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 갈림길에 선 한국 시와 시비평
기억과 자연, 그 지층 속으로
나희덕 羅喜德
시인, 조선대 문예창작학과 교수. 시집 『어두워진다는 것』 『사라진 손바닥』, 시론집 『보랏빛은 어디서 오는가』 등이 있음. rhd66@hanmail.net
서정시에 호출된 ‘기억’과 ‘자연’
오늘의 서정시에 ‘기억’과 ‘자연’이 범람하는 현상을 두고 우려하는 목소리들이 적지 않다. 그런 편향이 불러올 소재주의와 매너리즘의 위험은 물론이고, 과거의 기억이나 가상적 자연의 추구가 현실성을 결여한 채 사적인 영역으로 침잠하는 증표라는 것이다. “시인들이 현실과의 유추적 연관보다는 지나간 시간에 대한 남다른 ‘기억’으로 탈주하고 나아가 그 ‘기억’과의 접점을 통해서만 사물들을 재구성함으로써 현실로부터 이중의 이격(離隔)을 시도하고 있다”1는 유성호(柳成浩)의 비판이나, “낭만적인 환상과 욕망에 의해 재구성된 자연, 현실의 외부인이나 여행자의 시선으로 포착하는 ‘풍경’으로서의 자연, 서정적인 감흥과 동화(同化)의 대상으로서의 자연, 현실과 삶의 고통을 상쇄해주고 치유해주는 완충제로서의 자연은 이제 그 역할이 만료되었다”2는 김수이(金壽伊)의 진단은 이러한 맥락에서 나온 것이다.
물론 이런 비판이 서정시에서 ‘기억’과 ‘자연’이 가지는 중요성을 부정하거나 그것의 과잉 자체를 문제삼고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시가 지나간 시간과 공간을 수용하는 복잡한 우회로를 감안한다면, ‘기억’과 ‘자연’의 빈번한 채택이 곧 현실의 결여를 낳는다고 단언하기는 어렵다. 문제는 오히려 ‘기억’과 ‘자연’에 대한 제대로 된 되새김질을 찾아보기 어렵다는 데 있다. 서정시의 노화(老化)를 막기 위해서라도 ‘기억’과 ‘자연’이 현실과 살아있는 관계를 맺도록 해야 한다는 데 동의하지 않을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런데 앞서 말한 위험을 인지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왜 시인들은 ‘기억’과 ‘자연’을 서정시의 주된 질료로 삼을 수밖에 없는 것일까. 그 이유는 우선 서정시의 장르적 특성에서 찾을 수 있다. 흔히 서정시의 시간을 ‘영원한 현재’라고 부르듯, 서정시는 연속적이고 서사적인 시간인 크로노스(chronos)보다는 내적인 체험의 통일성을 느끼는 순간인 카이로스(kairos)와 관계한다. ‘시적 현현’이라고 부르는 순간에는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경계 없이 함께 포섭되며, 따라서 기억의 호출은 불가피하다. 그리고 이 공간화된 시간 속으로 호출된 기억은 과거에 머물러 있지 않고 현재적 경험으로 재생된다.
그렇다 해도 이 시대의 서정적 주체가 느낄 수 있는 세계와의 동일성은 매우 제한적이다. “차이를 받아들임으로써만 차이를 폭로하고 성찰하며, 동시에 자기동일성을 유지할 수 있는”3주체의 혼종성과 양가성을 최현식(崔賢植)은 ‘갈라진 혀’에 비유하기도 했다. 이제 유기적으로 통합된 세계는 사라지고, 그나마 가능한 것은 디스토피아의 불안을 파편화된 형태로 드러내거나 그 균열을 메우기 위해 유토피아적 지향을 모색하는 일이다. ‘바깥’이란 없다고 하면서도 끊임없이 ‘바깥’을 꿈꾸는 모순된 욕망, 그것이 오늘날 서정시인들의 존재기반이다.
서정시에서 그 ‘바깥’의 대표형으로 제시되곤 하는 것이 바로 ‘자연’이다. 그러나 시에 ‘자연’이 호출되는 것은 낭만적 동일화의 욕망보다는 문명적 삶을 극복하려는 본능이나 의지와 관련이 깊다. 반영하거나 재현해야 할 조화로운 현실이 더이상 존재하지 않을 때, 시는 그러한 결핍을 ‘기억’과 ‘자연’을 통해 역상(逆像)으로나마 비추기 때문이다. 따라서 서정시가 현실을 직접적으로 반영하거나 비판하지 않는다 해도 이미 그 속에는 현실에 대한 일정한 태도가 반영되어 있는 셈이다. “시인들이 기억작용을 통하여 ‘삶’의 재생을 꿈꿀 때 그것은 현실에 대한 우회적인 발언을 위해서가 아니라 그들로서는 진정한 작업을 위해서 거의 유일하게 주어져 있는 가능성을 붙잡으려는 노력이라고 할 수 있고, 그것은 무엇보다도 이 기막힌 생산지상주의, 상품소비주의 시대에 대한 비판적인 현실인식을 전제로 하고 있는 작업이라는 것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4는 김종철(金鍾哲)의 말도 기억이나 자연의 재생이 현실에 대한 비판적 기능과 연결되어 있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이 글에서 젊은 서정시인들의 시세계를 ‘기억’과 ‘자연’을 중심으로 살펴보려는 것도 그런 가능성을 타진해보기 위해서다. 여기서 다룰 유홍준, 김태정, 김선우, 문태준의 시에서도 ‘기억’과 ‘자연’은 중요한 기반을 이루고 있다. 그래서인지 서정적 전통에 대한 친숙감과 함께 낡고 오래된 세계에 대한 지향이 두드러져 보인다. 실제로 이 시인들은 동네 무당의 주술적 세계나 당숙모의 전근대적 슬픔이나 어머니의 다산적 풍요로움을 자신의 삶보다 더 생생하게 재현해내는 데 주력한다. 왜 그들은 자신의 ‘젊음’을 발산하는 일보다 ‘늙음’을 빌려오는 일에 더 큰 매력을 느끼는 것일까? 그러나 그것을 퇴행이나 도피라고 손쉽게 말해버리기에는 그들의 시에 나타난 ‘기억’과 ‘자연’의 지층은 복잡하다. 얼핏 서정시의 익숙한 영역에 거주하는 것처럼 보이는 그들에게서 수동성을 넘어선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하려는 것이 이 글을 쓰게 된 동기라고 할 수 있다. 그러기 위해 그 지층 속으로 좀더 내려가보자.
기억의 검은 혓바닥
유홍준(劉烘埈)의 『喪家에 모인 구두들』(실천문학사 2004)은 아름다움보다는 치욕을, 삶보다는 죽음을 곱씹는 데 주로 바쳐지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그는 기억을 ‘즐기고’ 있다기보다는 기억과 ‘싸우고’ 있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불우한 가족사나 죽음의 이미지로 가득 찬 기억들은 그에게 고통스러운 유산에 지나지 않는다.
“행복이란 이런 것/죽음 곁에서/능청스러운 것/죽음을 집 안으로 가득 끌어들이는 것//어머니도 예수님도/귀머거리 시인도/우리 집에 와서 다 죽었다”(「우리 집에 와서 다 죽었다」)에서처럼 살림의 공간인 집조차 죽음에 점령당한 지 오래다. 삶은 이미 죽음과의 동거인 것이다. 그런가 하면 「喪家에 모인 구두들」에서는 “젠장, 구두가 구두를/짓밟는 게 삶이다/밟히지 않는 건 亡者의 신발뿐이다”라며 치욕이 삶의 기본조건임을 말하고 있다. 이처럼 유홍준의 시는 일상 속에 미만(彌滿)한 죽음과 치욕을 다루고 있지만, 그 근원적인 뿌리를 명확하게 드러내지는 않는다.
예를 들어, 방울토마토를 먹는 저녁의 평화는 느닷없이 “붉은 시간의 丸들이 울부짖으며 저녁을 쥐어뜯으면/우리는 모두 접시를 놓치고 비명을 지”르는(「방울토마토」) 악몽으로 번지고 만다. 그 악몽의 기억으로부터 끊임없이 달아나려는 안간힘, 그 질주가 역설적이게도 유홍준의 시를 계속 기억에 매달리게 만든다. “저녁의 검은 혓바닥 위로 나는 질주한다”는 전언을 다음 시에서는 좀더 구체적인 이미지들을 통해 만나게 된다.
아버지,어머니자루를끌고다녔지,너덜너덜옆구리터진어머니자루,아버지패대기치던어머니자루,줄줄눈물이새던어머니자루,길바닥에주저앉아터진옆구리를움켜쥐던어머니자루,어린내가아버지바짓가랑이를잡고매달리자놔둬라,놔둬라머리카락을쓸던어머니자루,입술에피가나던어머니자루,눈탱이가퍼렇던어머니자루,고구마로만배를채우던어머니자루,몰래들어내던참깨자루나를꼭끌어안고죽어버리자던자루,넝마같이덕지덕지덧댄자루,장터에서못본척외면한자루,꾸깃꾸깃자궁에서돈을꺼내던자루,자루에서태어난나는자루를까마득히잊고사는자루,자루가무언지도모르는,자루를낳은자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