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임솔아 林率兒
1987년 대전 출생. 2013년 중앙신인문학상 및 2015년 문학동네 대학소설상으로 작품활동 시작. 소설집 『눈과 사람과 눈사람』, 장편소설 『최선의 삶』 등이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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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만두는 사람들
고양이들이 유리문에 엉덩이를 기대고 있었다. 남쪽으로 나 있는 유리문은 이 시간이면 햇볕을 받고 따뜻해졌다. 이 동네 고양이들은 이 시간이면 햇볕 외에는 더이상 아무것도 필요하지 않다는 표정으로 이곳에 모여 있었다. 나는 유리문에 노크를 했다. 고양이들은 이제 놀라지 않았다. 심드렁하게 나를 쳐다보다가 다시 고개를 돌렸다. 나는 유리문과 함께 고양이들의 엉덩이를 천천히 밀며 바깥으로 나왔다.
바닷바람 특유의 짠 내가 얼굴을 뒤덮었다. 나는 점퍼 지퍼를 목까지 끌어 올렸다. 해변에는 물이 빠져 수평선까지 뻘이 이어졌다. 장화를 신은 누군가가 뻘 한복판을 걷고 있었다. 노루섬으로 들어가는 중일 것이다. 하루에 두번, 바닷물이 빠지는 시간에만 길이 열려 섬으로 걸어갈 수 있었다. 주민들은 섬에 들어가 굴이나 파래, 다시마 같은 것을 채취하곤 했다. 이곳에는 그런 섬이 많았다. 그곳들은 모두 ‘노루섬’이라 불렸다. 어째서 모두 노루섬이냐고, 나는 주인 할머니께 물어본 적이 있었다.
“노루가 살아.”
재활용 쓰레기를 정리하며 할머니는 답했다. 무리로부터 이탈한 노루일 것이라 했다. 적을 피해 육지를 돌고 돌다 바다를 건너 무인도에 정착을 하는 것이라 했다.
“밤에 가끔 볼 수 있어.”
“뭐를요?”
“노루. 저쪽 숲에서 나타나서는 밤바다를 막 헤엄쳐서 섬으로 건너가.”
“낮이면 길이 열리는데 왜 밤에 헤엄을 쳐서 가요?”
“이 사람아, 낮엔 보이잖아.”
답답하다는 듯 할머니는 말했다.
“그것도 위험하긴 마찬가지일 텐데.”
“위험하지. 날 나쁘면 죽지.”
밤이면 나는 불을 끄고 창 앞에 서 있었다. 창밖에 펼쳐진 바다를 내려다보았다. 초승달이나 그믐달이 떠 있을 때의 바다는 오직 캄캄했다. 달이 점점 차올라 상현달을 지나면서부터는 파도의 물거품이나 바다에 떠다니는 빛조각들을 볼 수 있었다. 마침내 보름달이 뜨면 노루섬까지 보였다. 노루섬의 울창한 나무들이 파도 소리에 맞춰 흔들렸다. 그날은 하현달에 가까워지고 있었고, 바람과 함께 나무와 파도도 멎어 있었다. 자전축을 따라 별이 느릿느릿 움직였다. 나는 숲에 서 있는 검은 그림자를 단번에 알아보았다. 노루는 한참을 가만히 서 있었다. 그리고 천천히 바닷물에 몸을 담갔다. 매끈했던 바닷물에 파문이 퍼졌다. 목을 끄덕거리며 노루는 앞으로 나아갔다. 물의 표면과 닿아 있는 노루의 목에서 파문이 겹겹이 생겨났다. 멀리멀리 퍼져갔다. 나는 숨을 죽였다. 노루는 꾸준한 속도로 이동했다. 그리고 섬에 앞발을 디뎠다. 몹시 지쳤는지 발목을 접질리며 미끄러졌다. 목을 낮추고 점프를 해서 섬으로 뛰어올랐다. 순식간에 사라졌다. 나는 참고 있던 숨을 내쉬었다. 밤마다 노루를 기다렸지만 정말로 보게 될 줄은 몰랐다. 높은 파도 한번 만나지 않고 노루는 섬에 도착했지만, 노루에게는 가장 불안한 시간이었을 것이다. 내가 이렇게 쉽게 볼 수 있었으니까. 누구나 쉽게 노루를 볼 수 있었을 테니까. 노루가 목숨을 건 잠깐의 시간을 지켜보며 나는 어째서 경이로움을 느꼈을까.
그날 이후로도 나는 노루를 기다렸다. 쉽게 목격했으니까 한두번은 더 그 모습을 볼 수 있을 거라 여겼다. 노루는 나타나지 않았다.
곡선으로 휘어진 해변을 따라 곡선으로 휘어진 도로를 걸었다. 횟집과 잔치국숫집, 해물짬뽕 전문점을 차례차례 지나갔다. 불이 모두 꺼져 있었다. 거리에는 사람이 없었다. 토요일 점심부터 일요일 점심까지만 식당들은 문을 열고 손님을 받았다. 주말에는 캠핑족이 해변에 텐트를 치기도 했고, 내가 머무는 은돌콘도에 다른 숙박객이 찾아오기도 했다.
은돌해변을 지나면 차도가 나타났다. 이 차도를 따라가면 숲이 이어졌다. 숲에서 비포장도로로 빠져 한참을 올라가면 숲 한복판에 사비나가든이 있었다.
나는 무인 매표소 기계에 지폐 한장을 집어넣고 가든 안으로 들어갔다. 고운 흙이 깔려 있는 오솔길 양옆으로 곰솔나무가 늘어서 있었다. 곰솔나무길을 따라가면 스무평 남짓한 크기의 작은 연못이 나타났다. 연못의 표면에서 물안개가 피어올랐다. 연못 한가운데에 서 있는 낙우송을 올려다보았다.
사비나가 이 작은 연못을 사들인 것은 1952년이었다. 한국전쟁에 간호장교로 투입된 사비나는, 은돌고개 전투에서 동료를 잃었다고 한다. 그 동료에 대한 이야기를 사비나는 여러 사람에게 보낸 서신에 남겼다. 동료는 적군에 의해 사살된 것이 아니라 탈영을 하려던 아군을 저지하다가 다툼 끝에 살해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전쟁 트라우마와 향수병으로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으로 사건은 종결되었다. 사비나는 오랜 시간 동료의 죽음에 대한 진실을 알리기 위해 애를 썼다. 본국으로 귀환해도 좋다는 승인을 받았지만 사비나는 이 은돌마을에 남았다. 한국으로 귀화했다. 사비나는 외부와의 접촉을 차단한 채 작은 연못가에서 60년을 혼자 살았다. 그리고 91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작은 연못 뒤쪽에 지어놓은 자신의 목공실에서 사비나는 혼자 숨을 거뒀다. 사비나의 유언에 따라, 사비나가든은 일반인에게 개방되었다. 사비나는 작은 연못에서 시작되는 3만평 부지의 땅을 오랜 세월에 걸쳐 매입했고, 그곳에다 2만 7천여종의 식물들을 키워놓았다. 한국에 군락지가 없다고 알려져 있던 희귀식물과 절멸 위기종이 대거 발견되었다.
작은 연못에서 두갈래의 길이 나왔다. 왼쪽 길은 해안 절벽이고, 오른쪽 길은 동백나무 군락지였다. 오늘은 오른쪽 길을 선택했다. 동백나무 군락지를 지나 뿔남천과 풍년화 군락지를 지나 호랑가시나무 군락지에 도착했다. 겨울에 꽃이나 열매를 맺는 식물이 많았다. 샹소네트와 코튼캔디와 아사히주루 같은 동백나무들. 팔리다와 헬레나 같은 풍년화들. 로툰다, 디오르, 루브리카울리스 아우레아 같은 호랑가시나무들. 나는 흔들의자에 앉았다. 좀 앉고 싶다는 느낌이 들 무렵이면 의자가 놓여 있었다. 어떤 의자는 등받이 없이 통나무 조각만으로 되어 있었다. 어떤 의자는 줄을 매달아 그네처럼 설치되어 있었고, 어떤 의자는 비치체어처럼 다리를 쭉 뻗고 반쯤 눕게 만들어졌다. 비치체어를 닮은 의자에 앉으면 시선이 저절로 하늘을 향했다. 바로 그 자리에서 드넓게 펼쳐지는 낙조를 볼 수 있었다. 해안과 가까워 바닷바람이 부는 지역에는 힘이 좋은 소나무들이 바람막이 역할을 했고, 잎이 여린 식물들은 언덕 아래 바람이 불지 않는 곳에 심어져 있었다. 조약돌길이 끊어져 발소리가 잦아드는 자리에는 새들이나 오리들의 보금자리가 있었다. 오래도록 매만져 반질반질해져버린 나무 협탁처럼 모든 것이 완벽하게 햇볕과 바다와 어우러져 있었다. 그러나 겨울에 특화된 이 식물원을 찾는 관광객은 많지 않았다. 사비나가든은 매년 적자를 면치 못했다. 절멸 위기종을 제외한 나머지 식물들은 서서히 죽어가고 있었다. 곳곳에 포토존이 설치되었고 기념품 판매점과 매점이 들어섰다. 그곳들은 까페로 바뀌었다가, 게스트하우스로 바뀌었다가, 결국 문을 닫았다고 했다.
말라 죽은 나무 아래에는 낙엽들이 무성히 쌓여 있었다. 나는 그곳에 쪼그려 앉아 낙엽 하나를 골라내기 시작했다. 잎맥이 선명한 한개를 주워 일어섰다. 오늘은 혜리에게 이 낙엽에 대해 이야기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