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

 

국가와 군사기지에 대항하는 공동체의 투쟁

성주의 반기지운동에 관한 시론

 

 

정영신 鄭煐璶

제주대 SSK사업단 선임연구원. 공저 『포위된 평화, 굴절된 전쟁 기억』 『오키나와로 가는 길』, 공역 『저항하는 섬, 오끼나와』 등이 있음. freecity7@hanmail.net

 

 

 

1. 광장에서 다시 현장으로

 

광장의 운동이 끝났다. 그리고 현장의 운동이 다시 시작된다. 사실 현장의 운동은 늘 지속되어왔고 광장의 구호 속에 현장의 목소리 역시 담겨 있었다. 노동, 청년, 농민, 여성 등 부문별 참여가 이루어졌고, 비정규직 문제나 여성혐오의 문제를 비롯해 양심수 석방이나 세월호 진상규명 등의 요구도 분출되었다. 또한 강정마을에서 주민과 활동가들이 깃발을 들고 집단적으로 상경하거나 성주의 주민들 역시 집단적으로 광장에 동참했다.

광장의 열기가 가라앉은 지금, 광화문광장에 여전히 늘어선 ‘천막’들은 광장이 열리기를 기다리던 사람들이 누구인지, 광장 이후에도 여전히 그 자리를 떠날 수 없는 사람들이 누구인지를 보여준다. 천막은 돌아갈 일상이 없는, 돌아가지 않는 사람들이 머무는 자리다. 노동과 삶의 장소들이 파괴되었거나 파괴될 위험에 놓인 사람들, 그리고 또 누군가 그 자리를 지키며 저항할 때, 바로 그곳을 ‘현장’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광장의 천막이 현장을 광장으로 옮겨오는 통로라면, 현장의 천막은 사람들을 기다리는 만남의 광장이다.

우리는 곳곳에서 바로 그런 현장을 발견한다. 점점 더 많은 천막들이 늘어선다. 평택에, 강정에, 밀양에, 그리고 지금 성주의 소성리에. 계급·계층이나 소수자들의 투쟁현장과 달리 지역의 현장들은 구체적인 장소를 의미하며, 그래서 장소와 연결된 사람들이 중요한 행위자로 등장한다. 경찰이나 군대와 싸우는 시골의 ‘할매’들, 그들의 곁에서 예배를 드리는 종교인들, 지역의 마을을 지키기 위해 들어와 ‘사는’ 지킴이들, 마을을 오가는 도시의 시민들. 이들이 구성하는 지역의 현장들은 어느덧 익숙한 풍경이 되었다.

오늘날 지역의 주민들은 좀더 직접적으로 국가와 충돌하고 있다. 대도시 중심의 산업화 이후에 국책사업이 벌어지는 장소로서 지방이 더욱 중요해졌고, 국가 역시 시민들의 반발을 우려하여 여러 시설들을 지방으로 이전하거나 신설했다. 군사기지의 측면에서 말하자면, 한국전쟁 이후에 어느 정도 체계를 갖추고 있던 군사기지 네트워크는 탈냉전, 2000년대의 해외주둔미군재배치계획(Global Posture Review), 국방현대화계획에 따라 기존의 낡은 기지들을 일부 폐쇄하면서 현대화된 새로운 군사기지를 늘리고 있다. 다른 한편, 민주화와 지방자치 흐름에 따라 대도시 지역에서는 대규모 군사기지에 대한 강력한 반대운동이 일어났다. 두 요인이 맞물려 용산 미군기지를 비롯한 대도시의 군사기지는 축소되거나 폐쇄되었고, 지역의 중소도시나 마을 단위에 새로운 군사기지가 건설되고 있는 것이다. 산업화시대의 체제를 전환하는 데 필요한 희생과 고통은 고스란히 소수의 주민들에게 떠넘겨지고 있다. 밀양 송전탑 투쟁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이런 일은 군사기지에 한정되지 않고 전력사업 같은 국가기간산업에서도 일어나고 있다.

사람들이 삶의 터전에서 추방되어 흩어지거나 떠도는 모습, 그리고 삶의 터전에 뿌리를 내린 채 완강하게 저항하는 모습은 점점 더 일상적인 풍경이 되고 있다. 국가는 국책사업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법의 이름으로 주민들을 추방하고, 공권력을 통해 저항을 분쇄하고 마을을 점령하며, 개발과 발전을 통해 사람들을 유혹하여 공동체를 분열시킨다. 평택 밀양 제주의 작은 마을들이 바로 그런 현장이 되었고, 2017년에는 성주 소성리가 그 현장이었다. 앞의 세 사례 중 평택 대추리는 공동체를 지키기 위해 투쟁을 중단하고 집단적으로 이주하는 길을 선택했고, 밀양 장동마을은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입은 채 힘겹게 일상을 살아가고 있으며, 제주 강정마을은 공동체가 분열되는 고통과 상처 속에서도 투쟁을 포기하지 않고 있다. 성주의 공동체는 어떤 미래를 마주하게 될 것인가? 이 글은 대선 국면을 전후하여 정치적 쟁점으로 떠오른 사드(THAAD,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배치에 저항하는 성주 주민들의 투쟁에 관한 기록과 분석이다. 평택·제주의 투쟁에 관한 기존 연구와 기록, 소성리에서 보낸 며칠 동안의 경험을 토대로, 국가의 폭력에 대항해온 공동체들의 경험을 시민·활동가·연구자들과 공유해보고자 한다.

 

 

2. 전장이 된 마을

 

2017년 4월 26일 오전 0시 50분. 사드원천무효공동상황실의 SNS 게시판에 긴급공지가 올라왔다. “〔비상〕 지금 소성리로 와주세요. 밤새 달려서라도.” 곧이어 “〔비상〕 소성리로 오실 분들은 최대한 일출 전에 와주세요”라는 후속공지가 이어졌다. 이미 전날 저녁부터 주변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다는 소식이 전해졌지만, 눈을 붙이고 오라는 지킴이들의 배려에 마을 어르신들이 잠시 자리를 비운 때였다.

새벽 1시. 마을회관과 길 하나를 마주한 경찰병력 숙소에서 시작된 움직임은 마을 전체를 긴장감으로 짓눌렀다. 싸이렌 불빛과 군홧발 소리는 점점 커져갔다. 마을회관 주변을 지키던 지킴이들에게도 비상 싸이렌이 울렸다. 마을회관에 달린 스피커에서는 “주민 여러분, 지금 사드 장비가 들어오고 있답니다. 빨리 나와주십시오”라는 다급한 목소리가 울려퍼졌다. 비상연락망을 통해 마을 주민들과 성주·김천의 지킴이들에게도 소식이 전해졌다. 1시 50분. 쏟아져나온 경찰들은 몇분 사이에 모든 도로를 점령했다. 마을회관 바로 옆에 있던 주민들이 곧바로 뛰어나왔지만, 도로에서 법회를 열고 있던 원불교 교무들과의 사이에는 방패로 만든 인(人)의 장벽이 세워진 뒤였다.

멀리 떨어진 집에서 선잠이 들었던 소성리 ‘할매’들이 긴급연락을 받고 방문을 나섰다. 하지만 마을의 좁은 골목길은 벌써 방패, 헬멧, 곤봉으로 무장한 경찰들로 가득 차 있었다. 대문 앞에는 서너명의 경찰들이 지키고 서서 “못 나가니까 들어가세요”라며 주민들을 위협했다. 겨우 집을 나선 ‘할매’들은 어둑한 산길을 돌아서 마을회관으로 향했다. “따라붙어!”라는 명령에 몇몇 경찰이 플래시를 들고 따라왔다. 몇몇 주민들은 평생을 다니던 마을에서 길을 잃고 방황했다. 조금 먼저 나선 임순분 부녀회장은 지인에게 “내가 회관으로 나가고 있는데 만약 5분 안에 도착하지 않으면, 무슨 일이 난 줄 알고 조치를 취해달라”는 말을 남겼다.

마을회관 앞. 사드 반입 직전인 4시. 미리 나와서 앉아 있던 몇몇 할머니들과 주민들을 경찰들이 방패로 밀어내고, 사지를 잡고 들어내기 시작했다. 주민들은 “제발 민주경찰이라면 우리나라 백성을 보호해달라” “미군의 편이 아닌 제발 우리 주민들의 편을 들어달라”고 애원했다. 울고불고 매달리기도 했고 악을 쓰고 욕설도 했지만 경찰들은 방패 너머 헬멧 속에서 노려볼 뿐이었다. 4시 40분. 주민들은 난생처음 보는 차량에 괴상한 장비가 운송되는 걸 지켜보았다. 사드 장비가 반입된 것이다. 경찰들은 6시가 지나서까지 고착된 병력을 풀지 않았다. 그사이에 모여든 주민들에게 다시 폭력이 가해졌다. 6시 50분. 추가 장비가 산 위로 올라갔다. 그제야 탈진하고 부상당한 주민들이 병원으로 실려가기 시작했다. 이날 경찰은 100여명이 살고 있는 작은 마을의 주민과 지킴이들을 진압하기 위해 80개 중대 8천여명의 병력을 투입했다. 소성리 아래 초전면의 모든 도로 역시 통제되어 군용차와 경찰차만 통과할 수 있었고, 마을은 철저하게 고립되었다.

 

사드 부지인 성주골프장으로 반입되고 있는 사드 장비 ©연합뉴스

사드 부지인 성주골프장으로 반입되고 있는 사드 장비 ©연합뉴스

 

국방부는 입장발표를 통해서 “한미 양국은 고도화되고 있는 북핵·미사일 위협에 대비해 사드체계의 조속한 작전운용 능력을 확보하기 위해 노력해왔다”며 “환경영향평가와 시설공사 등 관련 절차는 앞으로도 정상적으로 진행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러나 실상은 아무런 기반시설도 준비되지 않은 골프장 한가운데 발사대를 가져다놓은 것에 불과했고, 환경영향평가 이전에 시설공사와 장비설치를 한 것은 명백한 불법이었다.1

아침 9시. 주민들과 지킴이들이 다시 모였다. 곧이어 사드 장비 반입 강행을 규탄하는 기자회견이 진행되었다. 성주투쟁위는 사드 장비 반입 자체를 “합의서도 없이, 주민 동의, 국회 논의조차 없이 강행된 불법”이라고 규정하고 “이를 인정하거나 묵과하지 않겠다”며 “즉각 철거할 것을 요구”했다. 그날 저녁 JTBC 뉴스룸에 출연한 임 부녀회장은 “사드가 들어갔다고 해서 끝난 게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했다. 언론에서는 “계엄령”이나 “군사작전”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며 이날의 사태를 비판했다. 이후에 벌어진 집회에서 주민들은 “아마도 광주에서 이랬을 것”이라며 분노했고, “이제야 강정마을의 마음을 알 것 같다”며 눈물을 흘렸다.

이날의 사태는 공권력의 돌출행동이나 제도의 단순 오작동 같은 것이 아니다. 2006년 5월 4일 새벽 5시. 정부가 평택 대추리의 들판과 대추분교에 대한 행정대집행을 위해 경찰 110개 중대 1만 1500명, 수도군단 및 700특공연대 소속 2개 연대 2800여명, 용역업체 직원 600명을 동원해 주민들과 시위대를 폭력적으로 진압했던 이른바 ‘여명의 황새울’ 작전의 시간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2 또한 2012년 3월 7일 오전 11시 20분. 강정마을에서 구럼비 발파를 막기 위해 철조망과 펜스를 넘어서 혹은 카약을 타고 바다 위에서 저항하던 강정마을의 주민들과 지킴이들이 제압되고 연행된 시간을 기억한다.3 국가와 공동체가 부딪치는 현장마다 반복되었고, 민주주의와 정치가 정지된 곳에서 곧바로 야만적인 폭력과 군사주의가 창궐했던 장면이다. 이 장면의 배후에는 국가관료제에 의한 주민배제의 행정, 반대 주민들에 대한 국가의 보복수단으로서의 사법체계, 주류언론에 의한 프레임 씌우기가 존재한다. 이날 하루 동안에 벌어진 일들이야말로 지난 1년 동안 사드 배치 문제를 둘러싸고 벌어졌던 사태의 본질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마을은 전장이 되었고, 국가는 자신의 속살을 보였다. 그러나 이것은 절반의 진실일 뿐이다. 주민들은 굴복하지 않았다.

 

 

3. 국가에 대항하는 공동체

 

2000년대를 지나면서 한국에는 새로운 유형의 사회운동 흐름이 나타났고, 그것을 빼고는 한국사회의 변화를 이야기할 수 없게 되었다. 화성 매향리에서 시작하여 평택 대추리와 밀양을 거쳐 제주 강정마을과 성주의 소성리로 이어지는 이 일련의 흐름은 공동체에 기반을 둔 지역 주민들의 저항이라는 점, 그리고 투쟁의 현장에서 개방된 광장으로 향하는 도시 시민들의 자발적인 지역행(地域行) 혹은 현장행(現場行)이라는 특징이 있다. 평택, 제주, 성주에서처럼 군사기지가 새롭게 건설되거나 확장될 경우에, 현장의 운동은 복합적인 양상을 띤다. 투쟁을 어떻게 조직하고 자원을 어떻게 동원하여 언제 어디에 집중할 것인지가 미묘한 문제가 된다.

우선, 투쟁은 지역의 현장에서 폭발한다. 이때 지역의 현장은 주민들의 삶의 터전이고, 주민들의 삶의 역사가 누적된 곳이며, 현장의 주민들이 인근 지역의 주민들과 조밀한 사회적 연결망을 형성하고 있는 곳이다. 직전까지 주민들이 주거공동체, 생활공동체를 형성하고 있었다는 점이 자연스럽게 동원(mobilization)의 가장 강력한 자원이 된다. 성주의 경우에는 세가지 요소가 중요했다. 첫째, ‘성주참외’로 대표되는 시설투자형 농업이 성주에는 일반화되어 있다. 따라서 농민들은 자연스럽게 이주보다는 농업을 지키는 것, 생산하고 생활하면서 투쟁하는 길을 선택했다. 둘째, ‘가톨릭농민회’의 발상지라는 데서 알 수 있는 것처럼 성주는 농민운동의 강력한 전통을 가지고 있었다. 또한 대구를 중심으로 문화운동에 종사했던 많은 예술인, 작가 들이 성주와 그 주변지역으로 귀농하고 있었다. 이들은 제2기 성주투쟁위원회가 출범한 이래로 이전의 운동경험을 전하면서 강력한 구심점을 형성하는 한편, 성주군청 앞에서 열리는 집회를 촛불 문화제로 발전시켰다. 마지막으로, 사드 전자파로 인한 아이들의 피해를 우려하는 여성들의 참여가 두드러졌다. 성주투쟁위원회 산하 여성위원회는 자발적인 헌신과 강력한 실행력을 바탕으로 촛불집회를 지속하는 든든한 버팀목이 되었다. 특히 이들이 형성한 비공식적인 네트워크는 아이들의 양육과 어르신들의 돌봄, 현장 살림의 유지 등에 많은 역할을 함으로써 주거와 투쟁이 공동체적 성격을 강화하는 데 주요한 요인이었다.4 사드와 싸우는 성주 사람들 이야기, 영화 ‘파란나비효과’ 박문칠 감독」, 뉴스민 2017.5.3 참조.]

‘거주’공동체, ‘생활’공동체는 갑작스럽게 ‘투쟁’공동체로 도약한다. 여기에는 앞에서 열거한 다양한 행위자들이 포함되어 있다. 반기지운동의 주체를 투쟁‘공동체’로 규정할 수 있는 것은 ‘주민’들이 거주의 인접성, 생활과 생산의 공동성에 근거한 유대의식을 강하게 가지고 있으며, 또한 이들이 맺고 있는 지연·학연·혈연 같은 요소들이 사람들을 연결하고 참여시키는 중요한 자원이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참여자들이 관료제적 조직하에서의 통제·명령·당위보다는 자발성과 헌신에 기초하여 운동에 참여한다는 점에서 투쟁공동체는 민주적이며 개방적인 특성을 지닌다.

투쟁이 공동체적 성격을 띤다는 점은 지역 현장의 자원을 총동원할 수 있는 유리한 조건이지만, ‘공동체적 성격’ 자체가 민감한 문제적 현상이 되기도 한다. 평택 대추리나 제주 강정마을의 사례가 유용한 참조점을 제공한다. 평택 대추리와 도두리 투쟁의 경우, 투쟁의 공동체적 성격이 전형적으로 나타났다. 평택 미군기지를 확장한다는 계획이 나왔을 때, 안정리의 상인들과 대추리·도두리 농민들의 선택은 극명하게 갈라졌다. 안정리의 상인집단이 미군기지 확장을 찬성했다면, 대추리와 도두리의 경우에 토지매수에 응했던 일부 농민들은 일찍 마을을 떠났고 남아 있던 마을 사람들은 하나가 되어 기지확장에 저항했다. 오랫동안 한마을에 살면서 형성된 튼튼한 사회적 연결망을 토대로 내부분열을 피하면서 투쟁공동체를 형성할 수 있었고, 주민들의 ‘미군기지확장반대 팽성대책위’는 평택시대책위와 범국민대책위라는 다층적인 연대망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할 수 있었다.

반면, 강정마을의 경우에는 이같은 순환구조를 형성할 수 없었다. 이미 제주의 화순과 위미에서 해군기지의 건설을 추진했다가 주민들의 저항으로 인해 포기한 경험을 가지고 있던 국방부와 해군은 제주도와 서귀포시의 양해 속에서 마을 이장을 비롯한 일부 주민들을 개별적으로 만났다. 그리고 마을회장과 어촌계를 중심으로 한 인사들은 2007년 4월 26일 저녁에 마을주민 1900여명 중에서 단 86명만 모인 자리에서 해군기지 유치 찬성 결의를 만장일치로 통과시켰다. 이 임시총회는 비공개로 진행되었고, 회의의 과정과 결과도 비밀에 부쳐졌다. 기다렸다는 듯이 국방부는 4월 30일에 “강정마을에 군항건설이 가능하다”며 이미 “검토가 끝났다”고 밝혔다. 그리고 5월 14일 당시 김태환 도지사는 “강정마을을 해군기지 최우선 대상지로 선정했다”고 발표했다. 강정마을 주민들은 2007년 5월 18일 해군기지유치반대위원회를 구성하고 해군기지 반대 입장을 분명히 했다. 그리고 강정마을회는 2007년 8월 10일 마을총회를 열어 해군기지 찬반투표를 추진했다. 유권자 1100여명 가운데 725명이 참여했고 이 중 93.8%인 680명이 반대표를 던졌다. 이것은 해군기지에 대한 강정마을 주민 최초의 총의이며 아직까지 유효한 것이다. 강정마을은 이날의 총의를 바탕으로 주민대책위를 중심으로 10년 동안 반기지평화운동을 벌여오고 있다.

돌아보면, 강정마을 해군기지의 유치와 건설 과정은 철저하게 비밀스런 협잡, 비공개적이며 비민주적인 논의, 주민을 배제한 결정, 그리고 폭력적인 추진 과정으로 점철되었다. 강정의 마을공동체는 이 충격에서 쉽게 벗어날 수 없었다. 투쟁의 시작부터 공동체는 분열되었고 주거와 생활의 영역 역시 분열의 영향을 받았다. 마을 사람들이 명절마다 함께 진행하던 마을의 합동제례는 중단되었고 100여개에 이르던 계를 비롯한 각종 모임 역시 중단되거나 와해되었다. 심지어 찬성 측과 반대 측은 편의점도 다른 곳을 이용했다. 조상의 제삿날은 친척끼리 분쟁이 일어나는 날이 되었다. 2012년 3월 7일 구럼비가 파괴되고 해군기지 건설공사가 본격적으로 진행되면서, 마을 주민들이 다시 일상의 삶을 꾸리려고 했을 때 거기에는 이미 공동체가 존재하지 않았다.

마을공동체에 대한 국가와 공권력의 공격은 위협과 폭력을 통해 공동체의 거주기반을 붕괴시킴으로써 공동체 자체를 와해하는 방향으로 나타나기도 하고, 다른 한편으로 개발이나 발전 정책, 정부지원금 등을 수단으로 해서 공동체 내부에 군사기지 찬성파를 육성하는 방향으로도 나타난다. 국가는 왜 이토록 마을공동체에 대해 공격적이며 적대적인가?

국가는 보통 “일정한 영토적 범위를 갖는 나라 안에서 헌법에 기초한 주권과 합법적인 물리적 강제력을 갖고, 국민들에 대해 지배를 수행하는 정치적 기구”로 정의된다. 하지만 현실에서 드러나는 국가의 모습은 다면적이다. 국가는 ‘공동선의 구현체’로 인식되기도 하고 ‘계급지배의 도구’로 비판받기도 한다. 또한 국가는 ‘일정한 영토 안에서 폭력수단을 독점한 정치기구’로서 국가관료제의 이익을 대변하는 독자적인 영역으로 이해되기도 한다.5 이때 국가에 의한 폭력의 사용은 법의 이름으로 정당성을 부여받으며, 이를 통해 내전을 중지시키고 국가 안에서 평화를 실현하리라는 기대를 받는다. 서구의 국가이론에서 폭력의 독점체로서의 국가 기능은 사회의 지배적 질서가 붕괴하려 할 때 전면에 등장하는 것으로 묘사되곤 한다. 그러나 법질서와 폭력은 서로를 배척하는 관계가 아니다. 낡은 질서를 무너뜨리고 새로운 지배적 질서가 형성되는 과정 자체가 이미 폭력의 행사이며, 이렇게 형성된 법질서는 국가의 폭력 사용을 정당화하고 지배적 질서의 수호를 위해 폭력을 소환한다. 특히 분단체제하에서 ‘적’과 마주하고 있던 한국의 위정자들은 전시상태의 논리를 시민사회 내부로 가져와서 폭력기구로서의 국가 기능을 반복적으로 소환해왔다. 그리고 이러한 소환은 민주정부하에서도 반복되었다. 평택에서 전개된 ‘여명의 황새울 작전’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시민사회의 일부는 ‘적’으로서 ‘종북’이나 ‘이적세력’으로 명명되었고 ‘군사적 작전’에 의해 제압해야 할 대상이 되었다. 그것은 대한민국이라는 국가가 수행한 군사주의적 문화와 행정적 실천이었고, 주민들에 대한 ‘국지적 내전’이었다. 요컨대 ‘국가에 대항하는 공동체’는 지역공동체나 사회운동의 적극적인 선택이 아니라 국가에 의한 군사주의적 실천의 결과물이다.

 

 

4. 경계짓기와 연대하기의 이중운동

 

현장의 주민들이 국가의 폭력적인 정책집행에 대항하기 위해서는 투쟁의 범위와 경계를 확장하지 않을 수 없다. 국가가 현장에 폭력을 소환하는 것처럼, 주민들은 ‘시민’들을 소환한다.6 지역에 근거를 둔 반기지운동은 지역공동체에서 출발하면서도 시민사회의 다양한 집단들과 연결됨으로써 경계가 모호하고 유동적인 형태의 투쟁공동체로 진화한다.

경계를 어떻게 해체하고 재구성할 것인가의 문제는 지역화된 사회운동에 가해지는 모순적인 이중의 압력과도 관련되어 있다. 이 압력은 주류언론에 의해 프레임 씌우기의 형태로 드러난다. 첫번째 압력은 반대운동을 전개하는 사람들이 이른바 ‘외부세력’의 개입 없이 ‘순수한’ 운동을 전개할 것을 요구받는다는 점이다. 이때 ‘외부세력’은 ‘종북세력’ ‘좌파’ ‘빨갱이’ 등과 호환되는 용어이며, ‘외부’는 지리적인 것이라기보다는 정치적인 것이다.

초기에 ‘사드 배치철회 성주투쟁위원회’는 성주군수를 비롯한 보수인사들의 주도로 이른바 ‘외부세력’의 개입을 거부했다. 성주군민들이 최초로 상경하여 서울역 앞에서 벌인 집회에서 군민들은 각 행정구역별로 이름표를 달고 집회에 참석하여 외부세력의 개입을 원천적으로 막으려 했다. 보수언론은 이를 대대적으로 보도하면서 시위꾼, 선동꾼을 잘 막아낸 합법적 평화시위였다고 평가했다.7 그러나 성주군수의 제3부지 요청을 계기로 성주투쟁위원회의 보수적 인사들이 위원회의 해산을 선언하면서 상황은 반전되었다. 군민들은 광장의 지킴이를 자처하면서 2기 투쟁위원회를 구성하고 오히려 “성주가 대한민국이다” “대한민국 어디에도 사드 배치 최적지는 없다”라는 구호를 내세우면서 성주투쟁을 ‘국민적’ 운동으로 발전시키려 했다. 1기 투쟁위가 ‘외부세력’을 차단하기 위해 설정했던 경계는 허물어졌다. 여기에는 농민운동에 종사하면서 연대운동의 경험을 가지고 있던 활동가들, 지역 사회운동의 연대망 속에 있던 작가를 비롯한 예술인들, 그리고 아이들의 생명과 건강에 지대한 관심을 가질 뿐만 아니라 세월호참사를 기억하고 있던 여성들이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경계 와해의 가장 극적인 상징은 성주의 군민들이 성주투쟁을 상징하는 파란 리본과 세월호의 노란 리본을 결합해 달기 시작한 일이었다.8 주민들은 투쟁의 주체를 ‘국민’으로 호명했고, 반대운동의 프레임은 지역 주민들의 건강권 문제에서 평화의 문제로 옮겨갔다.

 

2016년 10월 11일 서울 종로 보신각에서 원불교, 성주·김천 시민 등의 연대집회로 열린 ‘원-피스(One-Peace) 종교·시민 평화결사’ 현장. ©연합뉴스

2016년 10월 11일 서울 종로 보신각에서 원불교, 성주·김천 시민 등의 연대집회로 열린 ‘원-피스(One-Peace) 종교·시민 평화결사’ 현장. ©연합뉴스

 

지역운동에 강요되는 두번째 요구는 사실상 첫번째와 모순되는 것으로, 자신만의 이익을 위해 싸우는 ‘님비 현상’이 아닐 것을 요구받는다는 것이다. 첫번째 요구가 해당 사안에 대한 발언권을 ‘당사자’들에게만 부여하는 것이라면, 두번째는 그러면서도 당사자들이 공익성과 공공성의 기준에 따라 행동할 것을 요구하는 것이다.

고립과 개방을 동시에 요구하는 이 논리의 효과는 명백하다. 그것은 판단과 결정의 주체로서 주민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이다. 주류언론의 비판과 위협 속에서 주민은 ‘외부세력’에 의해 세뇌된 불온한 주체이거나 보상금 등의 경제적 이익만을 추구하는 사적 주체로 나타난다. 특히 국방, 안보, 외교 등의 사안에서 말하고 판단할 수 있는 유일한 주체는 국가로 상정되어왔고 이것이 중앙 관료사회의 오래된 관행이었다. 따라서 지역에서 전개되는 반기지운동이 감당해야 할 일차적인 과제는 군사기지 문제와 관련한 논쟁에서 주민들 스스로 자신을 주체로 드러내는 일이다. 이 ‘불온한 행위’에 대해 국가는 적대적이며 강압적인 방식으로 대처해왔고, 주민들은 연대의 망을 넓히고 투쟁공동체의 경계를 재편하는 방식으로 대응해왔다.

과거에 한국의 반기지운동은 주민이 중심이 된 주민대책위, 주변 지역 사회운동이 결집한 시(市)대책위나 도(道)대책위, 그리고 범국민대책위원회(범대위)와 같은 다층적인 연대체를 형성함으로써, 주민들이 지닌 상징성과 학생운동이나 노동운동이 지닌 동원력을 결합하는 이른바 ‘범대위체제’를 형성해왔다.9 그것이 가장 전형적으로 나타났던 사례가 평택투쟁이었다. 그러나 이 ‘범대위체제’는 오래 지속될 수 없었는데, 학생·노동·청년운동 등의 동원력 약화가 주요 요인이었다. 제주의 강정마을 투쟁에서는 섬이라는 지리적 조건이 또 한번의 제한을 가했다.

성주투쟁의 특징은 지역의 주민대책위가 소성리의 주민들뿐만 아니라 성주투쟁위나 김천시민대책위처럼 인근 지역의 주민들을 중심으로 상당히 폭넓게 꾸려졌다는 점이다. 지역 사회운동의 역량을 총동원하는 투쟁의 방식은 소성리 지킴이 활동에 필요한 인적자원을 확보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그뿐 아니라, 일반 시민을 현장으로 동원하기 위한 프로그램의 기획과 실행에도 보탬이 되고 있다. 성주투쟁위와 김천시민대책위를 비롯한 연대체들은 사드 장비가 1차로 배치된 4월 26일부터 대통령선거가 끝나는 5월 9일까지를 성주투쟁의 최대 분수령으로 보고 소성리 현장으로 시민과 조직운동, 지킴이 등을 최대한 동원하려 했으며 항의집회와 사드 장비 운송 감시활동을 지속적으로 벌였다. 사드한국배치저지전국행동은 5월 4일에 전국의 시민사회운동 대표들을 초청하여 ‘소성리 평화회의’를 개최했고, 5월 초의 연휴기간에는 1박2일로 평화캠핑촌을 열어 일반시민들을 초청했으며, 매일 밤 인권·평화와 관련한 영화를 상영하는 ‘별빛영화제’를 열었다.

투쟁의 공동체적 성격이 강화된다는 것과 지역의 현장으로 향하는 시민들의 참여가 늘어난다는 것은 모순적인 조합으로 보인다. 2000년대 이후 지역의 현장으로 지원을 나섰던 시민들은 주민들과의 정서적 유대감을 토대로 느슨한 형태의 ‘상상의’ 투쟁공동체를 형성하고 있는 것 같다. 시민들의 자발적인 연대 움직임에서 군사기지의 효용성이나 정당성 혹은 그것의 국제정치적 영향에 대한 합리적 판단뿐만 아니라 현장의 국가폭력에 대한 분노, 주민들의 삶에 대한 지지 역시 중요했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현장을 취재하는 언론의 역할도 중요했다. 예컨대 『한겨레21』은 평택투쟁을 보도하는 과정에서 593호(2006.1.17)부터 ‘대추리를 평화촌으로!’ 캠페인을 시작했는데, ‘들이운다’라는 코너에서는 대추리·도두리에서 살아온 할머니 할아버지들의 이야기가 소개되었다. “어떻게 만든 논인데, 그걸 달라고…”(595호), “이게 몇번째 쫓겨나는 거여”(596호), “죽어도 여기서 죽어야지”(597호), “난 돌멩이로 만들어진 사람이야, 일만 죽어라 해서 나라 부자 만들어줬더니 지랄들 해”(604호), “마지막으로 학교 한번 본다는데… 이놈들아 우리가 다 논 내서 지은겨, 왜 못 들어가게 해?”(609호) 같은 제목이 붙었다. 현장의 논과 밭과 학교에 축적된 주민들의 삶의 이야기는 투쟁의 근거였고 주민과 시민을 연결하는 가치였다. 성주의 지역언론들 역시 마찬가지다. 인터넷언론인 뉴스민에서 연재 중인 ‘소성리 엄니열전’이 전하는 마을 사람들 이야기에서도 초점은 사드 배치에 관한 찬반양론보다 ‘삶의 이야기’ 자체에 맞춰져 있다. 밀양이나 성주의 ‘할매’들이 사회운동의 중요한 주체로 등장하는 것도 바로 이런 맥락에서다. ‘할매’들의 삶과 투쟁에 대한 지지는 사드 배치나 군사기지 건설 등의 문제를 현장의 시각에서, 즉 현장에 만연한 국가의 폭력과 그로 인해 파괴되는 삶의 연속성과 가치를 중심으로 판단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논쟁의 찬반양론이나 합리적 판단과는 다른 수준에서 작동하는 이러한 맥락이야말로 사람과 사람, 주민과 지킴이, 주민과 시민의 관계를 설명하는 핵심적인 요인이다.

지역의 투쟁공동체로 시민들을 연결하는 중요한 역할을 해온 것이 ‘지킴이’들의 존재다. 앞서 언급한 뉴스민의 기사들은 사실 전문 기자가 아니라 지킴이들이 받은 구술을 토대로 작성된 것이다. 주민들이 살아온 이야기를 그대로 토해낸다는 것은 주민과 지킴이 사이에 형성된 신뢰관계를 보여주는 하나의 일화일 뿐이다. 지킴이들은 짧든 길든 현장에서 주민들과 ‘함께 살며 함께 투쟁하는’ 존재들이다. 투쟁이 길어지면서 평택의 지킴이들은 주민들과 함께 농사를 짓고 마을에 정착했다. 강정의 지킴이들 역시 마찬가지다. 이 지킴이들의 존재는 경계의 재편과 확장이라는 측면에서 결정적으로 중요한 두가지 역할을 담당한다. 먼저, 이들은 대부분 ‘외부’에서 온 사람들이다. 주민들이 이들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외부세력’과의 경계를 허문다는 의미다. 주민이자 활동가인 이들의 존재 자체가 경계를 교란한다. 둘째, 현장으로 발걸음을 향하는 시민들은 스스로를 ‘지킴이’로 명명하거나 동일시하는 경향이 있다. 이러한 동일시는 시민들 중 일부가 별다른 준비나 거부감 없이 곧바로 현장에서 거주하는 지킴이로 변신한다는 점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요컨대 지킴이는 투쟁공동체의 경계를 허물고 재구성하는 존재이자 현장의 삶을 지키는 자들에게 붙여진 이름이다.

 

 

5. ‘국민 되기’의 난점과 ‘운동 이후의 운동’

 

모든 사회운동은 ‘동원의 측면에서’ 한국 시민사회 다수 성원들의 지지와 참여를 목표로 한다. 명시적으로 표현하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투쟁공동체는 군사기지 반대운동이 ‘전국민적 운동’으로 발전하길 바라며, 그런 의미에서 공동체의 주체를 ‘국민’으로 호명한다. 그러나 주민공동체에서 국민공동체로의 도약은 실제로 일어나지도 않고 가능하지도 않다. 그것은 주민 혹은 주거 공동체가 투쟁공동체로 전환하는 과정에서 ‘국가’가 수행하는 역할에 대한 ‘안티테제’로 주어졌을 뿐이다.

국가는 초기 의사결정 과정에서 주민들을 배제할 뿐만 아니라 군사기지의 건설 과정에서 군대와 경찰 병력을 동원하여 강압적으로 주민들을 진압해왔다. 보수언론에 의해 강요되는 이데올로기적 압력, 국가관료제가 실행하는 주민배제의 행정은 주민에 대한 군·경의 군사주의적 진압과 적대행동에 의해 완성되어왔다. 이 삼위일체의 권력이 (사업 자체가 아니라 주민들에 대해) 수행하는 궁극적인 기능은 오직 하나다. 군사기지 건설을 비롯한 국가의 국책사업 수행 과정은 본질적으로 국가에 대한 절대적인 순종의 여부를 심문한다. 순종하지 않는 주체들은 군대와 경찰력을 동원한 폭력, 법과 제도를 동원한 폭력, 그리고 이데올로기적 폭력을 대면해야 한다.

화성, 평택, 제주, 성주에서 국가의 속살을 대면한 주민들의 한결같은 반응은 “우리는 국민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2000년 6월 28일 매향리 주민들은 화성군청 앞에서 ‘근조 매향리’라고 적힌 만장을 앞세우고 주민등록증 반납투쟁을 벌였다.10 평택 역시 마찬가지였다. 2006년 2월 7일 오전 11시. 평택시청 앞에서 대추리, 도두2리, 송화2리, 함정리, 신대리 등 팽성지역의 주민들 역시 주민등록증 반납 기자회견을 열고 주민증을 불태웠다. 기자회견문의 제목은 “우리는 오늘로서 대한민국의 국민임을 포기한다!”였다.

범국민대책위원회나 전국회의 등과 같은 명칭에서 드러나는 반기지운동의 ‘국민적’ 지향과 “국민임을 포기한다”는 선언 사이의 간극이 메워질 수 있을까. 국민 되기의 포기 선언은 국가가 수행하는 ‘국지적 내전’이 국가와 사회를 구성하는 ‘사회계약’을 파기하는 행위임을 확인하는 것이며, 시민사회의 성원들에게 새로운 정치공동체의 창출을 요청하는 행위다. 그러한 요청에 응해야 할 책무는 단순하게 선거의 결과로 환원되지 않는다. 한국사회에서 반복적으로 형성되어온 투쟁공동체들의 유산을 어떻게 공유하고 이어갈 것인가. 그 과제 가운데 하나는 ‘운동 이후의 운동’에 대한 고민이다.

사회운동을 하나의 주기(cycle)를 가진 현상으로 볼 때, 사회운동은 사람과 자원이 결집하여 높은 수준의 열정으로 충만한 ‘동원’ 국면과, 사람과 자원이 분산되고 열정이 식은 ‘탈동원’ 국면으로 구분할 수 있다. ‘탈동원’ 국면에서 당연하게 생각되어온 ‘운동의 소멸’을 어떻게 거부할 것인가. 예컨대 평택에서는 핵심적인 활동가들을 중심으로 ‘평택평화센터’를 조직하여 지속적이며 일상적인 반기지운동을 전개하고 있다. 평택평화센터는 평택투쟁 과정에서 형성한 국제적이며 전국적인 연대망을 유지하면서 상호 방문과 지지·지원투쟁을 하고, 평택시민들이 미군기지와 공존하면서 경험하는 다양한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반면, 강정마을은 일상적 활동으로의 전환을 모색하면서도 완전한 전환을 유예하는 모호한 상태에 놓여 있다. 그것은 평택에서 대추리·도두리 주민들이 집단적 이주를 했던 반면, 강정마을에서는 해군기지가 여전히 주민들의 생활·주거영역을 잠식해 들어오고 있다는 사정과 관련되어 있다.

‘운동 이후의 운동’에서 고민해두어야 할 핵심적인 문제 가운데 하나는 ‘지킴이운동’의 전망에 관한 것이다. 평택투쟁에서 전형적으로 나타났던 지킴이운동은 주민들과 함께 투쟁하면서 함께 살고 함께 생산하는 방식으로 출현했다. 활동가이면서 주민이고자 했던 지킴이들의 존재는 투쟁공동체의 경계를 해체했고, 현장을 문화의 장으로 만들었다. 이들은 특히 마을 어르신들을 배려하고 보살피면서 그들이 투쟁공동체의 실질적·상징적 구심이 될 수 있도록 헌신했다.

운동의 집중적인 동원 국면이 지난 이후, 지킴이운동을 어떻게 이어나갈 것인가? 평택의 경우에는 주민공동체가 집단적으로 이주하면서 이 문제가 충분히 논의되기 힘들었고, 강정마을의 지킴이들은 공동체가 와해된 조건 속에서 투쟁을 이어가고 삶을 복원하기 위해 분투하고 있다. 만약 지역 현장을 지키고, 또한 시민들을 모아 현장에서 광장을 열고자 하는 방식이 한국 사회운동의 새로운 흐름으로 등장하고 있다면, 그리고 현장을 지키려는 대열에 자발적이고 헌신적이며 재능 있는 지킴이들이 앞으로도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리라 예측한다면, 투쟁‘공동체’ 스스로가 지킴이운동의 미래에 대해 함께 고민하고 전망을 모색할 필요가 있다. 운동의 동원 국면에서 지킴이의 존재가 주민과 시민을 매개하는 존재였다면, ‘운동 이후의 운동’ 국면에서 주민과 시민이 어떻게 다시 만날지의 문제 역시 지킴이운동의 미래와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다. 지속 가능한 평화를 위해서는 지속 가능한 평화운동이 존재해야 한다.

 

아이들 학교 앞으로 덤프와 굴삭기가 줄지어 드나든다. 마을 큰 사거리는 정신이 하나도 없다. 전에 없던 높은 건물이 계속 올라선다. 해군기지를 찬성했던 집들은 태극기를 내걸기에 이르렀고 삼촌들 작업복은 국방색 위장무늬가 한창 유행이다. 짧은 머리의 청년들이 무리지어 걸어다니면 피하게 된다. 낯선 차량이 들어왔다가 나갔는데 어떤 삼촌네 땅을 보고 갔다는 말이 돈다. 마을 안에서 가장 넓고 아름답던 귤밭은 이틀 사이에 자취를 감췄다. 이따금 강정교에 걸어둔 노란 깃발을 젊은 남자들이 뽑아버리기도 한다. 아침 점심 저녁으로 군가가 온 마을에 울린다. 처음엔 창문을 거세게 닫던 사람들도 이젠 포기하고 듣는다. 모르는 사이 가사를 따라 부른다.11

 

강정마을에서 카메라를 들고 매일같이 일상을 기록하는 한 지킴이가 쓴 강정의 하루다. 군사기지는 구럼비 바위 위에 건설된 아스팔트 도로와 빌딩, 곧게 뻗은 군항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동네를 산책하는 짧은 머리의 젊은 남자들이며, 때마다 흘러나오는 군가의 노랫가락이며, 차츰 몰려드는 유흥가의 네온사인이며, 목돈을 만질 수 있는 흔하지 않은 기회이기도 하다. 무엇보다, 그것은 누군가에게는 절망의 벽이지만 누군가에겐 자유를 의미하는 마을과 기지 사이의 모호한 경계 자체일 것이다. 따라서 ‘운동 이후의 운동’은 투쟁을 지속하면서 삶의 공동체를 재건하고 재구성하는 문제일 수밖에 없다. 동시에 그것은, 안보나 발전과 같은 체제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마을을 군홧발로 점령하고 주민들을 삶의 현장에서 추방하는 형태의 국가를 해체하고 새로운 정치공동체를 창출할 것을 자신의 과제로 떠맡음으로써 시민사회 스스로가 투쟁공동체로 진화하는 기나긴 과정일 것이다.

 

 

  1. 환경영향평가를 진행하는 것은 환경영향평가법 제47조 제1항 ‘사전공사 금지’ 조항의 명백한 위반”이라고 지적했다. 「환경회의, “사드 배치 환경영향평가법 위반” … 한민구·조경규 장관 고발」, 경향신문 2017.5.5.
  2. 「영원히 돌이킬 수 없으리 작전명 ‘여명의 황새울’」, 『한겨레21』 제609호(2016.5.11); 「경찰 대추분교 진입… 시위대 진압, 연행」, 한겨레 인터넷판 2006.5.4.
  3. 「강정, 끊어진 길 앞에서」, 『한겨레21』 제902호(2012.3.14); 「강정마을서 ‘쿵’ 발파소리…‘화약냄새’ 진동」, 한겨레 2007.3.6; 「산산이 부서진 1.2km 구럼비, 강정의 피눈물」, 『제주의소리』 인터넷판 2017.4.27.
  4. 올 5월 25일에 개봉한 영화 「파란나비효과」는 바로 이 여성들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인터뷰
  5. 한국산업사회학회 엮음 『사회학』, 한울아카데미 2009, 268~85면.
  6. 지역 주민들의 공동체적 결집과 연결된 이 흐름은 1990년대에 ‘지역으로 내려가자’라는 구호 아래 중앙의 정치투쟁이 아니라 지역의 구체적인 사안 혹은 생활의 문제로 운동의 관심을 돌리려 했던 ‘사회운동의 지역화’와는 분명한 차이가 있다. 현재의 흐름은 문제의 발생지점이 지방정치의 영역이 아니라 여전히 중앙의 정치권력에 있으며, 중앙권력과 지역공동체의 직접적인 대결 양상으로 전개되면서 지자체나 지방정치의 영역이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에 그 특징이 있다.
  7. 「성주 군민 상경집회, 외부세력 거부만 부각한 <동아>: 민언련 오늘의 신문보도(7월 22일)」, 오마이뉴스 2016.7.22.
  8. 「성주 파란리본이 세월호 노란리본과 만나다」, 뉴스민 2016.7.25.
  9. 한국 반기지운동의 역사에 대한 개략적인 소개글로는 졸고 「동아시아의 안보분업구조와 반기지운동에 관한 연구」(서울대 대학원 사회학과 박사학위논문 2012)를 참조할 것. 여기에는 한국의 사례뿐만 아니라 일본, 오끼나와를 비롯한 동아시아 지역의 반기지운동이 간략하게 소개되어 있다.
  10. 상복을 입은 400여명의 주민들은 “대한민국은 주권국가가 아니며, 정부로부터 최소한의 보호도 받지 못하는 우리는 이 나라의 국민이 아니”라며 화성군수에게 주민등록증을 집단적으로 반납했다. 「매향리 주민의 ‘50년 전쟁’」, 『한겨레21』 제316호(2000.7.13).
  11. 엄문희 「어디에나 있고, 어디에도 없는」, 『말과활』 2017년 봄호 36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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