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단과 현장
근대 한국의 이중과제와 녹색담론
‘이중과제론’에 대한 김종철씨의 비판을 읽고
백낙청 白樂晴
서울대 명예교수, 문학평론가. 최근 저서로 『통일시대 한국문학의 보람』 『한반도식 통일, 현재진행형』 『백낙청 회화록』(전5권) 등이 있음. paiknc@snu.ac.kr
1. 글머리에
‘근대의 이중과제’론, 곧 근대적응과 근대극복을 이중적인 단일과제로 추진한다는 논의는 추상수준이 매우 높을 수밖에 없다. ‘근대’를 세계역사상 자본주의시대로 규정할 경우 그 구체적인 기간에 대해 여러 학설이 있지만, 여하튼 짧게는 2, 3백년, 길게는 5백년 이상에 걸쳐 있으며 아직도 지속중인 시간대이다. 공간적으로도, 자본주의가 자리잡은 지역이 처음에는 지구의 한 모서리에 불과했으나 지금은 전세계를 망라하는 공간이 되었다. 이렇듯 거대한 시·공간에 전반적으로 적용되는 담론이라면 추상성이 높은 것은 당연한 일이다.
반면에 근대 개념의 다양성이라든가 ‘이중과제’ 실행의 현실적 어려움 등은 다른 문제다. 사람마다 개념을 달리 쓰더라도 자신은 근대의 기준을 어디에 두는지를 밝혀주면 그만이고, 실천적인 어려움은 그것대로 따로 고민할 일인 것이다. 다만 이중과제론이 추상수준이 높은 담론임을 솔직히 인정하면서 다른 차원의 담론과 어떻게 연결될 수 있을지를 성찰하는 과제가 남는다. 이에 대해 나는 최근에 조효제(趙孝濟) 교수와의 대화에서 세계체제라는 차원에 맞춰진 이중과제론이 한반도에 적용될 때 분단체제극복론이 되고, 추상수준을 조금 더 내릴 때 남한사회 내에서의 변혁적 중도주의가 된다는 개략적인 설명을 제시한 바 있다.1
그런 점에서 이 대화가 포함된 지난호 특집 ‘한반도에서의 근대와 탈근대’에서 이남주(李南周), 백영서(白永瑞), 홍석률(洪錫律) 등이 이중과제 수행을 위한 자기 나름의 시도를 보여준 것은 무척 반가운 일이다. 이 가운데 홍석률의 「대한민국 60년의 안과 밖, 그리고 정체성」은 이중과제론의 본격적 전개를 꾀한 것은 아니지만, “국민국가, 산업화, 민주화 등 근대의 과제들이 서로 분리된 채 선후관계를 형성하여 상호 배제하고 근대의 온전한 성취와 탈근대론이 서로를 배제하는 사고가 아직 우리 사회에서 극복되지 못하고 있다”(『창작과비평』 2008년 봄호 66면)는 문제의식이 이중과제론과 기본적으로 일치하고 있다. 다른 한편, 변혁적 중도주의를 통한 한반도 분단체제 극복과 전지구적 자본주의에 대응하는 문제를 연결지은 이남주의 「전지구적 자본주의와 한반도 변혁」이나, 그간의 동아시아론을 한걸음 진전시키면서 분단된 한반도에서의 남북연합 같은 복합국가를 건설하는 문제를 동아시아 지역연대의 중요 의제로 부각시킨 백영서의 「동아시아론과 근대적응·근대극복의 이중과제」는 각기 자신의 관심분야에서 이중과제론의 구체화를 시도한 예이다. 그 성과는 많은 토론을 거치며 검증할 일이겠지만 이중과제론이 끝내 추상적인 언술로 겉돌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준 셈이다.
반면에 김종철(金鍾哲) 『녹색평론』 발행인의 「민주주의, 성장논리, 農的 순환사회」는 이중과제론을 포함한 나의 이런저런 주장에 대해 분명한 반대의견을 내놓았다. 이는 물론 창비 편집진과 입장을 달리하는 목소리를 듣고자 한 기획의도에 합치하며, 기획에 호응하여 성의있는 비판을 해준 필자에게 나 자신과 동료들뿐 아니라 많은 독자들도 고마움을 느낄 것이다. 내 쪽에서도 그의 비판을 진지하게 검토하고 솔직하게 답변하는 것이 도리일 터인데, 논쟁이라기보다 공유하는 문제의식에서 출발한 담론의 진전을 주된 목표로 삼고자 한다.
2. 성장논리 비판과 담론의 차원 문제
먼저 나는 근대의 기본적인 성격을 비롯한 많은 사안에 대해 김종철과 인식을 같이하고 있음을 상기하고자 한다. 예컨대 자본주의 시장경제를 두고,
경제성장의 과실이 보편적으로 나눌 수 있는 성질의 것이라고 믿는 것은 어리석은 망념(妄念)이다. 오늘날 자본주의 시장경제가 요구하는 소비형태는 본질적으로 낭비를 제도화하고 있는 것이지만, 그 낭비적인 소비수준을 누릴 수 있는 인구는 현재는 말할 것도 없고 미래의 어떤 지점에서도 세계인구의 소부분에만 국한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부의 균점은 자본주의의 성장 메커니즘이 결코 허용할 수 없는 것이며, 만약 실제로 균점이 실현된다면 이미 그것은 자본주의 씨스템이 아닐 것이다. (『창작과비평』 2008년 봄호 77~78면)
라고 하는 그의 말은 나도 내 나름으로 주장해온 내용이다. 생태계의 위기에 관해서는 물론 나의 공부와 실행이 많이 못 미치지만, 김종철의 다음과 같은 주장 역시 나의 지론과 기본적으로 일치한다.
에콜로지의 관점에서 볼 때, 자본주의 근대문명의 근본문제는 그것이 순환의 법칙에 의해 돌아가는 세계 속에서 끊임없이 직선적인 ‘진보’를 추구하도록 강요하는 메커니즘에 종속된 씨스템이라는 것이다. 이 근본적인 모순이 해소되지 않는 한, 조만간 자본주의의 종언은 필연적이라고 할 수 있다. 아니, 이대로 가면 자본주의의 종언보다 먼저 세상의 종말이 닥칠 가능성이 더 크다고 할 수 있다. (같은 글 84면)
김종철의 녹색담론에서 또 하나 매력적인 점은 민주주의 문제에 대한 그의 남다른 관심이다. 이는 그가 녹색운동에 뛰어들기 전부터 견지해온 입장으로서, 어느덧 100호를 맞이하는 『녹색평론』의 편집·발행을 포함한 그의 실천활동에서도 생태계운동과 민주주의적 지향을 결합하려는 그의 열정을 확인할 수 있다. 이번 글에서도 그는 “민주주의란, 간단히 말하여, 민중이 자신의 삶을 스스로 다스린다는 것을 의미한다”(71면)는 전제 아래, “이른바 ‘민주화 이후’ 시대라는 지난 20년 동안 우리가 민주주의에 대해 지나치게 낙관적인 태도로 살아온 게 아닌가〔…〕. 우리는 이제 ‘민주화’는 성취했으니까 다음 과제는 ‘선진화’라고 생각하고 있었는지 모른다”(68면)라는 반성을 제기하면서, 노무현정부가 한미FTA협상을 강행함으로써 “이 나라의 민주주의의 토대가 얼마나 허약한 것인가가 폭로되는 데 큰 기여를 했다”(69면)고 꼬집는다. 하나같이 동의가 되는 명제들이다.
하지만 논술이 진행되면서 완전히 수긍하기 힘든 대목도 눈에 뜨인다. 예컨대 민주주의에 관해서도 한미FTA체결에 대한 비판에 이어, “지난 20년 동안 ‘민주화 이후’ 시대 전체에 걸쳐서 민주주의가 한번도 제대로 실현된 바가 있는지 의심스럽〔…〕다. 오히려 사태는 점점 더 악화되어왔다고 보는 것이 정당한 판단일 것이다”(69면)라는 주장에 이르면, 민중자치로서의 민주주의가 한번도 제대로 실현된 바 없다는 데는 동의할 수 있고 자본주의의 고도화에 따라 민중자치의 여건이 악화된 면이 분명히 있다고는 해도, 지난 20년 동안 한국 민주주의가 줄곧 후퇴해왔다고 거침없이 말해도 되는지는 의문이다. 민중자치의 조건을 두고도, “참다운 민주주의의 성립에 무엇보다도 필요한 것은 민중이 주체적인 삶을 영위할 수 있는 자립과 자치의 조건이다. 요컨대 노예의 삶을 강제당하지 않기 위한 근본적인 조건을 갖추어야 한다”(71면)라는 온당한 주장은 민중이 경제성장의 과실을 일부라도 차지할 현실적 필요성으로 이어질 법도 하건만, 그는 “이런 각도에서 볼 때, 사람들이 흔히 믿고 있는 것과는 달리, 경제성장은 민주주의의 발전에 조금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할 수 있다”(같은 곳)고 단언하는 쪽을 선택한다. 그리고 이런 극단적인 판정에 대해 어떠한 사실점검이나 단서조항도 없이, “경제성장은 자본주의적 사회관계의 심화·확대를 의미하는 것이며, 따라서 그것은 갈수록 민중의 자치·자립의 역량을 근원적으로 훼손하고, 불평등한 사회적 관계를 끝없이 확대재생산한다”(71~72면)는 원론에 호소할 뿐이다.
그밖에도 예컨대 우리나라 전통마을의 ‘민주주의적 생활방식’에 관해 그가 인용하는 보고(73면)가 얼마나 충실한 것인지, 또 거기 적시된 특징들이 사실에 부합하더라도 그것은 지난날 농촌공동체의 비민주적·성차별적 요소들과 연동된 것이 아닌지 등, 따져볼 문제가 적지 않다. 하지만 정작 중요한 것은, 무릇 어떤 담론이건 그것이 적합한 차원을 벗어나면 무리한 이야기가 되기 십상인데, 김종철의 글에서는 그러한 ‘차원의 혼동’이 거듭 일어난다는 점이다.
예컨대, “경제성장은 현재의 사회경제적 격차를 토대로 해서만 성립될 수 있는 것이며, 성장의 결과는 기왕의 불평등을 해소하거나 완화시키기는커녕 그 불평등구조를 온존·심화시키는 데 기여할 뿐이다. 그리고 다시금 그러한 불평등구조는 계속적인 성장의 토대가 되는 것이다”(77면)라는 대목이 그렇다. 이는 자본주의 세계경제의 작동원리라는 높은 추상수준의 담론으로서는 타당하지만-적어도 나 자신은 타당하다고 동의하지만-자본주의체제하의 특정 시기 특정 지역에서의 불평등 해소 또는 완화 가능성이라는 좀더 낮은 차원으로 옮겨가는 순간 독단적인 주장에 불과해지고 만다. 아니, ‘성장의 토대’라는 측면에서도, 아무리 자본주의체제라 해도 사회경제적 격차가 클수록 반드시 성장에 유리한 것은 아니며 불평등구조의 일정한 완화가 성장을 돕는 일이 얼마든지
- 그리고 당연한 이야기지만, “구체적인 과제를 놓고 근대에 적응하는 일과 근대극복의 비전을 실현해가는 일이 어떻게 결합될지는 우리가 사안별로 점검도 하고 새로운 방안도 개발”해야 한다고 덧붙였다(백낙청-조효제 대화 「87년체제의 극복과 변혁적 중도주의」, 『창작과비평』 2008년 봄호 125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