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론

 

기억의 힘

박형준론

 

 

강계숙 姜桂淑

문학평론가, 연세대 강사. 제9회 창비신인평론상으로 등단. 평론으로 「환(幻)의 순간, 초월의 문턱」 「‘쿨’의 시학」등이 있음. sumomo@empal.com

 

 

기억의 힘은 위대합니다. 오, 신이여. 그것은 두려운 것, 무한히 깊고 다양한 것입니다. 그것은 나의 정신이며 나 자신입니다.오, 신이여. 그러면 나는 도대체 누구입니까? 나는 어떤 본성의 존재입니까? (아우구스티누스 『고백록』)

 

 

신발

 

명절날 아버지가 사다주신 신발을 개울물에 떠내려보낸 뒤 생의 모든 신발은 처음 것의 대용품이었다고 서정주는 「신발」이라는 시편에서 술회한 바 있다. 잃어버려서는 안되나 상실의 운명에서 지켜내지 못한 이 최초의 신발은 어떤 보충물로도 대신할 수 없는, 존재의 순결한 시원(始原)이자 기억 저편으로 넘길 수 없는 자기 기원의 상징일 것이다.그리고 예순이 되어도 대용품으로서만 신발을 사신는 습관은 시초의 신성함을 훼손하지 않으면서 대체된 이미지(바꿔신은 신발)를 통해 그것의 실제성을 회상하고 향유하는 일종의 기억술이자 기원을 향한 열망을 스스로 확인하고 지속하는 상징적 행위에 해당한다. 대용품을 통한 이러한 기억의 각인은 ‘첫’이라는 말에 포획된 시간이 거듭되는 상기를 필요로 할 만큼 자아 서사의 보고(寶庫)임을 암시하며, 동시에 순수한 과거를 망각하지 않는 한 존재의 결핍과 결여는 충족 가능하다는 전언을 품고 있다. 그런데 박형준(朴瑩浚)의 「묘비명(墓碑銘)」(『빵냄새를 풍기는 거울』, 창작과비평사 1997. 이하 『거울』로 표기)에 나오는 다음의 신발을 보라.

 

유별나게 긴 다리를 타고난 사내는

돌아다니느라 인생을 허비했다

걷지 않고서는 사는 게 무의미했던

사내가 신었던 신발들은 추상적이 되어

길 가장자리에 버려지곤 했다, 시간이 흘러

그 속에 흙이 채워지고 풀씨가 날아와

작은 무덤이 되어 가느다란 꽃을 피웠다

허공에 주인의 발바닥을 거꾸로 들어올려

이곳의 행적을 기록했다,

신발들은 그렇게 잊혀지곤 했다

 

기억이란 끔찍한 물질이다

망각되기 위해 버려진 신발들이

사실은 나를 신고 다녔음을 깨닫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는다, 맨발은 금방 망각을 그리워한다

―「墓碑銘」 전문

 

삶의 행적을 기록한 기호로서의 신발, 그것은 시간이 집적된 퇴적물이라는 이유 때문에 길가에 버려져 있다. 무덤을 예시함으로써 죽음의 아우라마저 발산하는 이 신발은 망각의 심연으로 사라져야 할, 마땅히 그렇게 되어야만 할 대상이다. 원본의 복사물일지라도 기억의 보존을 위해 전유되는 서정주의 신발과 달리 「묘비명」의 신발은 비정한 결말을 피할 도리가 없다. 대체 왜 그런가? 답은 다음 구절에 집약되어 있다.“기억이란 끔찍한 물질이다.” 신발이 기억의 저장고이고, 저장된 내용이 ‘끔찍한’ 것들이라면, 그것을 신고 다니는 일은 힘겨운 노역일 뿐이다. 그러니 사내의 신발은 보존될 이유도, 가치도 없다. 기억에 대한 총체적이고 전면적인 저 음울한 부정이 계속되는 한 신발은 잊혀져야 할 봉분의 운명을 벗어날 수 없는 것이다.

 

 

또는, 신발들

 

기억에 대한 맹렬한 거부는 90년대 많은 젊은 시인들이 보여준 인식상의 공통된 특징이자 중심 화두였다.“추억을 버려야 살 것 같다”(이윤학 「沙金」, 『먼지의 집』, 문학과지성사 1992)는 절망적 토로나,“내 악몽의 산실, 저 처마 밑에서는 장대를 함부로 저어서는 안된다/기억의 방울들이 밤송이처럼 쏟아질지 모르니”(이선영 「기억의 방울」, 『평범에 바치다』, 문학과지성사 1999)라는 쓸쓸한 고백은, 박형준의 경우 “추억이란, 추억이란, 추억이란 크리스마스 캐럴이 어디선가 울렸다/추억이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크리스마스 캐럴」, 『나는 이제 소멸에 대해서 이야기하련다』, 문학과지성사 1994. 이하 『소멸』로 표기)라는 두려운 회의로,“나는 물방울 속 깊이 감춘 그 시절 내 이름을 결코 찾지 않으렵니다. 부르지 않으렵니다”(「물방울의 밑그림」, 『소멸』)라는 절박한 다짐으로 나타났다.

90년대 젊은 시인들이 조로(早老)·자폐·환멸·폐허·소멸·죽음에서 작품활동을 시작하였다는 점을 지적하는 것은 그다지 새롭지 않다. 그리고 이러한 일련의 경향이 혁명적 열기의 급격한 쇠락, 정보화사회로의 본격적 진입 및 소비문화의 확대재생산과 맞물리며 문학의 위기, 특히 시의 몰락을 말하게 된 정황과 연관된다는 진단 또한 익숙하다. 그러나 기억에 대한 강한 부정은 이와는 다른 각도에서 생각할 필요가 있는 듯하다.

기억이란 본질적으로 문화적 기억이다. 자신만의 개별적 체험에 바탕한 과거 인식일지라도 기억은 결코 개인적일 수 없다. 기억이 사회적 연관 속에 성립되고 집단 내의 상호작용을 통해 유지됨을 떠올린다면, 그것은 가장 사적일 때에도 공동체의 축적된 경험과 과거의 유산, 전래된 전통에 의지하여 형성된다. 기억에는 공동의 지식과 경험이 축적되어 있으며, 그것을 바탕으로 개인과 공동체는 스스로를 의미있는 존재로 정립한다. 그러므로 기억에 대한 탐색은 개인과 집단의 정체, 양자의 상호소통과 공동수행의 결과를 묻는 것이다.그렇다면 기억의 총체적 부정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과거의 것, 전통적인 것, 역사적인 것, 민족적인 것 등 집단의 모든 문화적 산물을 향한 부정이자 자기동일성에 대한 주체의 심각한 회의를 뜻한다.

그런 점에서 기억을 향한 한결같은 부정에는 인간을 역사적으로만 감각하고 인식하는 것에 대해 비판하고 반항하려는 무의식적 욕망이 담겨 있다. 역사적 감각을 중시하는 자는 현재를 과거의 전승 속에서 파악하고 기억을 돌이켜봄으로써 현재를 개선하려 한다. 현존의 의미도 그러한 과정을 통해 밝혀지리라 믿는다. 따라서 과거에 대한 사색과 기억의 반추, 망각의 방지가 중요하다. 이에 반해 과거의 기억을 불신하고 그것의 가치를 절하하는 비역사적 감각의 소유자는 과거의 무수한 기억을 현재를 억누르는 족쇄이자 구토를 불러일으키는 대상으로 여긴다. 역사에 대한 맹목적 신뢰가 개인의 삶을 무겁게 만들고 창조력을 소실시킨다는 점을 이들은 예민하게 지각한다.

따라서 기억의 망각을 적극 희망한 90년대 젊은 시인들의 등장은, 한국시의 역사에서 비역사적 감각으로 자기 정체성을 재창조하고자 한 새로운 인간형의 출현에 해당한다. 이들은 기억의 부정을 통해 근대 이후 점증해온 역사적 감각의 과잉을 문제시하고 개인의 개성이 억압되어온 상황에 의문을 제기한다. 스스로의 정체성에, 그리고 그것을 형성하는 모든 사회적 심급에 물음을 던짐으로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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