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이승은 李承恩

1980년 서울 출생. 2014년 『문예중앙』으로 등단.

소설집 『오늘 밤에 어울리는』 등이 있음.

vinoshy101@gmail.com

 

 

 

공포가 우리를 지킨다

 

 

잔디는 밟으면 안 돼.

노란 원피스를 입은 여자아이가 잔디밭에 박힌 돌 위를 깡충깡충 뛰었다. 여자아이보다 일년 반 늦게 태어난 남자아이는 돌 사이를 건너다가 잔디를 밟고 말았다.

그러면 바다에 빠지는 거야.

여자아이가 말했다.

얘들아, 이제 그만 뛰어. 그늘로 들어와.

엄마가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아이들은 까페테라스 안으로 뛰어 들어가 지영과 현우 사이에 섰다. 여섯살인 유민은 엄마를, 다섯살인 유석은 아빠를 쏙 빼닮았다.

그사이에 꼬마 숙녀가 되었네요.

윤주가 유민을 보며 말했다.

윤주와 영진은 결혼식장에서 나오는 길에 지영의 가족과 마주쳤다. 일년 만의 만남이었다. 처음에 영진은 누군지 알아보지 못하다가 많이 컸구나, 하며 멜빵바지를 입은 유석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어른들이 안부를 나누는 동안 유석이 초콜릿 케이크를 유민의 원피스에 묻혔다. 어머, 내가 미쳐, 하며 지영이 물티슈를 꺼냈다. 유민은 유석의 머리를 한대 때렸다. 현우가 발버둥 치며 우는 유석을 들어 안았다.

제시는 좀 나아졌나요?

영진이 제시의 안부를 물었다. 지영과 현우는 교외 주택에서 아이 둘과 제시를 키우며 지냈다.

집에 한번 놀러 오세요.

현우가 턱을 목 가까이 당기며 영진과 윤주를 쳐다보았다.

집까지 십오분이면 가요.

정말 가깝다고, 거리가 얼마 되지 않아서 아이들을 데리고 이 까페로 자주 나온다며 지영이 환하게 웃었다.

부동산 박실장의 말대로 남자는 무뚝뚝하지만, 여자는 상냥했다. 세입자 중 개를 한마리 키우고 싶어하는 가족이 있다며 박실장이 윤주에게 지영 부부를 소개해주었다. 윤주는 서운한 기색은 없는지 지영의 얼굴을 살폈다. 제시의 몸이 좋지 않다며 지영은 여러번 연락을 해왔다. 지난겨울에 윤주는 약을 더 보냈다. 한이사가 보내준 제시의 심장약은 집에 몇 박스나 있었다. 올봄에 제시의 상태가 좋지 않다는 연락이 왔을 때는 아무것도 보내지 못했다. 연락도 하지 못했다. 케이크를 먹는 아이들을 보며 영진과 윤주는 언제 한번 가자, 제시를 보러 가야지, 하는 말을 주고받았다. 헤어지기 전 영진은 아이들에게 주려고 지갑에서 돈을 꺼냈다. 그러자 현우가 손사래를 쳤다. 아이들 버릇 나빠지는 걸 염려한다며 거절했다.

 

영진과 윤주는 주차장으로 향했다. 티끌 하나 없이 매끈한 은색 승용차는 그늘에서 멀리 벗어나 주차되어 있었다. 달궈진 차 안은 열기로 후끈했다. 좌석도 델 것처럼 뜨거웠다.

여기서 만날 줄 몰랐어.

윤주는 차에 시동이 걸리자마자 에어컨을 틀었다. 제시를 보낸 지 벌써 일년이라니. 지난 일년을 생각하면 아직도 누군가 목줄을 단단히 잡고 흔드는 것 같았다.

민석이?

꺾었던 핸들을 바로 잡으며 영진이 물었다. 차는 사차선 도로로 진입했다.

지영씨 가족 말이야.

윤주가 핀잔을 주듯 말했다.

그녀는 결혼식 내내 눈살을 찌푸렸다. 새하얀 차양막 아래에서도 반사된 햇빛에 눈이 부셨다. 야외 결혼식을 하기에는 뜨거운 날씨였다. 한여름의 파란 하늘과 초록 잔디 위로 현악사중주의 선율이 울려 퍼지고 신랑과 신부가 입장했다. 그때 영진이 윤주의 손을 잡아끌었다. 민석을 봤다고 했다. 둘은 조용히 식장을 빠져나왔다.

윤주는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검은 아스팔트 위로도 태양이 뜨겁게 내리쬐었다. 윤주는 서울 근교를 벗어나 해안가 도로를 달리고 싶었다. 3킬로도 가지 못해 영진이 차를 세웠다. 서울 방향 진입로 갓길에 현우가 서 있었다.

우리를 봤어.

윤주는 그냥 가자고 했는데 영진이 말했다.

지영과 아이들도 도로에 나와 있었다. 계기판 경고등이 계속 깜빡인다고 현우가 말했다. 전자제어 문제일 거라고 영진이 조언했다.

얼마나 기다려야 한대요?

견인차가 언제 오는지 영진이 물었다. 갓길에서 노는 아이들 옆으로 차가 쌩쌩 지나갔다.

아빠 차는 검은색인데.

유석이 영진에게 다가왔다.

은색 차 한번 타볼래?

영진이 유석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아이는 작고 가지런한 치아를 드러내며 빙긋이 웃었다. 뒷좌석 문을 열자 유석이 올라탔다. 지영과 유민도 은색 차에 올랐다. 현우 혼자 남아 견인차를 기다리기로 했다.

 

은색 승용차는 아파트 단지와 상가 건물을 지나 외진 골목에 들어섰다. 언덕을 넘어 정원과 뒤뜰이 있는 이층 주택 앞에 도착했다. 주변보다 낮은 지대의 이층집은 시간을 되돌린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정원에 핀 주홍빛 능소화와 한쪽으로 기울어진 정자가 한때는 아름다운 전원주택이었음을 드러냈지만 수리나 보수한 흔적을 찾을 수는 없었다.

제시는 뒤뜰에 있었다.

언제부터 여기서 지낸 거예요? 밥은 잘 먹어요?

영진이 물었다. 제시는 임시로 세운 철망 우리 안에 목줄을 매고 있었다.

처음엔 밥도 제때 먹고 잘 지냈어요. 아이들과도 잘 지냈는데 어느날 유석이가 실수로 밥통을 건드렸더니 으르렁거리는 거예요.

지영이 말했다.

영진이 철망 사이로 제시를 불렀지만, 반응이 없었다.

그게 올봄이에요. 그때부터 여기서 지내요.

미친개 제시.

지영이 말을 마치자마자 유민이 흥얼거리듯 말했다. 유석도 따라 했다.

제시는 미친 게 아니야. 아픈 거야.

지영이 아이들에게 주의를 주었다. 그리고 현우에게 걸려온 전화를 받으려고 몇걸음 떨어졌다. 영진은 제시를 살펴보다가 한발 뒤로 물러났다. 냄새가 나는 것 같다. 윤주는 영진 뒤에 서 있었다. 제시 가까이 가지 못했다. 제시의 눈은 초점이 없는 것처럼 보였다. 귀는 축 처지고 곱슬곱슬하던 털도 힘없이 푸석했다. 그녀가 생각했던 것보다 제시의 상태가 좋지 않았다. 현관문을 열고 들어서면 꼬리를 흔들며 반기던 제시라고는 상상할 수 없었다.

신랑은 공업소래요. 오래 걸리지 않을 거예요.

지영이 현우의 소식을 전했다. 그녀는 빛바랜 플라스틱 의자와 찢어진 우산 옆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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