촌평

 

박형규 회고록 『나의 믿음은 길 위에 있다』, 창비 2010

기묘하게 일하시는 하나님을 따라

 

 

김정남 金正男

전 청와대 교육문화사회수석

 

 

“저 이름 없는/풀포기 아래/돌멩이 밑에/잠 못 이루며/흐느끼는/귀뚜라미 울음.”(민영 「수유리 2」) 시인 민영(閔暎)이 4·19혁명을 읊었던 노래다. 4·19혁명을 노래한 시 가운데 내가 가장 좋아해서 외우고 있는 시다. 거창하거나 큰 목소리가 아니어서 좋고, 아는 척 아니해서 좋다. 4·19혁명을 이렇게 간결한 시어로 정리했다는 것이 놀랍다.

박형규(朴炯圭) 목사의 회고록 『나의 믿음은 길 위에 있다』(신홍범 정리)를 읽으면서 언뜻 이 시가 떠올랐다. 우리는 흔히 드러난 사건만을 기억한다. 사람도 지금 우리 앞에 서 있는 모습만이 전부인 것처럼 생각한다. 그러나 하나의 사건이 생기고, 그것이 모여 역사가 되기까지는 우리가 몰랐던 일들이 그 뒤에 켜켜이 쌓여 있게 마련이다. 한 사람이 그 이름으로 우리 앞에 서기까지 얼마나 많은 사연과 곡절이 있었는지 우리는 모른다.

한국 기독교회가 여기까지 오기에는, 박형규 목사가 우리 앞에 저렇게 ‘백제의 미소’로 서 있기까지에는 얼마나 ‘잠 못 이루며 흐느끼는 귀뚜라미 울음’이 ‘저 이름 없는 풀포기 아래 돌멩이 밑에’ 있었는지를 이 책은 낮은 목소리로 찬찬히 들려주고 있다. 나름대로는 박형규 목사가 살아온 역정을 잘 알고 있노라 생각해왔던 나한테도 이 책은 아, 그랬었구나! 하는 감탄을 거듭 자아내게 했다.

신·구 교회를 막론하고, 1970년대 초반에 한국 기독교회가 민주화투쟁이라는 현실 역사 한가운데 그 모습을 드러냈을 때, 그것은 분명 천군만마의 구원이었지만, 그러나 많은 사람들에게는 뜻밖이었다. 거기에 박형규 목사가 있었지만, 우리에겐 생소했다. 이 책은 그때 왜 박형규 목사가 거기 있었는지, 그의 그 이후의 삶이 어떻게 전개되었는지를 보여준다.

어쩌면 그에게 성직자의 길은 피할 수 없는 운명이었던 것 같다. 어머니가 그를 낳았을 때의 이적(異蹟)이 그로 하여금 목사의 길을 예정케 했다. 목사 안수를 받을 때도 그렇게 기쁘지만은 않았던 그에게 1년 뒤에 일어난 4·19혁명은 삶의 진로를 바꾸어놓았다. 그때까지의 자신의 삶을 그는 “강도 만난 사람을 외면하고 지나갔던 위선자”(99면)였다고 고백한다. 4·19는 과연 “암운을 뚫고 터진 눈부신 전광(電光)”(101면, 김재준 목사의 말)이었다. 일제의 문화정책 이후 초창기 한국 기독교의 민족주의적·현실참여적 모습을 버린 채 기복신앙에 안주해온 교계에서 그는 “교회를 교회 되게 하는 일”(102면)에 자신을 바치기로 결심한다.

이로부터 그의 고난에 찬 행진은 계속된다. 1964년 한일회담 반대투쟁에 참여한 뒤 교회갱신운동을 벌이는가 하면, 한국기독학생회 총무를 맡아서는 이제까지의 ‘한국의 복음화’라는 구호와 목표를 ‘기독교의 한국화’로 바꾸는 일대 작업을 실험해나간다. 도시문제에 발을 들여놓고서는 ‘교회의 선교’에서 ‘하나님의 선교’로 나아갔다. 지금까지의 선교가 개인의 구원을 중심으로 하는 교회의 선교였다면, 이제부터는 그 주체가 하나님 자신이 되고 하나님의 피조물인 사회 전체의 구원, 즉 정치·사회·경제 등 총체적 구원을 목적으로 하는 선교로 나아간다.

그가 가는 곳, 그가 맡은 모든 직분에서 그는 하나님의 선교를 위해 합당한 조직을 만들거나 확대하고, 새로운 일을 시작한다. NCCK인권위원장이 되어서는 『인권소식』을 만들어 언론이 없던 그 시절, 교회가 언론의 역할까지 담당했다. 그가 일련의 선교활동에서 최종적으로 확인하고 깨달은 것은 “선교와 정치가 분리될 수 없다는 것”, “자유가 없는 곳에서는 선교의 자유도 없고, 이웃사랑도 할 수 없다는 것”, “정치적 투쟁 없이는 자유를 얻을 수 없다는 확신”(207면)이었다.

일찍이 카를 바르트, 본회퍼, 불트만, 니묄러를 만나면서 사회와 역사에 대해 고민하는 크리스천의 길을 걷게 되었다면, 이제 박형규 목사는 대한민국의 정치적·경제적 현실을 끌어안고 몸부림치게 되었다. 그러한 고뇌는 엄청난 박해와 수난으로 되돌아왔다. 그는 여섯차례나 투옥되었다. 이미 지나가버린 사건이 어느날 갑자기 국가변란 사건으로 둔갑되어 그를 옭아넣기도 하고, 학생들과 함께 휩쓸려 구속되기도 했다. ‘내가 나의 돈을 횡령했다’는 황당한 죄목으로 형사소추를 당하는 기상천외의 일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기독교 목사로서 감옥에 가는 것은 성경적으로 보면 당연하다. 구약시대부터 예언자들은 항상 감옥 출입하는 것을 당연한 일로 보아왔다. 원래 한국에 들어온 기독교도 역사에 참여하는 종교였다’(109면)고 말하면서, 그 수난과 박해를 감수했다. 감옥생활도 “나가면 더 좋고, 못 나가도 좋고”(260면)라는 마음가짐으로 잘도 버텨냈다.

그러나 뭐니뭐니 해도 그가 받은 시련 가운데 가장 혹독했던 것은 1983년의 예배방해로부터 시작해 장장 6년간의 노상예배로 이어진 제일교회 박해사건이었다. 박형규 목사는 이 과정에서 60여시간에 걸친 감금과 살해위협을 겪었으며 백주의 테러로 생명이 위태롭게 된 일도 있었다. 1972년 11월 26일, 제일교회에서 열린 박형규 목사의 임직식에 온 김재준 목사는 “목사는 강단에서 죽을 각오를 해야 한다, 순교를 각오해야 한다, 죽음을 각오하고 진리와 교회를 지켜야 한다”(210면)고 설교했다. 예감이 있어서 그런 말을 했는지 아니면 말이 씨가 되었는지 아무튼 어려운 시련을 너무나 오래 겪었다.

제일교회 근처에서 신자들과 함께 모여 중부경찰서 앞으로 예배드리러 가는 ‘정의와 평화를 위한 십자가 행진’을 하면서도 노상예배는 끈질기게 계속되었다. 어느 독일 목사의 말대로 제일교회는 하늘이 천장이고, 벽이 없어 온 세계로 열려 있는, 과연 세계에서 제일 큰 교회가 되었다. 그곳은 하나의 교회를 넘어 시대의 아픔을 함께 나누고자 하는 사람들의 광장이었으며 민주화운동의 현장이었다. 박해를 받으면서도 그것이 기쁨이 되는 신앙의 신비가 박형규 목사와 그를 따르는 신자들로 하여금 그 고통을 견뎌낼 수 있게 했다. 마침내 비폭력이 폭력을 이긴 것이다.

그는 한번도 자신을 내세운 일이 없었지만, 남이 자신을 끌어들인 것 또한 원망하지 않았다. 억울한 일로 감옥에 갇혀도 가시밭에 걸린 양떼와 함께 있으니 보람된 일로 여겼고, 민청학련 사건 때는 “학생들보다 가벼운 죄가 아닌 더 무거운 죄를 내려주기 바란다”(256면)고 최후진술을 했다. ‘내가 그들을 감옥에 데려간 것이 아니라, 그들이 나를 끌고 갔다. (…) 학생들, 즉 어린 양들이 좁은 문으로 들어갑시다 하고 우리를 불렀지만 목자나 큰 양들은 같이 가려고 하지 않았다. 그래도 어린 양들이 가겠다고 하기 때문에 목자는 주저하면서 그들의 뒤를 따른 것뿐’(1975.2.23 출옥환영예배에서)이라고 겸손해했다. 박형규 목사는 자신을 ‘질그릇’에 비유하곤 하는데, 이는 김수환 추기경이 ‘옹기’라는 아호를 가진 것에 견줄 만한 일이다. 그는 또한 그 자신이 “하나님의 발길에 차인 사람”이란 말을 좋아하는데, 하나님의 발길에 차여서, 떠밀려서 무슨 일을 했을 뿐, 자신의 의지로 한 일은 아무것도 없다는 겸양의 말이다. 크리스천이 아니더라도 이 책을 읽는 독자들은 1973년의 남산 야외음악당 부활절 예배사건을 비롯, 박형규 목사가 얽혀든 사건들을 보면서 ‘기묘하게 일하시는 하나님’을 실감할 것이다.

이 책은 박형규 목사가 서문에서 밝힌 것처럼 그 자신이 원해서 씌어진 것이 아니다. 어느 의미에서 이 책은 일생을 하나님의 선교와 한국 민주화투쟁에 바친 박형규 목사에게 우리 사회가 바치는 경의(敬意)의 표현이자 작은 보답이라 할 수 있다. 이 책은 ‘정리’라는 말로는 부족한, 처음부터 끝까지 한 사람에 의해 씌어진 ‘저작’으로, 몇년에 걸친 작업 끝에 완성되었다. 읽으면서 그 정성과 노고를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박형규 목사가 1983년 8월, 캐나다 밴쿠버에서 열린 세계교회협의회(WCC) 제6차 총회에서 주제강연한 육성을 인용하고 싶다. “영원한 생명은 죽음을 통해 온다. 축복은 가난을 통해 오고 부활은 죽음에서부터 온다. 힘없는 사람만이 죽음의 세력을 극복한다. (…) 이것이 생명의 역설이다.”(40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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