. 그래서인지 그 나라에는 산이 많고 사람들이 순박하고 시간이 천천히 흐를 것 같았다.

우리 반은 모두 여덟명이었다. 아홉살과 열살이 각각 두명. 일곱살, 여덟살, 열한살, 열두살이 한명씩. 이 아이들의 부모는 모두 ‘부칸’에서 왔다.

 

처음부터 시를 생각한 것은 아니었다. 읽기자료로 전래동화를 준비해갔는데 견우와 직녀 이야기를 읽다가, 아이들도 나도 지루해지기 시작했다. 설명해야 할 게 너무 많았다. ‘칠월 칠석은 음력으로 7월 7일이라는 뜻이에요.’ ‘음력이 뭐예요?’ ‘아… 달을 기준으로 하는 달력인데, 예를 들면 추석은 음력으로 8월 15일이에요.’ ‘추석이 뭐예요?’ ‘……’ 영국에서 태어나서 자란 이 아이들은 한국에서 자란 내가 당연히 알고 있는 것들을 잘 몰랐다. 이러저러한 생각에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코리안이라면 마땅히 알아야 하는 것을 가르쳐주는 것이 내가 해야 할 일 아닐까? 그런데 그게 정말 이 아이들에게 필요한 일일까? 한 학기 동안 얼마나 가르칠 수 있을까? 지루하지 않을까? 그게 기억에 남기나 할까?’

윤동주의 시 「나무」를 소개한 것은 일단 글이 짧아서였다. 어려운 단어도 없고.

 

나무가 춤을 추면

바람이 불고

나무가 잠잠하면

바람도 자오

 

아이들은 또박또박 잘 읽었다. 그리고 뜻을 궁리했다. 각자 자기가 이해한 방식으로 이 시를 영어로 옮겨보았다. 표현이 조금씩 달랐다. 그래서 느낌도 달랐다. 재미있어지기 시작했다. 영어로 옮기면서 한글을 더 꼼꼼히 따져보았다. 시를 번역하는 것은 언어에 대한 감수성을 높이는 아주 좋은 방법 같았다. 이 시를 한번 외워보자고 했다. 아이들은 종이와 허공을 번갈아 쳐다보며 중얼중얼 되뇌었다. 상으로 준비한 금화 초콜릿이 이렇게 위력을 발휘할 줄이야. 아이들은 한명씩 나와 큰 소리로 암송한 후에 자랑스럽게 금화를 받아갔다.

시 수업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우리는 최승훈의 「고, 벌 한 마리가」, 나태주의 「풀꽃」, 박길순의 「비」, 윤동주의 「호주머니」, 박희순의 「매미」를 읽었다. 한글 시를 읽고 같이 뜻을 이야기해보고, 각자 영어로 번역하고, 외웠다. 그러면서 한국어가 영어와는 느낌이 다르다는 것을 알았다. 잠잠, 벌벌벌벌, 동동동, 똑똑똑, 갑북갑북. 우리말에는 영어로 표현하기 어려운 의성어와 의태어가 많았다. 동사나 형용사 어미의 활용도 중요했다. ‘~하면’ ‘~하여야’ ‘~이 없어’ ‘~할 줄이야’를 영어로 어떻게 옮겨야 할지 고민했다. 어떻게 표현해야 행과 행 사이의 관계가 잘 전달되는지 생각했다. 물론 수업에서 이런 문법을 설명하지는 않았다. 그저 매주 시 한편을 여러번 읽고 번역해보고 암송했다.

아이들은 도화지로 자기만의 시집을 만들었다. 한글 시와 자기의 번역본을 적고 그림을 그렸다. 학기가 끝날 때쯤에는 각자 만든 시집이 제법 꽉 찼다. 나는 이걸 꼭 간직하라고 신신당부했다. 나중에라도 이 아이들이 ‘내가 누구인지’를 질문할 때 왠지 이게 답을 찾는 데 도움이 될 것 같았다.

하루는 유명한 K팝 그룹 BTS의 멤버 RM(본명은 김남준)이 초등학교 5학년 때 지었다는 「한반도 호랑이, 그리고 통일」이라는 시도 소개했다. 우리 반에 김남준 어린이와 비슷한 또래도 있고, RM은 워낙 인기가 많아서 아이들이 좋아할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날 수업은 망했다. 일단 시가 너무 길었다. ‘조그만 토끼가 아닌/무서운 호랑이//호랑이 허리에 금이 갔다’로 시작해서 ‘우리는 조그만 토끼가 아닌/한 마리의 용감한 호랑이다’로 끝나는데 전부 24행이다.

이 시를 이해하려면 한반도를 토끼 모양으로 보는 것과 호랑이 모양으로 보는 것의 차이를 이해해야 하는데, 이 아이들은 아무 생각이 없었다. 그래서 여자아이들은 ‘귀여운 토끼’(cute rabbit)와 ‘무서운 호랑이’(scary tiger)라고 번역하면서 귀여운 토끼를 생글생글 밝게 웃는 얼굴로 예쁘게 그려줬다. 그걸 고쳐줘야 하나 고민했다. 그러다가 한반도 모양을 토끼가 아니라 호랑이로 보라고 하는 것도 강요일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토끼라고 하면 뭐가 어때서, 굳이.

이 시에는 모르는 말이 너무 많았다. 제목부터 걸렸다. 아이들의 질문, ‘한반도가 뭐예요?’ ‘통일이 뭐예요?’ …… 내 욕심을 탓했다. 교화하려 하지 말고, 그저 아름다움에 집중할 것을.

 

연말에 성대한 발표회를 했다. 나는 학부모와 손님들에게 주려고 우리가 공부한 시와 번역본을 넣어 브로슈어를 하나 만들었다. 꼬마 번역가들의 이름도 넣었다. 색지 두장에 양면 인쇄를 하고 반으로 접어서 가운데를 풀로 붙여 80부를 만들었다. 그날 발표회에 영국에 있는 각종 한인단체 회장들은 다 온 것 같았다. 뉴몰든이 있는 런던 킹스턴 구역의 부시장도 왔다. 젊은 여성 부시장이 브로슈어 읽는 것을 보고 얼마나 뿌듯했던지!

발표회에서 우리 반 학생들은 시를 낭독했다. 우리말과 영어로. 마지막에는 책을 덮고 「나무」와 「풀꽃」을 암송했다. 얼마나 많이 연습했던지 줄줄 외웠다. 그 모습이 예쁘고 의젓해서 눈물이 났다. 이 아이들이 어른이 되어서도 윤동주나 나태주의 시를 기억해낼 수 있다면, 이 한 학기를 같이 보낸 내겐 정말 영광이겠다.

 

나무 윤동주

 

Tree Yoon, Dong-ju

(Translated by Doyeon Kim)

(Translated by Wonyeong Choi)

나무가 춤을 추면

If the tree is dancing

When the trees dance

바람이 불고

the wind will blow

The wind starts blowing

나무가 잠잠하면

If the tree is sleeping

When the trees sleep

바람도 자오

the wind will sleep too

So does the wind

 

풀꽃 나태주

Wild Flower Nah, Tae-ju

( Translated by Donghyun Kim)

 

(Translated by Wonyeong Choi)

자세히 보아야

Carefully I looked

I looked at it carefully

예쁘다

It is beautiful

and it was beautiful

오래 보아야

For a long time I looked

I looked at it for a long time

사랑스럽다

It is lovely

and it was lovely

 

너도 그렇다

You too

You too

 

호주머니 윤동주

Pockets Yoon, Dong-ju

( Translated by Esther Sung)

 

(Translated by Wonbin Choi)

넣을 것 없어

There was nothing

The pockets are

걱정이던

to put in my pockets

worried that

호주머니는

So I was worried

there is nothing to put in

겨울만 되면

When winter came round

But only in winter

주먹 두개 갑북갑북

My two fists were in them, proudly

Two fists are there, proudly

 

매미 박희순

Cicada Park, Hee-soon

(Translated by Wonbin Choi)

나무가 우는 줄 알았다

I thought the tree was crying

 

설마

저 작은 것이

나무를 흔들고 있을 줄이야

Goodness

That little thing

is shaking the tree

 

설마

저 작은 것이

지구를 흔들고 있을 줄이야

Goodness

That tiny thing

makes the world shake

 

이 시집을 만들면서 제일 고민했던 것은 표지였다. 표지에 제목을 적다가 난감해졌다. 영문으로는 ‘Korean poetry’라고 썼는데, ‘코리안’을 옮길 수 있는 말이 없었다. ‘한국’도 아니고 ‘조선’도 아니고. 문자는 분단 이전에도 ‘한글’이라고 불렀으니 괜찮은데, 말은 ‘한국어’이기도 하고 ‘조선어’이기도 하니. 아니 북한에서는 ‘문화어’라고 하나……

나는 남한의 시를 가르치려던 게 아니라서 ‘한국의 시’라는 말을 쓰기가 꺼려졌다. 윤동주의 시를 한국의 시라고 말하는 것도 찜찜했다. 윤동주 시인은 그 당시 조선어로 시를 썼을 텐데. 그렇다고 ‘한글로 된 시’라고 할 수도 없고, 그래서 그냥 표지에 한글로 ‘우리말 시’라고 썼다. 불쌍하게도 우리말은, 그걸 부르는 우리말 이름도 없다.

 

한동안 아이들이 번역해준 우리말 시집을 어디나 들고 다니며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나눠주었다. 시집을 주면서 마음이 뿌듯했다. 나는 영국 사람들에게 자꾸 우리말을 자랑하고 싶었다. 이 시를 읽고, 우리말이 사물을 가만히 들여다보고 아름다운 순간을 무심히 탁 드러내는 데 얼마나 탁월한 언어인지 알기를 바랐다. 사람들은 간결한 문장에 감긴 정갈한 이미지를 금세 알아차렸다. 그래서 윤동주의 「호주머니」를 읽고 미소 짓고, 나태주의 「풀꽃」과 박희순의 「매미」를 읽고 무릎을 쳤다. 그럴 때면 나는 뿌듯한 마음에 수다스러워졌다. 그리고 우리말이 앞으로 시와 노래를 담는 데 더 많이 쓰이기를 기도했다.

 

 

멀리서 보면 많이 닮았다

 

‘푸른 하늘 은하수 하얀 쪽배에’로 시작하는 윤극영의 「반달」은 우리가 마지막으로 배운 시였다. 발표회 때 쓰려고 노래와 손동작도 가르쳐주었다. 수업이 끝나고 아이들을 데리러 온 학부모들에게 이 노래를 혹시 아느냐고 물었다. 당연히 안다고 했다. 그럼 이 ‘쎄쎄쎄’ 손동작은 아느냐고 물었다. 그건 처음 본다고 했다.

나는 예전에 통일에 대한 강의를 하면서, 남북한 사람들이 어울려 잘 살려면 ‘다름’을 존중해야 한다는 말을 하곤 했었다. 지금은 내가 그렇게 이야기했던 것이 옳은 일이었나 하고 되돌아본다. 틀린 말은 아닌데, 아무래도 지나치게 강조했던 것 같다. ‘다른 점’에 민감해서 거기에 돋보기를 들이대며 너무 열심히 찾아내려고 한 것은 아닌지. 매일 만나는 사람도 다른 점을 찾으려 들면 다른 것만 보이고, 비슷한 점을 찾아보면 닮은 점이 많은 법인데…… 언젠가 다시 강의할 기회가 생긴다면, 이번에는 우리가 ‘공유하는’ 것에 대해 더 많이 이야기할 것 같다. 다른 점이라는 건 아무래도 쎄쎄쎄를 하고 안 하고 정도의 문제인 듯하여.

나는 그동안 남북한 언어가 이질화되었다는 이야기도 많이 해왔다. 같은 뜻인데 남북한이 다르게 쓰는 어휘나 표현을 비교해서 통일교육 자료로 쓰기도 했다. 그런데 같은 점과 다른 점은 무엇을 기준으로 삼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이곳에 와서 영어를 쓰는 사람들 틈에서 살다보니, 남과 북이 같은 말을 쓰는 것이 얼마나 귀한 일인지, 얼마나 마음 편한 일인지 알겠다. 의사소통이 이렇게 쉬울 수가 없다. 억양이나 말씨, 표현이 다른 것이 있더라도 의미를 전달하는 데 걸림돌이 될 정도는 아니다. 말씨가 다른 것으로 치면, 남북한보다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웨일스 지방 사이의 언어 차이가 더 큰 것 같다.

내가 그동안 다른 점을 자꾸 강조했던 것은, 남북한이 함께 살 세상에 대한 두려움이 컸기 때문이다. 다른 점을 잘 익혀서 불필요한 오해를 사전에 막고 갈등을 대비해야 한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한겨레학교에서 북한에서 온 사람들을 동료 교사로, 학부모로 만나면서 그 생각이 자꾸 흔들렸다. 다른 점을 찾아내는 것보다 닮은 점을 반가워하며 공감해주는 것이 같이 사는 데에 더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다. 교장선생님과 부장선생님은 늘 아이들에게 하나라도 더 가르쳐주려고 애썼다. 린아와 내가 수업을 어떻게 하는지도 꼼꼼히 챙겼다. 학부모들은 아이들에게 좋은 간식을 먹이려고 먼 곳에서 장을 봐 왔고, 수업이 끝난 후에 바닥 청소를 깔끔하게 했으며, 선생님들께 늘 감사하다는 말을 했다. 우리 반 학부모들에게 아이들 칭찬을 하면 그들은 볼이 발그레해지며 기뻐했다. 이들은 나와 별로 다르지 않았다. 그래서 이들이 북한 사람이고 내가 남한 사람이라는 것은 곧 잊어버렸다. 그건 그렇게 중요한 일이 아니었다.

학기가 끝나고 한겨레학교의 부장선생님이 린아의 자원활동에 대한 평가서를 써주었다. 린아는 선생님이 한글로 써준 것을 영어로 번역해서 학교에 제출했다. 디오브이 담당 선생님은 이 자원활동 평가서를 읽고 인상 깊었다고, 린아에게 잘했다고 칭찬해주었다.

 

처음엔 아이들과 조금 어색해하는 부분이 있었는데 시간이 갈수록 친숙해졌어요. 시간을 엄수함과 동시에 수업 전에 배워줄 내용을 꼼꼼히 체크하는 등 본인의 의무에 열정을 보였습니다. 수업 중 집중하기 힘들어하는 아이들에게 신경을 써서 수업에 참여하도록 노력하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읽기와 쓰기 어려움을 이해해주고, 아이들을 기다려주고 칭찬을 함으로써 아이들이 자신감을 가지고 수업에 임할 수 있도록 노력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시간이 갈수록 수업을 자신감 있게 진행하고 재미를 더하면서 아이들과 함께 어울리는 모습은 자원봉사자가 아닌 진짜 교사였습니다. 자원봉사하는 기간 동안에 보인 그의 성실함과 새로운 것에 도전했을 때의 마음가짐은 그가 어디에서 무엇을 하든 잘해낼 수 있을 거라는 믿음을 보여주었다고 생각합니다. 이 경험이 그에게 귀한 자산이 되리라 믿습니다.

 

이런 글을 써준 선생님이 정말 고마웠다. 우리 아이를 꼼꼼히 관찰하고, 좋은 점을 봐주고, 성장을 격려해주는 선생님께 감사하지 않을 부모가 있을까. 우리 반 엄마가 아이 칭찬에 볼이 발그레해지듯이, 나도 그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