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단과 현장 | 연속기획 · 한국사 100년 다시 보기 ②

 

광주민중항쟁과 죽음의 자각

 

 

한홍구 韓洪九

성공회대 교수, 한국현대사. 저서로 『지금 이 순간의 역사』 『특강』 『대한민국사』(전4권) 등이 있음. hongkoo@skhu.ac.kr

 

  • 이 논문은 2008년도 (재)5·18기념재단의 지원을 받아 연구된 것이다.

 

 

1. 들어가는 말

 

5·18 광주민중항쟁은 한국의 민주화운동사에서 정말 특별한 위치를 점하는 사건이다. 광주 이전의 운동과 광주를 겪은 이후의 운동은 여러 면에서 뚜렷이 달라졌다. 1970년대의 운동이 소수의 지식인·종교인들과 대학생 엘리뜨들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다면, 광주의 학살과 저항을 겪은 이후 80년대의 민주화운동에는 이전과 비교가 안될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참여했다. 참가자 수와 폭만 늘어난 것이 아니라 투쟁에 임하는 사람들의 태도 역시 크게 달라졌다. 학살자 전두환이 대통령이라는 자리에 앉아 있다는 것 자체가 젊은 영혼들에게는 견딜 수 없는 치욕이었다. 광주의 살인마를 처단하기 위해서라면 어느 누구와도 손잡지 못할 바가 없었으며 어떤 급진이론이라도 받아들이지 못할 바가 없었다.

광주가 그후의 민족민주운동에 미친 영향력은 가히 절대적이었다. 80년대 민족민주운동의 원천은 분명 광주였다. 처절하게 패배한 싸움인 광주가 왜 한국의 민주화운동사에서 독보적인 규정력을 갖는 것일까? 그 답은 죽음에 있다. 광주를 통해 죽음이 우리 곁에 온 것이다. 광주의 죽음이 80년대를 살아온 사람들의 삶 속에 비집고 들어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광주에서만 사람이 죽은 것은 아니다. 그런데 왜 광주의 죽음은 특별하게 다가왔을까? 왜 광주의 기억이 한국의 민족민주운동에 광범위하고 지속적이고 근본적인 영향을 끼쳤을까? 무엇이 광주를 특별한 사건으로 만들었을까? 광주의 죽음을 기억한 사람들의 삶은, 그들의 이념과 투쟁의 태도는 어떻게 변했을까? 광주 이전과 광주 이후의 운동은 어떻게 달랐을까?

 

 

2. 죽음을 죽인 한국현대사

 

예나 지금이나 가까운 사람의 죽음은 참으로 견디기 어려운 상실감을 안겨준다. 그런데 광주 이전의 한국현대사는 아무리 가까운 사이라도 공산주의라는 이데올로기와 연관된 정치적 죽음에 대해서는 애도할 수도 기억할 수도 없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무리죽음을 한 사건에 대해서도 유가족조차 이야기할 수 없었고, 그 흔한 추모비 하나 세울 수 없었다. 수많은 사람의 죽음을 언급조차 할 수 없었던 한국현대사는 죽음조차 죽여버린 잔인한 역사였다고 할 수 있다.

우리는 아직 한국전쟁을 전후한 시기에 민간인학살로 목숨을 잃은 사람이 얼마나 되는지 알지 못한다.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에서 이 시기의 민간인학살에 대한 조사를 벌이고 있지만, 그 전모를 파악하는 작업은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다. 몇몇 지역에서는 유골이 발굴되었지만 그 주인이 누구인지 가해자가 누구인지 알 수 없는 경우가 허다하다. 1960년대 충남의 한 경찰서가 배포한 「간첩식별요령」을 보면 “과거의 악질 부역자 처단자 가족과 남몰래 가까이 교제하는 자”라는 항목이 들어 있다. 민간인학살 희생자 가족들과 가깝게 지내는 것만으로 간첩으로 몰릴 수 있는 형편이다 보니, 민간인학살 유가족 중에는 심지어 자기 자식에게까지 네 아버지는 빨갱이들 손에 죽었다고 거짓말을 한 경우도 있다고 한다.1 참으로 처절한 ‘이 땅에 살기 위하여’가 아닐 수 없다.

최근에는 ‘민간인학살’이란 말이 널리 쓰이지만 얼마전까지만 해도 ‘양민학살’이라는 말이 통용되었다. ‘양민학살’이란 말은 희생자가 빨갱이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가해자 측이 빨갱이로 오인해 잘못 죽였다는 뜻을 내포하고 있다. 이 말은 무고한 양민을 학살한 것은 문제지만 빨갱이는 죽여도 좋고, 죽일 수 있다는 뜻을 담고 있다.

엄청난 민간인학살에 대해 1950년대의 정치인 중 제대로 문제제기를 한 사람은 “피해대중 단결하라”는 구호를 들고 나온 조봉암(曺奉岩)뿐이었다. 조봉암은 보도연맹 희생자들과 관련하여 “다만 살기 위한 욕구로서, 또 무식의 수치로서, 이리저리 이 단체 저 단체에 가입하였다가 탈퇴한 그들이 이런 참변을 당하고 보니, 그 얼마나 본인들이 억울할 것이며 그것이 얼마나 가엾은 일인가, 목숨을 가진 백성이 살아보겠다고 발버둥친 것밖에 그 무슨 다른 죄가 있으랴”고 주장했다.2 그러나 독재자 이승만은 ‘피해대중’의 각성과 단결을 주장해온 조봉암을 간첩으로 몰아 죽여버렸다.

민간인학살 문제는 이승만정권이 무너지고 난 뒤에야 수면 위로 떠올랐다. 거창에서는 1960년 5월 11일 민간인학살 유가족 70여명이 학살 당시의 면장 박모씨를 돌로 때려 실신케 한 다음 불태워 죽인 끔찍한 사건이 일어났다(조선일보 1960.5.12). 당시 경찰은 유가족 20여명을 살인혐의로 연행해 조사했지만 200여명의 유족이 몰려들어 우리가 죽였으니 다 잡아가라고 소동을 부리는 통에 연행자들을 석방해야 했다. 거창 출신 학생들도 연일 국회의사당 앞에서 학살원흉을 처단하라고 데모를 벌였다(조선일보 1960.5.13, 5.15, 5.19). 이런 분위기에서 제4대 국회는 양민학살사건조사특별위원회를 설치했다. 그러나 한국전쟁 당시의 경찰 출신이 위원장으로 선출된 것을 비롯해 여러 제약 때문에 조사특위의 활동은 부진했다.3 거창학살 유가족들은 1960년 12월, 희생자들을 위한 위령비를 세웠지만, 1961년 군사정권은 유족회를 반국가단체로 몰아 간부 17명을 구속하고, 애써 만든 위령비는 불도저로 무너뜨려 땅에 묻고, 합동묘역을 파헤쳤다.4 당시 군사정권은 합동묘역의 유골을 희생자 수대로 배분해버렸다. 학살의 희생자들은 한번 죽은 것이 아니었다. 그들의 죽음은 끊임없이 살해당했고, 끊임없이 모욕당했고, 끊임없이 매장되었다.

민간인학살이 가져온 공포와 피해의식은 극우반공체제하에서 대중으로 하여금 대단히 순종적인 태도를 보이도록 만들었다. 그러나 학살의 생생한 기억을 간직한 대중을 상대로 민간인학살의 진상을 왜곡하거나 역사를 날조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민간인학살은 거론해서는 안되는 터부로 남아 있을 뿐이었다. 그런데 1960년대가 되면 한국전쟁을 직접 겪지 못한 세대가 교육의 주요대상으로 등장하게 된다. 대한민국의 군경이나 우익단체가 자행한 학살을 직접 본 적 없고 들은 적 없는 이들은 지속적으로 좌익이나 인민군이 행한 학살과 가혹행위에 대한 교육을 받았다. 이런 주입식 교육의 결과, 한국전쟁 전후의 민간인학살에 관한 그림은 전적으로 좌익과 인민군의 소행으로 그려졌다. 극우반공체제의 이데올로기가 대중에게 내면화되는 데는 시간이 필요했다. 장기간의 군사독재를 거치면서 한국 초중고생들의 반공의식은 1950년대의 청소년들에 비해 “훨씬 더 반이성적이며 비인간적이고 병적인 것”5으로 변해갔다.

1960년대와 1970년대는 결코 태평성대가 아니었다. 그 시절에는 우리 주변 여기저기서 수많은 죽음, 정치적이며 사회적인 죽음이 발생하고 있었지만 권력은 이런 죽음이 알려지는 것을 통제했고, 언론은 보도하지 않았고, 사회는 알려 하지 않았다. 베트남 파병으로 약 5000명의 군인이 사망했건만, 언론은 사망자 수가 300명을 넘어서자 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거두고 ‘월남에서 돌아온 새까만 김상사’로 시작되는 흥겨운 노래만 신나게 틀어댔다. 1960, 70년대에는 베트남전 사망자를 제외하고도 한국군에서 매년 1400~1500명의 사망자가 발생할 때였다. 전쟁을 치르지 않고도 한국군은 2년마다 1개 연대 이상의 병력을 잃고 있었던 것이다. 사람들은 그저 군대니까 그러려니 하고 무심히 지나갔다.

한국전쟁 이후 죽음에 대한 기억이 극단적으로 억눌린 한국사회에서는, 죽음에 대한 감수성이 발달할 수 없었다. 현기영(玄基榮)의 『순이삼촌』이 상징하듯 죽음의 한과 슬픔은 타인과 나눠서는 안되는 것이었기에 안으로만 파고들었다.

 

 

3. 실감되지 않는 죽음과 다가오는 죽음의 그림자

 

이승만과 박정희 등 독재권력의 폭압성은 어떤 극우반공 독재권력에도 뒤지지 않았다. 그러나 한국전쟁의 광풍이 휩쓸고 간 후 한국에서 정치적 이유로 목숨을 잃은 사람의 숫자는 다른 독재국가에서의 희생자 숫자와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적다. 이는 독재권력이 처했던 역사적 조건의 차이 때문이라고 할 것이다. “박정희정권은 기본적으로 분단과 민간인학살로 인하여 한국사회에 멸균실 수준의 반공이 이루어진 토대 위에서 출발했다. 바꾸어 말하면 독재권력이 잡아죽여야 할 사람들을 이미 다 죽여놓은, 아니 그보다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을 이미 제거해버린 상황에서 권력을 잡은 것이다.”6한국의 독재권력이 다스려야 했던 대중은 상당히 길들여진 사람들이었다. 국가권력은 물샐틈없는 감시망으로 대중을 통제했다. 무장투쟁이 일상화된 다른 나라들과 비교해볼 때 한국의 저항세력이 동원하는 폭력이란 맨손이거나 겨우 짱돌과 화염병 정도였을 뿐이다. 그마저 극렬 과격행동이라 비난받는 상황에서 저항운동이 총이나 폭탄을 드는 것은 상상조차 하기 힘든 일이었다.

길들여진 대중이 일정한 선을 넘지 않고 저항폭력을 거의 동원하지 않으면서 민주화운동을 벌였음에도 박정희의 집권기간 계엄령은 모두 3회 실시되어 총 31개월간 지속되었고, 위수령 역시 3회 실시되어 총 5개월간 지속되었다. 긴급조치는 모두 9차례에 걸쳐 발동되어 69개월간 지속됐다. 박정희가 집권한 220개월 중 거의 절반에 달하는 105개월 동안 계엄령, 위수령, 긴급조치 등 비상수단이 상시화돼 있었던 것이다.7

박정희는 정권유지를 위해 군대와 탱크를 동원해 헌법을 무력화하고, 수업을 빼먹으면 최고 사형까지 가능한 황당한 악법(「긴급조치 4호」)을 공포했지만, 학생이나 노동자를 향해 발포하거나 집단학살을 감행하지는 않았다. 이는 상황이 군사정권에서 먼저 발포를 감행할 만큼 위급하게 전개되지 않았다는 측면도 있지만, 박정희정권이 대규모 유혈사태를 피하기 위해 나름대로 자제력을 발휘했음을 의미한다.

그러다 1970년대가 되자 다시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지기 시작한다. 1970년 11월 13일, 전태일은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라고 외치며 분신했다. 1973년 10월 19일 서울대 법대 교수 최종길은 중앙정보부에서 변사체로 발견되었다. 중앙정보부는 최종길 교수가 간첩행위를 자백하고 양심의 가책을 느껴 투신자살했다고 발표했지만 이 말을 믿는 사람은 없었다. 이렇게 죽음의 그림자가 서서히 드리워지고 있었지만 광주 이후와 비교할 때 민주화운동세력이 아직 죽음을 실감하고 있었다고는 보이지 않는다.

학생들의 저항이 거세지자 유신정권은 서슬 푸른 긴급조치 4호를 통해 학생들에게 겁을 주려 했다. 유신정권은 학생과 지식인 수백명을 체포해 인혁당 사건 관련자 일곱명과 민청학련 사건 관련자 일곱명에게 각각 사형을 구형했다(조선일보 1974.7.9, 7.11). “영광입니다.” 이 말은 민청학련 사건으로 구속된 서울대 상대 3학년 김병곤이 사형을 구형받은 뒤에 한 최후진술의 첫마디였다.

김지하는 “영광입니다”라는 말이 “죽음을 이긴 것”이라고 높이 평가했다.8 유신의 법정에서 울려퍼진 “영광입니다”라는 말에는 그런 측면도 분명히 있다. 하지만 스물두살의 김병곤이 당당하게 “영광입니다”라고 말할 수 있었던 것은 또 한편으로는 죽음을 실감하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사형을 선고받은 민청학련 관련자 모두가 항소를 포기해버렸다. 1심 사형판결 열흘 뒤인 7월 20일 비상군법회의 관할관인 국방부장관 서종철은 민청학련과 인혁당의 연결고리로 지목된 여정남을 제외한 여섯명의 형을 사형에서 무기징역으로 경감했다(조선일보 1974.7.21). 만약 김병곤 등이 박정희정권이 자신을 진짜 죽일 것이라고 생각했다면, 그리고 그 죽음의 그림자가 덮쳐오고 있음을 실감했다면 감히 “영광입니다”라고 호기를 부리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런데 죽음의 그림자는 엉뚱한 곳에서 예상 못한 방식으로 드리워지기 시작했다. 재일동포 문세광이 1974년 8·15 광복절 기념식장에서 박정희를 저격했는데 부인 육영수가 피격 사망한 것이다. 박정희는 목숨을 건졌지만 아내를 잃고 큰 충격에 빠졌다. 박정희만이 아니라 중앙정보부, 청와대 경호실 등 정권 전체가 완전히 평정심을 잃었다. 특히, 남베트남 정권의 붕괴와 베트남의 공산화 통일이라는 최악의 상황은 유신정권을 극한으로 몰고갔다. 싸이공 함락이 초읽기에 들어간 1975년 4월 9일, 유신정권은 인혁당 재건위 사건 관련자 여덟명의 사형을 전격적으로 집행했다.[9. 인혁당 피의자들의 전격적인 사형집행 경위에 관한 자세한 설명은 「인민혁명당 및 민청학련 사건 진실규명」, 국가정보원 『과거

  1. 이령경 「KoreanWar전후 좌익관련 여성유족의 경험연구」, 성공회대 NGO대학원 석사논문 2003.
  2. 서중석 『조봉암과 1950년대: 피해대중과 학살의 정치학』하, 역사비평사 1999, 531~39면, 702~31면.
  3. 김기진 『국민보도연맹』, 역사비평사 2002, 247~79면.
  4. 당시 유족회의 활동과 그들이 받은 박해에 대해서는 한상구 「피학살자 유가족 문제」, 『한국사회변혁운동과 4월혁명』 2(한길사 1990) 참조.
  5. 서중석, 앞의 책 726면.
  6. 6) 졸고 「죽음을 죽인 한국현대사」,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2기 보고서 『진실을 향한 험난한 여정』, 2004.

  7. 조연현 「긴급조치 30년과 한국의 민주주의」, 『긴급조치, 그 악마의 시대』, 청년지도자 고 이범영 동지 10주기 기념토론회 자료집, 2004년 8월, 20면.
  8. 김지하 「고행: 1974」, 『동아일보』 1975.2.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