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 분단시대에서 통일시대로

 

교류·협력 시대에 되돌아본 남북한 도시화

 

 

장세훈 張世薰

국회도서관 입법정보연구관.

 

 

1. 남북한의 도시화, 어떻게 볼 것인가?

 

지난 6월의 남북정상회담은 그동안 가려졌던 북한의 또다른 모습을 그대로 보여줌으로써 북한에 대한 우리의 편견을 바로잡는 데 적지 않게 기여했다. 따라서 이번 회담이 결실을 맺기 위해서는 북한의 실상을 있는 그대로 밝히고 이를 바탕으로 남북한간의 동질성과 차별성을 구명하는 작업이 뒤따라야 할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이 글에서는 ‘반쪽짜리 사고’ ‘외눈박이 인식’에서 벗어나 좀더 객관적인 시각에서 남북한 도시화과정을 비교함으로써, 분단 이후 우리의 도시생활이 얼마나 달라졌고, 또 함께 공유하는 것은 무엇인지를 밝히고자 한다.

그런데 남북한의 도시화에 관한 기존 연구는 이념적 장벽과 자료의 제약에 부딪혀 아직도 걸음마 수준인데다가, 포괄적인 단순비교 방법에 기초해 남북한의 이질성만을 부각시킴으로써, 극심한 경쟁 속에서 ‘욕하면서 서로 닮는’ 동질화 과정에 눈감아왔다. 따라서 남북한의 도시화과정을 시기별로 비교하는 역사적 비교분석 방법에 입각해서 양자의 차별성과 동질성을 균형있게 점검해볼 필요가 있다. 특히 과도한 체제경쟁으로 남북한 사회가 공히 주민을 배제하는 기형적인 도시화과정을 겪었다는 점에 주목해서, 주민의 관점에서 지금까지의 도시화과정을 평가하고 향후 도시화의 방향을 제시할 것이 요구된다. 따라서 이 글에서는 이러한 관점에서 남북한 도시화의 전반적인 추이를 점검하고, 시기별로 도시화의 특성을 비교한 후, 최근의 화해분위기 속에서 남북한이 함께 추진해야 할 바람직한 도시화의 방향을 제시하고자 한다.

 

 

2. 남북한 도시화의 추이

 

도시의 인구집중

도시화가 산업화와 긴밀히 연계되었다는 점에서, 도시의 인구집중은 산업화 추이와 관련해서 살펴볼 필요가 있다. 먼저 남한은 1950년대까지 외국의 원조로 전재(戰災) 복구에 주력할 뿐, 산업화의 기틀을 마련하기에 역부족이었고, 도시화도 해방·전쟁 등과 같은 급격한 사회변동으로 발생한 난민들이 도시로 몰리는 것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경제개발이 본격적으로 추진된 1960년대부터 일자리를 찾는 농촌 유휴인력의 도시 유입이 도시화의 주류를 형성하는 등 도시화 추세가 바뀌었다. 물론 당시는 초기산업화 단계였기 때문에, 이농민이 도시에서 일자리를 찾고 자리를 잡기가 쉽지는 않았다. 그러나 산업화를 통해 새로운 취업기회가 쉴새없이 만들어지면서, 이들은 희망을 갖고 그럭저럭 생계를 꾸려갈 수 있었다. 특히 국가에서 경공업을 먼저 발전시키고 이를 바탕으로 중화학공업화를 추진했기 때문에, 농촌 출신 미숙련노동자도 어렵지 않게 도시에 정착할 수 있었다.

이러한 요인들이 이농을 부추김에 따라, 1960년대 전반기까지는 연평균 20만명 안팎이던 이농민이 1960년대 후반부터 연평균 50〜70만명 규모로 크게 늘어났고,1 1967년부터는 농가의 절대 수가 줄어드는 양상마저 나타났다. 그 결과 도시인구가 급속도로 증가해서, 1949년 17.2%였던 도시인구의 비중이 1980년 57.3%로 늘어났다. 1970년대 후반부터 이농의 규모나 비중이 감소하면서 도시화 속도가 상대적으로 둔화되었지만, 도시화 추세는 꾸준히 이어져 1995년 현재 도시화율은 78.5%로 선진국 수준에 육박했다.

이에 비해 북한의 산업화와 도시화는 중앙정부의 철저한 계획에 입각해서 이루어졌다. 그 과정에서 정치·군사적 요구가 강하게 작용함으로써 산업화의 방향이 생활필수품을 생산하는 경공업보다도 군수산업의 기초가 되는 중공업을 육성하는 쪽으로 정해졌다. 이에 따라 이미 1950년대 중반부터 휴전선에서 멀리 떨어진 기존의 공업도시 및 북부 내륙지역을 중심으로 중공업화가 추진되면서, 국가에 의한 노동인력의 공급이 체계적으로 이루어졌다. 그 결과 1953년 17.7%로 남한과 비슷했던 도시인구의 비중이 급상승해서 1960년 40.6%, 1970년 54.2%로, 남한의 그것과 10%포인트 이상의 현격한 차이를 보여주었다.

그러나 1970년대 이후 경제성장의 동력이 떨어지면서, 도시화 속도가 늦춰졌다. 이에 더해 도시인구의 급증에 따른 정치적 혼란을 우려한 나머지, 사회안전부가 나서서 도시로의 인구집중을 철저히 통제해나갔다. 심지어 평양인구 100만명 감축계획이나, 도시주민 200만명을 농촌으로 이주시키는 주민재배치계획과 같이 도시인구를 소개시키는 강력한 정책수단을 강구하기도 했다.2 그 결과 1970년대 이후 20여년 동안 도시화율이 5% 가량 증가하는 데 그쳐, 1993년 현재 북한의 도시화율은 60%를 갓 넘는 수준에 머물렀다.

이처럼 분단 이후 도시화는 가파르게 진행되어왔다. 그러나 1950〜60년대 빠른 속도로 이루어지던 북한의 도시화가 1970년대 이후 정체된 반면, 남한은 1960년대 이후 지속적인 경제성장에 힘입어 꾸준한 상승세를 보이고 있다. 그 결과 초기에는 북한에 뒤처졌던 남한의 도시화율이 1980년 북한을 앞질렀고, 1995년에는 20%포인트 가까운 커다란 격차를 보여주었다.

 

도시화와 도시의 위상 변화

도시화는 단순히 인구증가와 공간확장이라는 차원뿐만 아니라, 도시가 전체 국토에서 차지하는 위상이라는 차원에서도 접근할 필요가 있다. 이는 특히 남북한을 비롯한 개발도상국가에서 도시와 농촌 간, 또 대도시와 중소도시 간 격차가 벌어지는 지역간 불균등발전이 심각한 사회·경제적 문제가 되고 있기 때문에 더욱 그러하다.

이와 관련해 볼 때, 남한은 광범위한 이농으로 도시화가 급진전됨에도 불구하고 체계적인 정책대안을 마련하지 않았다. 1970년대 이후 지금까지 네 차례의 국토(개발)종합계획에서 지역간 균형개발은 주요 정책과제로 제기되었지만, 경제성장이라는 상위 정책목표에 짓눌려 ‘구두선(口頭禪)’에 지나지 않았다. 1980년대에 서울을 위시한 수도권의 과밀 문제가 심각해지자 수도권 집중을 억제하기 위한 각종 대책이 폭넓게 실험되었지만, 이 역시 대도시 집중을 제어하기에는 역부족인 미봉책 수준을 벗어나지 못했다.

그 결과 1949년 총인구의 7.2%에 지나지 않던 서울의 인구는 1970년에 이미 17.6%에 달했고, 1990년에 24.4%로 그 정점에 이르렀다가, 1995년에야 비로소 22.9%로 다소 완화되었을 뿐이다. 그러나 서울의 인구가 수도권으로 분산되면서, 수도권 인구의 증가추세는 여전히 지속되어 1995년 현재 전체 인구의 45.3%가 수도권지역에 거주하고 있다. 또한 서울특별시와 6대 광역시의 인구가 총인구의 절반에 달해, 전체 도시인구의 2/3가 대도시지역에 집중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사실은 대도시의 과밀화, 농촌의 과소화라는 지역 양극화 현상이 극심함을 여실히 보여준다.

이에 비해 북한은 도·농간 및 지역간 균형개발을 지속적으로 강력하게 추진해왔다.3 이미 1952년에 군 단위로 지방공업을 육성해 직·주근접(職住近接)적·자족적 생활환경을 조성함으로써 이상적인 사회주의 공동체를 건설한다는 농촌개발방식을 채택한 바 있다. 또한 주요도시가 해안지역에 집중된 왜곡된 공간배치를 바꾸기 위해 불모지나 다름없는 내륙지역에 신도시들을 대거 건설했다. 아울러 북부 내륙지역의 공장지대를 중심으로 대공장노동자들의 공동생활공간으로 노동자구(勞動者區)를 건설해서 지역의 균형개발을 꾀했는데, 1982년에 이미 197곳이 설치되었고, 1995년에는 256곳으로 늘어났다. 이러한 낙후지역 개발과 아울러 대도시 인근에 소규모의 자족적인 위성도시를 대거 건설해서, 대도시 인구와 시설의 분산을 꾀하기도 했다.

이처럼 적극적인 지역개발정책은 대도시 과밀 문제와 농촌지역 저개발 문제를 해소하는 데 상당히 기여했다. 예컨대 평양의 경우, 주변의 농촌지역을 포괄해서 도·농 통합시의 형태를 취해 행정구역 면적은 서울의 네 배에 달하지만, 총면적의 5%만 시가지로 조성되어 인구는 서울의 1/3 수준이고, 인구집중도도 서울의 22.9%에 비해 크게 낮은 13.4%에 지나지 않는다. 또한 평양의 1km2 당 인구밀도는 1178명으로, 1954명인 남한의 대전광역시보다 낮으며, 서울의 1만 7532명의 1/15에 불과하다.4 이는 남한의 40% 수준인 북한의 인구밀도에 비추어보더라도 상당히 낮은 수준이다. 또한 대도시인구의 비중이 남한의 절반 수준에 지나지 않는 등 대도시의 인구집중이 그리 심각하지 않다.

그러나 철도·도로·에너지원 등 사회간접자본에 대한 투자가 부족한데다가 낙후지역이 자족경제를 꾸려갈 만한 경제적 기반을 갖추지 못한 까닭에, 가내수공업 수준의 낙후된 지방 공업시설의 절반 가량이 가동되지 못하는 등5 ‘지역개발의 하향평준화’ 현상을 가져왔다. 또한 도시로의 인구집중은 어느정도 억제했지만, 평양·청진·안주 지역에 전체 공장의 45% 이상이 몰려 있고, 평양─남포간 및 평양─사리원간 지역이 대도시권화되는 등[6. 대한국토·도시계획학회 편 『통일시대 한반도 국토개발 구상 국제세미나 자료집』

  1. 윤여덕 외 『농촌인구 이동에 관한 사회학적 연구』, 한국농촌경제연구원 1983, 10〜11면; 장상환 「80년대 한국자본주의와 농업문제」, 『한국의 사회구성(1)』, 도서출판 화다 1985, 325면.
  2. 따라서 평균 20%를 웃도는 남한의 인구이동률에 비해 북한의 그것은 평균 5.3%에 지나지 않았다(박양호 외 『통일에 대비한 국토 개발과 관리 기본구상 연구』, 국토개발연구원 1996, 24면).
  3. 김현수 「북한의 도시계획에 관한 연구」, 서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994; 김현수 「개방 개혁에 따른 북한도시의 공간구조 변화」, 대한국토·도시계획학회 편 『화해와 협력의 시대에 대비한 한반도 국토개발 방향』 2000.
  4. 김원 『사회주의 도시계획』, 보성각 1998, 228면.
  5. 박양호 외, 앞의 책 78〜79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