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박사랑

1984년 서울 출생. 2012년 『문예중앙』 신인상으로 등단. giparang-1@hanmail.net

 

 

 

#권태_이상

 

 

나는 달리고 싶었다. 티티 또한 그럴 것이었다. 하지만 이곳에는 티티가 달릴 만한 길이 전혀 없었다. 아니 이곳까지 오는 내내 티티가 실력을 발휘할 기회는 한번도 없었다. 당연하다는 걸 알고 있었으면서도 짜증이 일었다. 나는 괜히 아무도 없는 길에서 클랙슨을 울렸다. 빼앵, 클랙슨 소리마저도 참 기품 있었다. 티티는 석달 전 구입한 아우디사의 스포츠카였다. 원래는 람보르기니가 갖고 싶었으나 가격을 듣자 엄두도 낼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는 바로 눈을 낮췄다. 사실 람보르기니의 매력이라고는 잠자리 날개처럼 펼쳐지는 양쪽 문밖에 없는데 그건 달리는 거랑 아무 상관 없잖아? 겉으로는 그렇게 말했지만 그 순간에도 내 눈꺼풀은 잠자리 날개처럼 파르르 떨렸다.

아무튼 나는 중고차 시장에서 어렵게, 내 인생 최고의 적인 우유부단을 처음으로 무찌르고, 티티를 입양했다. 그렇지만 워낙 자식처럼 아끼느라 여태껏 집, 회사만 오갔을 뿐이다. 그러니까 오늘은 내가 티티와 함께하는 첫 장거리 여행이었다. 물론 나와 티티뿐이면 좋겠지만 조수석에는 대학 시절 단짝(이라 쓰고 웬수라 읽는다)인 매앵1이 코까지 골며 자고 있었다. 나는 매앵의 코를 비틀고 싶은 마음을 다스리며 전방을 주시했다. 여자가 아무 데서나 그렇게 퍼져 자고 싶냐, 이렇게 말하면 아마도 매앵은 남자답지도 못한 새끼가 마초 같은 소리나 한다고 설교를 늘어놓을 게 분명했다.

하지만 문제는 이게 아니었다. 문제는 날아갈 듯 달려야 하는 티티가 40km/h의 속도를 넘지 못하며 구부정대는 산길을 기어간다는 것이었다. 답답해서 문드러지는 속을 참을 수가 없는데 매앵의 코골이는 더 심해지고 있었다. 갑자기 손끝에서 심술 줄기가 뻗쳐나왔다. 남자답게 매앵을 흔들어 깨우든지 액셀러레이터를 밟든지 해야 했지만 나는 겨우 오픈 버튼을 눌렀을 뿐이다. 그러자 티티가 요동을 치며 뚜껑을 열었다. 매앵은 갑자기 들이치는 햇살에 못생김이 묻어난 얼굴로 일어나 말했다. 뭐야, 범블비 변신 중이냐?2

잠이 깬 매앵은 주위를 둘러보고는 금세 눈을 반짝였다. 와아, 너무 좋다. 온통 그륀이네? 나는 픽 웃을 뿐 대꾸하지 않았다. 매앵은 미국에서 단 삼년밖에 살지 않았지만 삼십년은 산 사람처럼 쓸데없이 발음을 굴렸다. 그것도 저런 세살짜리 조카도 알 만한 단어를. 음, 스멜즈 굿! 잇츠 풀 냄새. 매앵은 스마트폰을 꺼내 사진을 빠른 속도로 여러장 찍었다. 열장은 넘는 것 같았다. 그렇게 대충 찍어서 사진이 나오냐? 하는 내 말에 사진은 촬영이 아니라 보정이야, 하고 대꾸하며 손가락을 움직였다. 심각하게 화면을 보며 사각틀에 사진을 넣고 효과 탭을 이리저리 눌러 사진을 올리고는 내 눈앞에 들이댔다. 푸른 숲이 펼쳐진 사진 아래에는 #Nature #so_cool #휴식에는그린,이라는 해시태그가 달려 있었다.

나는 매앵을 무시하며 내비게이션을 확인했다. 아무래도 길을 잘못 든 것 같았다. 야, 주소 검색이나 다시 해봐. 여기 아닌 것 같아. 매앵은 리얼뤼? 쏘 을 외쳐가며 한글 주소를 꾹꾹 눌렀다. 내비게이션이 가르쳐준 대로 가도 계속 낯선 길만 이어졌다. 어렸을 때 봤던 길은 이제 없어진 건지, 아니면 내 기억이 잘못된 건지 확신할 수 없었다. 아무것도 모르니 그저 내비게이션에 의지할 수밖에. 나는 의지 없이, 생각 없이, 희망 없이 삼무 정신으로 운전만 했다. 그러다 도착한 곳은 놀랍게도 내가 찾던 그곳, 할머니댁이었다. 내비게이션은 아직 더 가야 한다고 말했지만 나는 시동을 끄고 티티에서 내렸다. 저 비뚤어진 파란 대문은 할머니댁이 분명했다. 귀퉁이가 안 맞아 늘 닫히지 않던 문은 여전히 그렇게 비스듬히 열려 있었다.

마당에 들어서자 어릴 때 기억이 밀려들었다. 할머니는 항상 마루에 앉아 있다가 내가 오면 신발도 갖춰 신지 않고 걸어나오곤 했다. 포즈는 꼭 오래된 연속극에 나오는 할머니처럼 아이고, 우리 강아지! 할 것 같았지만 현실은 달랐다. 할머니는 나를 반기며 아이고, 우리 석을놈 왔냐, 했다. 쌍시옷 발음이 잘되지 않아 어쩐지 욕 같기도 하고 욕이 아닌 것 같기도 한 석을놈. 그게 여기서의 내 이름이었다. 괜히 마음이 시큰해져 할머니! 하고 허공에 외치고 싶었으나 뒤따라오는 매앵을 보고 꾹 삼켰다. 매앵은 마루에 드러누워 사람들 없으니까 좋다, 베리베리 귿귿, 하고 감탄사를 늘어놓았다.

오랜 시간 운전을 해서인지 눕자마자 잠이 쏟아졌다. 나는 억지로 눈꺼풀을 몇번 들어올리다가 그럴 필요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편하게 숨을 내뱉자 코끝에 나무 냄새가 스몄다. 아주 오랜만에 맡는 냄새였다. 더 잘 맡으려고 숨을 크게 들이쉬다 곧 잠이 들었다. 얼마쯤 지나 잠에서 깼을 때 주위는 어둑어둑해져 있었다. 매앵은 차에서 그렇게 잤는데도 또다시 깊이 잠들어 쉽게 깰 것 같지 않았다. 나는 나무 기둥에 비스듬히 기대어 앉아 마당을 쳐다봤다. 몇년 전 시멘트를 발라 만들었던 수돗가가 바싹 말라 있었다. 아직도 물이 나오려나, 다가가 수도꼭지를 돌리자 아주 차고 맑은 물이 쏟아져내렸다. 나는 물을 처음 만지는 헬렌 켈러라도 된 것처럼 오래도록 물줄기에 손을 넣고 신기해했다.

 

두달 전, 할머니가 돌아가신 뒤 시골집은 비어 있었다. 산골 낡은 집의 재산가치는 거의 없었기에 다들 처분할 생각조차 못하고 그냥 놓아두었다. 오랜만에 생긴 휴가에 시골집에 온 것은 매앵 때문이었다. 나는 중견기업에 입사한 후 오년 동안 한번도 쉬지 않고 일만 해왔다. 입사할 때는 거의 기적과 같은 천운으로 합격했다지만 입사하고 나서는 그저 밀려나지 않기 위해 매달려 있을 뿐이었다. 내가 서 있는 곳은 매일 부채의 사북자리3였고 하늘도 그만 지쳐 끝난 고원4이었다. 그러던 중 다음 달에 새로 생길 연구부서에 발령을 받았고 팀이 꾸려지는 동안 보름의 휴가가 주어졌다. 처음으로 생긴 긴 휴가에 대체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는 내게 매앵이 찾아와 말했다. 그냥 떠나는 거지, 뭐.

매앵은 나름 프로 여행가였다. 여행에도 프로가 있느냐고 할지 모르지만 어쨌든 여행으로 책을 낸 적이 있으니 프로가 합당했다. 그런데 여기서 강조할 부분은 ‘프로’가 아니라 ‘나름’이다. 매앵은 출판사의 계획에 맞춰 여행을 다녀와 부풀린 감상을 쓰고 다른 곳에서 산 사진들로 빈 공간을 채워 책을 만들었다. 다 그런 거라고 말하면서. 아무튼 공대 출신의 매앵은 대학 시절 글이란 것을 한줄도 써본 적이 없었지만 지금은 글밥을 먹고 사는 중이었다. 그에 반해 국문과 출신인 나는 졸업한 뒤 보고서만 줄줄이 써댈 뿐 문장다운 문장을 써본 지 오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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