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론
균열과 봉합의 비평을 넘어
박수연 朴秀淵
문학평론가. 주요 평론으로 「기억의 서사학」, 저서로 『문학들』이 있음. qkrtk@chollian.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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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의 한국 시단에 대한 논의가 분분하다. 한동안 시는 특유의 민첩성과 비의성(秘意性)으로 사회와 역사의 시공간에 뛰어들었다. 특히 민중시는 시대적 유격전을 통해 새 삶을 예감케 하는 유력한 언어구성체였다. 지금, 시가 불의와 맞서는 유력한 무기였던 시대는 흘러갔음이 분명하다. 대부분의 시는 더이상 공통적 삶의 고통, 한숨과 눈물, 그리고 그것을 넘어서는 희망을 노래하지 않는다. 미래를 향한 예언적 투사의 순간은 전지구적 자본주의의 검은 섬광 같은 내면으로 가라앉거나 그 섬광의 세련된 디자인을 본딴 풍경과 추억에 사로잡혀 있다. 이것은 세계의 모든 것을 상품으로 만드는 시대를 살아가는 한 누구를 탓할 일이 아닐지도 모른다. 시도 세상도 그렇게 흘러온 것이다.
그렇지만 무슨 이유가 있기는 할 것이다. 가령 세계가 담론구성체라는 논리 속에서 보면, 인간은 언어에 의해 규정되는 존재임에 틀림없다. 이를테면 사람들은 탈근대에 대해 발설하는 순간 탈근대의 시대를 살게 되는 것이다. 시의 감각을 말할 때 감각이 부각되고 자연을 말할 때 세계는 자연이 된다. 이 말을 세계에 대한 관념론적 이해로 받아들여선 곤란하다. 오히려 언표된 것들의 수행적 성격 내지는 실천적 성격에 주목해야 한다. 언어는 항상 존재를 술어적으로 산출하면서 진행된다. 그 진행이란 이미 있지만 측정불가능한 실재(the real)를 현재적 순간에 구성해내는 것을 뜻한다. 바로 그 현재적 순간의 내외적 윤곽이야말로 그러므로 시적 진술들의 확실한 배경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유물론적 장’(A. 네그리) 안에 있는 시적 진술들은 따라서 두 가지 가치규정을 내포할 수밖에 없다. 첫째, 시는 측정불가능한 세계로부터 자신의 근거를 확보받는다. 이것이야말로 맑스가 말한 유물론적 테제의 현실성을 가리킨다. 의미로 충만한 문학이란, 그것이 터잡고 있는 토대로부터 산출되는 언어적 충전물이다. 다음, 언어를 둘러싼 물질적 복합체들에 대해 문학은 심미적으로 응답한다. 이 응답이 심미적인 것은 문학의 자율성을 강조하는 미학주의와 달리 지속적 운동과정에 있는 사회현실과 문학이 바로 그 운동의 내용과 형식으로 닮은꼴을 이루기 때문이다. 이것은 현실을 고정시키고 어떤 척도로써 위계화하는 모든 지배적인 힘들을 부수기 위해 스스로를 비고정성의 운동으로 몰아붙이는 자기부정성이라는 계기와 함께하는 관계이다. 여기에는 당연히 미래에 대한 기획이 있지만, 그것은 또한 우발적 요인들을 자기 근거로 긍정하는 기획이기도 하다. 그렇기 때문에 문학은 그 기획을 벗어난 곳에 항상 자리잡는다. 이 두 가지 규정 중 어떤 것이 앞서는가 하는 점은, 문학을 환원론적 시각으로 이해하려는 태도가 아닌 한 불필요하다. 실로 문학은 자신의 내재성을 긍정하지 않고는 존재할 수 없는 언어구성체이다. 다른 것들로 환원될 수 없는 바로 그 성격은 그러나 다른 것들과의 관계를 통하지 않고는 표현되지 않는 성격이다. 문학은 자율적인 것이 아니라 내재적이면서 상관적이다. 그러므로 환원되지 않는 내재성들의 수평적 횡단운동이 문학을 심미적인 것으로 만든다고 해야 할 것이다. 이것을 문학의 모순적 운명이라고 말하는 것은 어쩌면 너무 쉬운 규정을 내리는 것일지도 모른다. 문학은 규정되지 않는 것이면서 그 횡단운동에 끝없이 규정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모순이면서 모순을 넘어서는 것이 문학이다.
따라서 시란, 토대로부터 나와서 토대에 심미적 판단과 예감을 되먹이는 순환적 생성과정을 살아가는 존재일 것이다. 최근의 한국시에 분명한 존재근거를 부여하는 일은 바로 이 상관적 운동방식을 설명하지 않고는 불가능하다. 그리고 이 운동방식에 대한 충분한 자각이 비평에 필요해진다. 비평이란, 그것이 해석이든 평가이든 충분히 의식적인 척도를 사용할 수밖에 없다. 비평이란 말 자체가 언어로써 평형을 만든다(言+平→評)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데다가, 그 평형이란 일정하면서도 지속적인 분석 논리를 동반함으로써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여기에서 머물 수만은 없다. 비평과 학문은 서로 다른 방식의 글쓰기이다. 학문적 새로움이란 대개 낯선 이론의 패러다임에 의지하게 마련이고, 그 새로움의 성취가 학문적 성과로 인정받기 때문에, 그것을 척도로 논문들을 평가하는 국가관리의 제도적 영역으로 회수되는 학술논문은 이중의 부담을 지닌다고 할 수 있다. 한편으로는 다른 사람이 말하지 않은 것을 말해야 하는 것이 학문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제도관리 체계에 안착해야 하는 것이 학문이다. 비평의 영역은 그 제도관리를 넘어 작품을 통한 전복적 상상력을 재구축하는 데서 자신의 자리를 찾을 수 있다. 이 전복적 상상력이 순연한 의식의 차원에서만 이루어질 수 없다는 것은 특히 자본주의적 분열증의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는 더더욱 강조되어 마땅하다. 비평은 창조적 순간의 비의성에 정서적으로 합류하여 그 획득물을 언어로 논리화하는 작업인 것이다.
최근의 한국 시비평이 평가가 삭제된 해석에만 치중한다는, 필자까지 포함한 여러 논자들의 비판은 실은 이런 구분이 전제된 상태에서만 제 목소리의 효과를 가져올 수 있다. 제도관리의 영역에 점점 침윤되고 있는 학문이 밋밋한 해석에 전념한다면 비평은 그 평지에 정서적 굴곡을 이루어놓는다. 언어적 무의식이 가외로 가져다주는 창조성의 심미적 굴곡을 실현하는 것이 비평인 것이다. 만일 해석이 이런 수준을 구현하여 창조적 심미성의 운동을 통해 현실의 재발견에 도달하도록 할 수 있다면 그것 자체로서 완성된 비평이라고 할 만하다. 최근의 해석중심주의에 대한 비판은 오히려 학문적 방법론의 관행에 사로잡힌 밋밋한 해설중심 비평에 더 타당한 것인 셈이다.
『창작과비평』 2005년 여름호는 ‘갈림길에 선 한국 시와 시비평’이라는 제목 아래 최근 한국 시단의 윤곽을 여러 면모로 짚고 있어서 주목할 만하다. 최원식(崔元植)의 글이 한국 시와 시비평에 대한 총괄적 문제제기의 성격을 갖는다면 나희덕(羅喜德), 임홍배(林洪培), 이장욱(李章旭), 유희석(柳熙錫)의 글은 최근 논란이 되거나 시단의 한 축을 형성하는 시세계를 각론 형식으로 섭렵한다. 시와 시인은 많아졌지만 시의 영역은 날로 좁아지고 있다는 판단 아래 기획되었음직한 이 글들은 한국 시의 현재가 성취한 것과 결여하고 있는 것들을 지적해줌으로써, 무엇보다도 현재의 시단을 체계적으로 이해할 수 있도록 한다. 그러나 기획된 글들 사이에는 모두 하나의 잡지로 묶어두기에는 무시할 수 없는 균열이 있다. 성취를 이야기하는 글이 나희덕과 이장욱의 것이라면 결여를 이야기하는 글은 최원식, 임홍배, 유희석의 것이다. 이 균열이야말로 어쩌면 한국 시의 현재를 더 잘 알 수 있도록 해주는 현상일 듯도 하다. 시인들이 많아진 것만큼이나 수많은 시적 갈래들이 현재 한국 시단을 채우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동시에 그 균열은 동의할 수 없는 내용들이 그 글들에 포함되어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창비는 어떤 동요에 놓인 듯한데, 이것은 어쩔 수 없는 것일까 아니며 의도적인 것일까? 또한 특집에 실린 글들은 앞에서 말한 시의 두 가지 가치규정, 요컨대 현실성과 심미성이라는 요건을 어느 정도나 비평적으로 의식하고 있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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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잡하게 꼬이고 갈래가 나 있는 대상들을 체계화하는 데는 무릇 배제와 일반화의 원리가 작동하게 마련이다. 실로 현재의 한국 시가 권위적이고 중심적인 담론체계에 의해 위계화되거나 단일화되지 않는 상태에 있기 때문에 한 진영에 대해 논의하기 위해서는 또다른 진영을 포기하는 일이 거의 필연적이다. 그럴 수밖에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렇지 않은 듯이, 다른 진영의 포기란 있을 수 없다는 듯이 말하는 것이 일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