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새로운 현실, 다른 리얼리즘

 

공동세계를 향한 시의 모험

 

 

송종원 宋鐘元

문학평론가. 주요 평론으로 「살아 있는 역사와 좋은 시의 언어」 「분열하는 감각 너머의 리얼리티」 등이 있음. renton13@daum.net

 

 

1. 인간다운 삶과 공동의 문제, 그리고 시

 

최소한의 삶이라는 왜소하고 위축된 전망이 아니라 좀더 나은 미래를 향한 꿈을 꾸는 사람이라면 자신의 주변과 어떻게 갈등하고 또 어떻게 협업해야 할지 고민할 수밖에 없다. 우리가 사는 현실의 문제는 늘 혼자 감당할 수 있는 것과 홀로 감당할 수 없는 일이 혼재되어 있기 때문이다. 최근 우리 사회에서 사람들의 입에 자주 오르내린 공정성의 문제 역시 인간다운 삶을 꿈꾸는 사람이 가질 만한 주변에 대한 관심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런데 불평등이 심화된 오늘의 세계는 평등을 감각하는 일 또한 꽤나 복잡해졌다.1 자신이 차별 없이 존중받기를 원하는 마음과 남들도 차별 없이 존중받기를 원하는 마음 사이에 분열이 있으며, 저 ‘누구나’의 외연을 감각하는 방식에도 제각각 차이가 있다. 문제는 차별과 소외가 있는 현실이 공동의 세계를 불신하게 만들고 그로 인해 공동의 문제를 더욱 소외시킨다는 점이다. ‘각자도생’이 시대정신이 되었다는 말은 이제 너무나 공공연하다. 자본주의가 심화되면서 발생한 불평등은 확실히 ‘사회적 무대의 소실과 세계 상실’의 감각2을 확산시키는 중이다.

불평등과 불공정처럼 보편적 가치와 접속된 문제야말로 삶의 현장에서 공동의 해결을 필요로 하지만 쉬운 일은 아니다. 이 문제는 타자를 배척하지 않는 주체화의 과정이 얼마나 어려운지와도 관련이 있고, ‘나’와 ‘우리’ 사이에는 단번에 도약하기 힘든 거리가 내재한다는 사실과도 연루되어 있다. 그러므로 당연히 노력이 필요하다. 타자를 부정항으로 내세우며 자신을 주체화하지 않으려는 노력, 공동세계의 주체로서 책임의 영역을 협소하게 만들지 않으려는 노력, 자본주의의 물화와 대항하며 사회적 관계성에 무감각해지지 않으려는 노력 등등. 더불어 저 노력들을 심드렁해하며 모든 것이 이미 파탄에 이른 것처럼 여기는 냉소주의에 빠지지 않으려는 노력도 말해야겠다. 앞서 나열한 노력들을 종합적으로 표현하자면 이른바 공동의 감각을 새롭게 창조하려는 노력이라는 말로 갈음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 문제들을 해소하는 데 문학은 어떻게 기여할 수 있을까.

시에서 끊임없이 움직이고 변화하는 기운을 감지할 때 우리는 보통 그 시의 언어에서 강렬함을 느낀다. 이 움직임은 평균적이거나 절충적인 상태를 추구하지 않고,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전력으로 집중하는 운동성을 띤다. 때때로 우리가 시에서 감지하는 어떤 고집스러움, 가령 반복적인 언어의 운용과 거듭되는 이미지의 변주 같은 것을 떠올려도 좋겠다. 이를 단순하게 표현하면 자신이 중요하다고 여기는 바를 비타협적으로 추구하는 운동성이다. 그래서 시는 어중간한 것을 싫어하고 극단으로 나아가려는 성격을 지닌다. 이 성격은 얼핏 공동의 감각을 창조하고 재구성하는 일과는 거리감 있게 느껴지지만, 편향된 집중력이 통합된 세계의 질서를 교란하고 동시에 문제 삼는 기능을 하는 데 주목할 필요가 있다. 시의 목소리는 구성된 현실의 경계가 어디까지인가를 묻고 또 이 세계가 상실한 무엇인가에 끈질기게 집착하기도 하며 그렇게 공동의 세계가 재구성되어야만 하는 상황을 이끈다. 어쩌면 시는 공동의 세계에서 안정적으로 결속되어 있다고 여겨지지만 실제로는 거기서 떨어져 나온 날카로운 조각을 꼭 움켜쥐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세권의 시집3을 살펴보겠다. 이것들이 움켜쥔 조각들이 우리가 살아갈 공동세계의 리얼리티를 어떻게 구성해내는지 파악하고 그를 통해 우리가 어떤 가치를 향해 한발 더 옮겨가야 하는지를 알아볼 것이다.

 

 

2. 밥의 감수성과 노동의 자기실현

 

김사이의 시집은 밥 먹는 일에 대해 자주 말한다. 그런데 시에 그려진 밥 이야기를 다 읽고 나서 마주하게 되는 감각은 이상하게도 배고픔이다. 이는 시인이 밥 먹는 일을 단지 식욕을 채우는 일로 그리지 않아서일 텐데, 그렇다고 저 배고픔을 ‘존재론적 허기’ 같은 용어로 포장할 수도 없는 일이다. 김사이가 말하는 배고픔은 말 그대로 육체의 밑바닥에서 길어 올린 감각이자 현실 속에 부재하는 어떤 가치로 인해 빚어진 고통이다. 그런데 저 처절한 감각을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약간의 우회로가 필요하다.

 

불행의 눈동자에 갇히니 삶이 대기발령이다

 

(…)

나를 걸어 잠근 이번 생은 글러먹었다

오롯하게 내 죽음을 누리는 것

스스로 죽어가는 시간에 내가 마침표를 찍는 것

글러먹은 생에 대한 저항으로

—「저항의 방식」 부분

 

불행의 눈동자에 갇혔다는 표현과 나를 걸어 잠갔다는 구절이 부정적 양태의 삶을 떠올리게 하지만 꼭 그렇지만도 않다. 불행한 눈동자만이 도달할 수 있는 시선이 있으며, 나를 걸어 잠그는 결단이 서야만 비로소 마주할 수 있는 상대나 적이 있다. 그래서인지 두 구절의 결합은 어떤 최후의 저항에 나서는 사람의 선언처럼 들리기도 한다. 이 선언의 목소리는 여성이자 노동자라는 정체성이 결합된 자리에서 퍼져 나온다. 시인은 거기에 어떤 분열을 더하는 일을 최대한 자제하고 바로 그 정체성만으로 겪게 되는 싸움에 집중한다. 김사이는 분열을 과중화시켜 ‘나’를 알 듯 모를 듯한 존재로 만드는 데 관심이 없다는 뜻이다. 또한 현실에 대해서도 그것의 깊이를 애써 찾기보다, 적대적인 두 힘의 공존이 객관적 현실이라는 인식으로 상대한다. 이러한 전략하에 형성된 명징하고 또렷한 주체성과 세계관은 현실 속에서 주체를 압박하고 상호갈등을 일으키는 세력과 그것의 술수에 대해 선 굵게 대응한다.

가령, 세상은 노동을 뒷골목의 일로 만들어 사람들의 눈앞에서 없애려 들지만 시인은 그것을 전면화한다(「탈 탈」). 김사이가 보기에는 현실의 뒷골목이 우리 삶의 전면부이다. 그래서 시인의 눈은 늘 뒷골목으로 강제이주되는 것들에 주목한다. 노동의 현장뿐 아니라 노동하며 싸우는 사람만이 감각할 수 있는 통증까지도 어느새 이주의 목록에 포함된다. 이를 안타까워하며 시인은 자본과 갈등하는 싸움에서 얻은 통증만이 자본의 욕망으로 마비된 삶을 중단시킨다고 소리 높이기도 한다(「잠 못 드는 밤」). 또한 이 시인은 내면을 감싸는 분열적 언어 또한 현실의 실감을 둔화한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