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명학수 明學秀

1966년 경기 동두천 출생. 2018년 조선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eyaya66@naver.com

 

 

 

그녀에게 무슨 일이 있었나

 

 

수진이 눈을 뜬다. 하마터면 더 오래 잠들어 있다가 오전이 지날 무렵 깨어나서 흐트러진 모습으로 기훈과 마주칠 뻔했지만 다행히 채 닫히지 않은 커튼 사이로 쏟아져 들어온 햇빛이 수진을 불안한 잠의 기운으로부터 건져낸다. 주위를 살펴 이곳이 어디인지 깨닫자마자 그녀는 본능적으로 두 손을 움직여 자신의 얼굴과 몸을 더듬는다. 청바지의 단추 한개가 풀어진 걸 알고 순간 놀라지만 원래보다 작은 사이즈여서 저절로 풀렸거나 자다가 불편해서 무심결에 풀었을 가능성이 떠올라 마음을 놓는다. 다행히 지퍼는 단단히 잠겨 있고 셔츠의 단추도 늘 그랬듯 위로부터 두개만 빼고 모두 채워진 상태이며 진작 벗어 던져도 좋았을 양말마저 그대로다. 현재 시각은 오전 5시 7분. 수진은 휴대폰으로 시간을 확인하고 얼굴을 살핀다. 끔찍하다. 너무 끔찍해서 쳐다보기도 싫지만 그 끔찍함은 익숙한 것이어서 수진은 오히려 안도한다. 그리고 당연한 순서처럼 후회와 자책이 뒤따른다. 어제 수진은 고등학교 동창들과 십년 만에 만났다. 대학로의 감자탕 전문점에서 오후 7시부터 시작되어 밤 11시쯤 끝날 것 같던 모임은 석촌호수 근처에 있는 기훈의 오피스텔로 옮겨서 계속 이어졌고, 새벽 1시쯤이었나, 수진은 갑자기 찾아온 두통을 견디다 못해 진통제를 먹었는데 오히려 그때부터 취기가 심해지더니 오바이트를 하고 눈물마저 뚝뚝 떨구다 기훈이 잠시 쉬라며 내준 침대에서 그대로 잠들고 말았다. 어떻게 그렇게 곯아떨어질 수가 있어? 돌았니? 미쳤어? 수진은 조금이라도 실수를 만회하려는 마음으로 흐트러진 침대 시트를 정리하고 이불을 반듯하게 개었으며 버건디색 커버가 씌워진 깃털 베개 위에서 머리카락 몇개를 줍는다. 하지만 겨우 그것만으로 기훈이 오랫동안 사용했을 잠자리가 원래의 상태를 회복했을지 그녀는 알지 못한다. 수진은 침대 옆의 바닥에 반듯하게 서 있는 자신의 토트백을 집어 들고 거실로 나간다. 집 안은 깨끗하고 조용하다. 지난밤 술자리의 흔적은 조금도 남아 있지 않다. 4인용 소파에서 누군가 이불을 둘둘 말고 잠들어 있어서 가까이 가보니, 기훈이다. 수진은 한숨을 내쉬고는 가방에서 수첩을 꺼내 한장 찢어서 메모를 남긴다. 어제는 정말 미안했어, 오전에 일이 있어 먼저 간다, 또 연락할게, 수진. 그녀는 서둘러 나가려다 현관에서 그녀의 살구색 구두 한쪽이 옆으로 누워 있는 걸 발견하고 멈칫한다. 굽이 높은 편이 아니어서 이러기 쉽지 않은데, 뭐지? 그것은 어제의 친구들이 남긴 서툰 인사처럼 보여서 수진의 기분은 살짝 불쾌해진다. 그녀는 쓰러진 구두를 세워서 다급하게 발을 꿰고 기훈의 집을 나선다.

 

수진과 기훈은 같은 고등학교의 문예부 부원이었다. 두 사람은 1학년 때 세명의 고3 학생들 앞에 나란히 앉아서 면접을 보았다. 며칠 후 세영과 영민과 현우가 차례로 같은 면접을 거쳐 부원이 되었고 2학년이 되어 교지 제작에 부족한 인원을 충원할 때 종수와 지연이 들어왔다. 그들 일곱명은 고3이 된 후에도 여름까지는 매월 독서 토론회를 하며 시와 수필과 짧은 소설을 써서 돌려 보았고 가을에는 1, 2학년들의 작품까지 한데 모아서 문집을 만들었다. 졸업 후에 그들은 아무런 약속 없이 각자에게 주어진 입시의 결과에 따라 뿔뿔이 흩어졌다. 간혹 행사가 있을 때 모교에서 뜻밖에 마주치거나 둘씩 혹은 셋씩 띄엄띄엄 만나는 경우는 있어도 그들의 의지나 계획에 따라 전원이 모인 적은 없었다. 거듭된 우연의 반복에 의해 일곱명의 최신 전화번호를 갖게 된 종수가 카카오톡에 단체대화방을 만들었고, 거기서 짧은 문장을 주고받으며 근황을 나누다 거의 6개월 동안 수도 없이 시간과 장소를 바꿔가며 조율한 끝에 겨우 십년 만의 모임이 성사된 것이었다.

 

수진은 집에 돌아오자마자 얼굴에서 화장을 닦아내고 욕조에 뜨거운 물을 받아서 시트러스향 입욕제를 푼 다음, 오늘이 토요일인 걸 다행으로 여기며 몸을 담근다. 따뜻한 기운과 함께 몸의 회복이 시작되면서 정신도 맑아지고, 그러자 수진은 지난밤에 있었던 일을 다시 정리해야 하는 의무감에 사로잡힌다. 수진은 정해진 시각보다 10분 일찍 약속 장소에 도착했다. 종수와 영민은 이미 와 있었고 5분 후에 세영이 왔고 잠시 후 기훈과 지연이 거의 동시에 도착했다. 현우는 오지 않았다. 모두 여섯명. 분위기는 나쁘지 않았다. 아무 말 없이 먹기만 하는 어색한 상황도 있기는 했지만 다 같이 파안대소하는 순간도 몇번인가 있었다. 그리고 기훈의 집. 어쩌다 거기까지 갔을까? 누가 먼저 가자고 했지? 난감해하던 기훈의 표정에도 불구하고 다들 가보고 싶다고 졸라댔다. 세영은 대학로에서 헤어졌지. 남자친구가 데리러 와서 어쩔 수 없다고 은근히 자랑을 해서 다들 장난스런 야유를 보냈어. 세영은 남자친구가 몰고 온 검정색 쉐보레를 타고 떠났고 남은 다섯명은 대리기사를 불러서 기훈과 영민의 차에 나누어 타고 석촌호수로 갔다. 혼자 살기엔 꽤 넓은 오피스텔이었지. 서른두평? 등단하고 삼년이 지나서 조만간 첫번째 소설집이 나올 예정인 작가답게 집 안은 온통 책이었고, 12층에서 바라본 야경이 예뻤고, 그리고 다들 와인을 많이 마셨어. 편의점에 들러 캔맥주를 잔뜩 사 갔지만 그건 손도 대지 않고 기훈이 갖고 있던 와인만 마셨으니까. 현우 얘기가 나와서 분위기가 잠시 썰렁해지긴 했어도 심각한 건 아니었고, 문제는 나였지. 원인이 뭘까? 두통이야 늘 있었지만, 술을 너무 많이 마셨나? 소주와 맥주에 와인까지, 여러가지를 섞어 마셔서? 아무리 그래도 그렇게 맛이 가다니. 약 때문인가? 약의 성분과 와인이 화학반응을 일으켜서? 모르겠다. 수진은 생각을 멈춘다. 더이상 아무 생각도 이어지지 않는다. 뭔가 놓친 것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불안감이 없지는 않았지만 그게 뭔지 수진은 알 수 없다. 몸이 물속 깊은 곳으로 가라앉는 느낌이 들고 눈꺼풀도 나른해진다. 수진은 고민을 그만두기로 한다. 별일 없었으니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싶어진다. 십대 시절의 추억을 되새기며 감상에 젖을 만큼 한가하지도 않고, 다음 모임이 또 언제 있을지, 과연 있기는 할지도 알 수 없다. 일년에 한두번 어제처럼 모여서 각자 사는 모습들을 서로 비교하고 폼도 잡고 시샘도 하고, 딱 거기까지. 그 정도면 충분하다. 수진은 무사히 집에 돌아왔다고 단톡방에 짧게라도 글을 올리려다 시간이 너무 이른 것 같아 그만둔다. 우선은 밤새 주인을 기다린 침대로 돌아가서 깊은 잠에 빠져들고 싶다.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자다 지쳐서 저절로 깰 때까지.

 

수진의 잠은 깊지도 않고 길게 이어지지도 못한다. 잠들었다 싶으면 쉽게 깨어났고 꽤 잔 듯해서 시간을 확인하면 겨우 30분 남짓 지났을 뿐이다. 두시간쯤을 그렇게 뒤척이다 견디다 못한 수진은 휴대폰을 들어 밤새 올라온 기사를 검색하고 이런저런 동영상을 보며 유튜브를 돌아다니다 단톡방에 들어간다. 모임 이후에 새로 올라온 글은 아직 없다. 사진도 많이 찍었으니 언젠가는 올라올 것이다. 거기 있는 모든 글에는 숫자 1이 남아 있는데 그건 아직 읽지 않은 사람이 있다는 표시이고 그가 현우라는 걸 수진은 알고 있다. 단톡방이 만들어지고 줄곧 그랬으므로 딱히 이상한 줄도 모르겠고 이유가 궁금하지도 않다. 누구에게나 각자의 사정이라는 게 있는 법이니까. 수진은 피로에 지친 눈두덩을 비비며 마치 조각 퍼즐을 맞추듯 자음과 모음들을 조합해서 짧은 인사라도 남기려 한다. 하지만 우정, 추억, 만남 같은 상투적인 단어들만 두서없이 떠오르다 사라질 뿐 좀처럼 그럴듯한 문장은 되지 않는다. 수진은 휴대폰을 던져놓고 베개에 얼굴을 파묻는다. 몸은 휴식을 원했으나 잠을 재촉할수록 정신은 수면을 피해 자꾸만 달아난다. 다시 휴대폰을 집어 만지작거리는데 문자메시지가 도착한다. 무사하냐? 짧고 무뚝뚝한 메시지의 주인은 세영이다. 수진은 그렇다고 답을 적으려다 통화를 선택한다. 세영이 바로 받더니 대뜸 묻는다.

“어디야?”

“어디긴, 집이지.”

“너 기훈이네서 잤다면서?”

수진은 깜짝 놀란다.

“어떻게 알았어?”

“정말이야? 거기서 잔 거야?”

수진과 세영은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에도 일년에 두세번, 서로의 생일과 연말연시 시즌마다 안부를 묻고 소식을 주고받으며 지내왔다. 수진이 분당에 있는 초등학교에 임용되고 세영이 출판사에 취업한 이후에는 홍대 앞과 종로에서 만나 밥을 먹기도 했다. 그때마다 세영은 수진에게 기훈의 근황을 전했다. 어느 신문의 신춘문예에 당선됐고, 언제 어디에 무슨 소설을 발표했으며, 어느 출판사와 계약을 했는지. 심지어 일년 전에 석촌호수 옆으로 이사를 한 사실도 세영이 알려주었다. 처음에 수진은 세영이 기훈에게 관심이 있나 의심했지만, 사실은 수진을 위한 거라고, 고2 때 잠시 기훈을 향해 기울었던 수진의 마음을 아는 세영이 수진에게 특유의 오지랖을 발휘하는 거라고 이해했다. 그래서 수진은 지난밤의 상황을 전하면서도 변명처럼 들리지 않도록 신경 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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