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단

 

국민국가의 집단기억과 역사교육·역사교과서

 

 

김유경 金裕慶

경북대 사학과 교수. 주요 논문으로 「독일대학의 역사학 전공과정 편제와 교과운영─괴팅겐 대학의 사례를 중심으로」 「중세유럽 필사본사료 연구의 과제와 방법」 등이 있음. leor@bh.knu.ac.kr

 

 

1. 머리말

 

한국과 일본의 대표적인 역사연구단체들이 1월 18일에 일본의 역사교과서 왜곡을 비판하고 진실을 밝히기 위한 공동회의 합의문을 발표했다고 한다.1 이른바 ‘새로운 역사교과서를 만드는 모임’이 편찬한 중학교용 역사교과서(扶桑社 간행)가 일본 문부과학성의 검정을 통과하고서도 채택률이 저조했던 사실과 신년에 발표된 양국 학계의 합의로 사태는 외관상 진정되었다. 그러나 이로써 동아시아에서 역사전쟁의 소용돌이가 재발할 소지가 완전히 불식된 것으로 보기에는 아직 시기상조일 것이다.

작년 봄 한국의 역사학관련 15개 학회가 개최한 심포지엄2을 시발로 하여 각종의 언론매체와 평론지가 이 문제를 계속 논의하면서 마침내 관심은 우리 역사학과 역사교육의 방향에까지, 나아가 몇가지 다른 교과의 교과서가 안고 있는 문제점에까지 미쳤다.3 1982년의 경우에도 그러했듯이, 일반대중과 적지 않은 학계 인사들에게조차 ‘역사교과서=일본 역사교과서 파동’을 연상시킬 정도로 우리 사회에서 역사·역사교육·역사교과서라는 주제는 평소에는 관심의 외곽에 놓여 있다가, 일본에서 부는 이상한 바람에 따라 갑자기 여론과 학계의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존재가 되었다.

역사교과서 문제가 자꾸 정치화되는 분위기는 우리의 역사교과서·역사교육의 모습이 어떠해야 할 것인가라는 원칙적인 과제를 더욱 깊이 고민하지 않을 수 없게 한다. 서양사를 전공하면서, 주 전공분야 외에 유럽의 역사교육 및 역사교과서에 어쩔 수 없이 관심을 기울여온 필자로서는 유럽의 예와 견주어 일본의 역사교과서 문제가 우리에게 던져준 더 본질적인 측면, 즉 우리의 역사교육·역사교과서 문제 몇가지를 생각하게 되었다.

 

 

2. 역사문화·역사학·역사교육

 

우리는 일상에서 과거가 남긴 무수한 흔적을 만나고 있으며, 긴 시간의 흐름을 통해서 형성된 사회구조 속에서 삶으로써, 과거에 놓인 원인의 결과를 경험하고 있다. 과거는 이와같이 오늘날을 살아가는 인간에게 여전히 구속력을 발휘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거 그 자체는 우리에게 저절로 그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과거에 대한 일정한 그림 즉 상(像)을 그려내고, 이를 전달하고 변경하는 데는 일정한—경우에 따라서는 과중한—노고가 필요하다. 결국 우리가 가지고 있는 과거에 대한 이해와 이미지는 과거가 남긴 흔적(사료)에 질문하는 의식적인 탐구행위 끝에 얻어지는 구성물(construction), 또는 그림에 불과하다.

인간이 그려내는 과거의 그림은 지극히 개인적인 차원의 것일 수도 있고, 사회가 그 구성원의 합의 속에서 그려내는 것일 수도 있다. 이렇게 형성된 역사상(像)은 사회구성원의 정체성(identity)을 확보해주는 집단기억으로서 하나의 공공적 기능을 발휘한다. 과거파악의 공공적 측면, 즉 하나의 사회가 과거를 역사(상)로서 인지(認知)하는 방식, 역사지식이 사회 안에서 현존하는 방식과 형태를 ‘역사문화’라는 개념으로 포괄할 수 있다. 역사문화는 현재 속에서 과거가 제시되는 여러가지 형태와 양식으로서, 당연히 매우 다양하고 서로 보충하거나 중첩되며, 상황변수에 따라 끊임없이 변동한다.4 역사문화의 요소는 모든 종류의 집단적 기억행위, 즉 각종의 기념물·기념행사·의식(儀式), 심지어 과거를 소재로 한 예술과 문학작품, 영상물까지 포함한다. 고도로 전문화된 오늘날의 역사학, 그리고 다수의 사회구성원과 접촉하고 있는 역사교육 및 역사교과서는 이러한 역사문화에서 매우 큰 구성요소의 하나이면서 역사문화의 다른 요소와 상보관계 또는 긴장관계에 있다.

근대 역사학을 태동시킨 19세기 유럽의 역사문화는 국민국가의 탄생·발전과 짝을 이루어 전개되었다. 이 무렵 사람들은 낭만적 민족주의의 동기에서 과거를 열광적으로 탐구했고, 갖가지 방식으로 재현해내었다. 기념물, 예술 및 문학작품, 의식(儀式), 그리고 고도로 세련되고 규율화된 형태의 역사학이 그것이다. 근대역사학이 수립되어갈 때 많은 역사가들은 ‘객관적 진리의 탐구’에 봉사한다고 믿었으며, 또 이 신념을 설파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행해진 당시의 역사서술과 연구는 이를 목표로 과학성을 표방하고 정제된 방법론을 구사했음에도 불구하고, 오늘날의 눈으로 보면 일정한 정치적·사회적 이해관계와 목적에 부합하고 있었다. 유럽의 근대 역사학은 일부의 개별적 예외가 없지 않으나 대부분이 당시에 비로소 형성되거나 공고해지던 국민국가(nation state)를 역사적으로 정당화하는 ‘집단기억’을 만들어내어 국민을 국민국가체제 내로 통합하는 일에 봉사하였다.5 20세기 중반에 이르기까지 유럽 각국에서 다수의 역사가들은(심지어 다른 분야의 지식인들까지) 때로는 노골적으로, 때로는 암묵적으로 민족과 국민의 유구함과 영원성, 나아가 국가의 신성함을 설파하면서, 국가의 국민동원체제에 협조하거나 적어도 그러한 국가정책의 시행에 도움이 되는 정신적 분위기를 만들어내었다.6

근대 유럽의 국민국가들은 국민의 체제내적 통합을 위해서, 또한 치열한 국가간의 경쟁에서 우월한 지위를 확보하는 데 필요한 역량을 양성하기 위해서 초등 의무교육을 비롯한 각급의 교육체제를 정비하게 되었다. 이런 제도적 조건에서 역사학은 국가별로 시간과 강도의 차가 있지만 최초로 독일에서, 이어 프랑스·영국·이딸리아 등지에서 고등교육기관 즉 대학체제 내의 전문가 양성과정을 획득하였고, 또 그 이하 단계의 교육기관에서 국민교육을 위한 필수적이고 유효한 수단으로서 동원되었다. 역사학의 전문화와 제도화는 오랜 동안에 이루어진 지적 활동의 발달에 의해서도 추진되었지만, 그 최종적 실현과정에서 국가의 지원과 역할은 매우 중요한 동력이 되었다. 더욱이 전문적인 역사학은 국민을 위한 역사교육이라는 일거리를 얻었을 때 안정된 제도적 기반을 마련하고 융성할 수 있었다.

익히

  1. 『중앙일보』 2002.1.21, 14면.
  2. ‘일본의 역사교과서 문제와 네오내셔널리즘의 동향’, 한국사연구회 주관, 역사학 관련 15개 학회 공동주최 심포지엄, 2001.3.19.
  3. 이 점에 대해서는 『당대비평』 2001년 가을호에서 수록된 특집과 일련의 논고, 그리고 『역사비평』 2001년 가을호의 집중토론 「한국역사학·역사교육의 쟁점」을 비롯한 일련의 논고가 참조된다.
  4. Wolfgang Hartwig, Geschichtskultur und Wissenschaft (München: dtv 1990) 8〜9면.
  5. 잘 알려진 바와 같이 ‘nation/nationalism’은 ‘국민·국민주의’ 혹은 ‘민족·민족주의’로 혼용 번역되고 있다. 이 글에서는 서구적 상황을 언급할 때, 가급적 ‘국민’이라는 표기를 사용하려고 하지만 문맥의 뉘앙스에 따라 ‘국민·민족’과 같은 형태의 표기도 사용한다.
  6. 19세기 유럽역사학에 내재한 민족주의 또는 국민주의적 바이어스(성향)를 집중적으로 검토한 최근의 연구성과로 다음의 논문집을 참조할 수 있는데, 이 논문집에서는 19세기 초부터 20세기 중반까지 영국·프랑스·독일·이딸리아의 역사학이 이런 점에서 ‘유럽적 공통성’을 지니고 있었음이 논의되고 있다. Stefan Berger, Mark Donovan and Kevin Passmore (eds.), Writing National Histories: Western Europe since 1800 (London: Routledge 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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