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론

 

기형도와 1980년대

 

 

유희석 柳熙錫

문학평론가. 현재 미국 블루밍턴 소재 인디애너대학 영문과 방문연구원. 주요 평론으로 「보들레르와 근대」 「李箱과 식민지근대」 「최근 리얼리즘·모더니즘 논쟁에 관하여」 등이 있음. jatw19@netian.com

 

 

1. 시대와 작품의 경계

 

어느 시대든 저변에 꿈틀거리는 뭇사람들의 기세는 어떤 틀에도 딱 맞지 않게 마련이지만, 그런 기세가 가르는 데 일조하는 시대의 경계도 십년이나 백년 단위로 정확히 나눠지지는 않을 것이다. 가령 1979년 10월 26일의 총성에서 시작해 1987년 6월 10일 시민들의 함성으로 끝난다고 할 수 있는 80년대는 함성의 열기로써 5·17 내란을 사법적으로 단죄한 싯점에 주목할 경우 1993년 문민정부의 등장으로 비로소 막을 내린다는 말도 가능하다. 1989년 베를린 장벽 철폐부터 1990년 10월 3일의 공식 통독과 이듬해 소련연방 해체가 국내에 연쇄적으로 끼친 여파를 고려하면 어떨까? 그 충격이 뒤흔든 남한 지식계의 숱한 환멸과 탈주 그리고 도리없는 희망까지를 기억한다면, 어떤 면에서 90년대는 80년대와의 단절이기는커녕 그 연장이었다는 판정도 무리는 아닐 듯싶다. 단적으로 신경숙의 『외딴방』과 황석영의 『오래된 정원』, 올해 제3회 황순원문학상을 수상한 방현석의 중편 「존재의 형식」처럼 80년대의 참모습을 증언한 작품은 90년 이후에야 제대로 씌어지지 않았던가.

이런 맥락에서, 모든 작품이 읽혀지기를 기다리는 텍스트라기보다는 독자의 열성이 따라야만 온전한 향유가 가능한 ‘존재’라고 말할 수 있는 주된 근거도 지난 시간을 현재 삶의 일부로 만드는–그로써 있음직한 미래를 예감케 하는–그 ‘힘’에 있다고 본다. 1960년 3월 13일 경기도 연평리에서 태어나 1989년 3월 7일 새벽에 종로2가 부근 심야극장에서 심장마비로 사망한 기형도(奇亨度) 시의 현재적 의의도 그런 힘에서 나온다고 필자는 믿는다. 그런데 작가의 여린 속살을 작품을 통해 더듬지 않고서는, 역으로 역사의 냉엄한 진실을 외면하고서는 비평의 객관성이나 사심없음도 말짱 빈말임은 누구나 원칙적으로 인정할 수 있겠지만, 85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안개」로 등단한 기형도는 좀 특별한 면이 있는 것 같다. 그것은 시대와 개인의 삼투(渗透)적 진실이라든가 ‘기형도 현상’이라고 부를 만한, 사후에 쏟아진 요절문인에 대한 뜨거운 각광 때문만이 아니다. 80년대 문학에 관한 논의가 간간이 이어지는 근래에도 기형도는 80년대의 시인으로 화제가 되지 않는 듯하고, 타계한 후 쏟아진 비평들을 읽노라면 다분히 세기말적 수사로 분칠된 인상만 남는 것이다. 그럴수록 대중의 관심을 자상하게 분별해볼 필요가 있겠고 작품보다 대중적 인기를 앞세운 비평가의 평가도 다시 생각해볼 일이지만, 중요한 점은 역시 그의 시가 오늘의 현실에 살아 있다는 사실일 것이다.

 

 

2. 80년대의무거움과 비가

 

1980년대를 주름잡은 ‘젊은 시인들’을 헤아릴라치면 고인이 된 해남 출신의 김남주와 노동자시인 박노해가 먼저 떠오른다. 변혁의 전위로서 시를 무기로 삼았으면서도 “나는 어쩔 수 없는 놈인가 구차한 삶을 떠나/밤별이 곱다고 노래할 수 없는 놈인가”(「가엾은 리얼리스트」)라고 나지막이 속내를 실토한 김남주와 프레스에 잘려진 손들이 “기쁨의 손짓으로 살아날 때까지/묻고 또 묻는”(「손 무덤」) 현실을 ‘노동자의 몸’으로 절규한 박노해의 시는 여전히 우리의 가슴을 서늘하게 한다. 90년대 들어 『인간의 시간』(1996)으로 한층 빛을 발한 백무산이나 『인부수첩』(1986) 『우리들의 사랑가』(1991)로 알려진 노동자시인 김해화 또한 80년대 시인이다. 빠진 이름이 더 많음은 말할 것 없고 필자의 독서 부족도 부끄럽지만, 당시 시단에 첫선을 보인 몇몇 얼굴만 떠올려도 최근에 『무언가 찾아올 적엔』을 상재한 하종오를 비롯하여 김사인, 김정환, 김용택, 윤재철, 황지우, 박영근, 곽재구, 최두석, 고(故) 고정희 등이 있으니, 어느덧 문단의 중진이 되어버린 이들의 면면은 그때가 빈곤하지 않았음을 말해준다.

그런데 풍요라고 딱 부러지게 단정하기도 주저된다. “7,80년대의 민중시는 실제로 반성할 대목이 많다. 과연 그 시들 가운데서 좋은 시로 우리 문학사에 남아 독자의 사랑을 받을 시가 몇편이나 될까”1라는 자책이 격류의 세월을 작품으로 올곧게 버틴 신경림 시인의 입에서 나온 것임을 곱씹어보면 더욱이나 그러하다. 80년대 시단이 (신경림 본인이 같은 글에서 그 역사적·사회적 역할을 과소평가해서는 안된다는 전제를 단) 일제시대 카프 시인들과는 비교할 수 없는 많은 작품들을 생산한 것도 분명하다. 그런데 그 시절의 어떤 시인이 후대까지 살아남을 수 있을까를 호언하기 힘든 것은, 소위 예술성과 민중성의 변증법적 성취를 규명하는 것이 그만큼 까다롭고 다른 한편 ‘독자의 사랑’이라는 것이 문학시장에서의 성공과 일치하지 않는 예도 많기 때문이다.

그 점에서 공식 지면으로 겨우 5년 남짓 활동한 기형도의 사후 대중적 이미지가2 그의 시세계에서 가장 눈에 띄는 변주, 즉 절망과 고독, 회한, 사랑과 희망 상실, 죽음의 예감 등에서 형성되고 증폭된다는 것은 짚어봐야 할 문제다. 그것은 굳이 말하자면 ‘모더니즘’과 친연성이 강한 특질들이다. 동시에 세기말 담론으로 묶을 수 있는 그것은 그를 다룬 평자들이 한결같이 화두로 내세운 일종의 개념적 지표이기도 하다. 기형도에 대한 가능한 가장 피상적인 이해로서 퇴폐적이라는 비판을 상정하면서 그의 시세계가 열어놓은 새로운 지평을 “도저한 부정적 세계관”3으로 집약한 김현의 비평적 조사(弔辭)야말로 매너리즘의 진원지라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부정적이냐 긍정적이냐 하는 기준 자체가 시를 읽을 때 본질적인 판단기준은 물론 아니고 망자에 대한 절절한 추모의 염을 담고 있기는 하지만, 이후 성행한(죽음이라는 단어가 감초 역할을 하는) 기형도 비평의 상투성은 사실상 그의 조사가 조장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더 따지고 들어가면 그런 매너리즘은 기형도 자신의 시들에서 시작한다. 좀더 정확히 말하면 ‘도저한 부정’이라는 언설조차 시시하게 만드는 작품을 기형도 스스로가 꺼져가는 체온으로 품었다고 해야 옳을 듯하다.

 

내 얼굴이 한 폭 낯선 풍경화로 보이기

시작한 이후, 나는 主語를 잃고 헤매이는

가지 잘린 늙은 나무가 되었다.

 

가끔씩 숨이 턱턱 막히는 어둠에 체해

반토막 영혼을 뒤틀어 눈을 뜨면

잔인하게 죽어간 붉은 세월이 곱게 접혀 있는

단단한 몸통 위에,

사람아, 사람아 단풍든다.

아아, 노랗게 단풍든다.

–「病」 전문

 

1979년에 기록된 이같은 참경(慘景)이 절절할수록 오히려 우리는 죽음이네 절망이네 하는 비평적 언사의 무기력함을 새삼 확인한다. 그러기에 필자는 5주기 추모문집의 16수, 미발표시 20수를 포함해 도합 97편이 실린 전집을 관통하는 기형도 특유의 감수성에 주목하면서 그런 감수성이 80년대의 시대적 상황과 만나면서 빚어낸 작품다운 작품을 우선하여 논하고자 한다.

기형도가 불과 스무살 나이에 「병(病)」과 같은 시를 남긴 데는 자전적 맥락이 강한 듯하다. 아버지의 중풍으로 인해 어린 나이에 체험한 고아원 생활과 가난의 쓰라림은 단편소설 「영하의 바람」(1979)에 짙게 담겨 있는데, 삶의 바닥모를 고통을 실존적으로 응시하는 지식인의 고뇌는 단편 「겨울의 끝」이나 「환상일지」 등에서도 여실하다. 하지만 당대 현실과 시인 정서의 시적인 균형은 역시 그의 내밀한 가정사를 엿볼 수 있는 7편의 「겨울 판화(版畵)」 연작시를 비롯해 「위험한 가계(家系)·1969」 「폭풍의 언덕」 등에서 제대로 유지된다. 1960,70년대의 일상적 풍경일 뿐만 아니라 80년대 들어 계급적 각성으로 타도하자고 한 배고픔과 빈곤의 현실이 ‘가족시편’에서는 한 개인의–그 자신 일기에 “외로움을 타개해나가는 속에서 스스로 슬기를 얻어나가는 과정”(『기형도 전집』 328면)이라고 적은–내면적 성숙의 일부로 다뤄지는 것이다. 되돌아보면 그 변혁의 시대에서 인간적 자존심을 짓밟는 불평등을 타파하는 데 무수한 시들이 복무했고, 그중에는 지금까지 우리의 심금을 울리는 작품도 있다. 그럼에도 신경림 시인이 「시인이란 무엇인가」에서 적시한 대로, 살아가는 민중의 구체적인 애환보다는 이상(理想)적 추상에 빠지면서 현실의 아픔을 감상적으로 소비한 작품이 상대적으로 많았고 당장 하루하루가 힘에 겨운 독자들의 반응도 그쪽으로 더 쏠렸던 듯하다. 이제 와서 좀더 나은 세계를 꿈꾼 시절의 열망을 폄훼하자는 것은 아니다. 다만, 정치적 폭압의 그늘에서 서러운 일상을 견디는 진정으로 생동하는 인간다움을 실감케 하는 작품이 드물었음은 엄연한 사실이고, 세기가 바뀐 이 순간에도 꿈다운 꿈을 불러일으키는 문학에 대한 목마름을 채워주기 위해 지난 연대의 문학이 안고 있는 한계에 눈감을 수는 없겠다는 뜻이다.

그 점에서도 기형도의 (가장(家長)의 병마나 실직과 함께 찾아오게 마련인) 궁핍의 체험이 한 개인의 가정사로만 한정되지 않는, 80년대를 지배한 ‘공적 정서’의 일부임은 강조되어야 하겠다. 빈한하고 찢겨진

  1. 신경림 시집 『뿔』(창작과비평사 2002)에 수록된 산문 「시인이란 무엇인가」 참조.
  2. 시 인용은 『기형도 전집』(문학과지성사 1999)에 근거한다. 첫시집 『입 속의 검은 잎』(문학과지성사 1989)은 그의 사후에 세상에 선보였다. 이후 『기형도 산문집: 짧은 여행의 기록』(살림 1990), 여러 평문과 기형도 관련 글을 모아놓은 기형도 추모문집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솔 1994)가 연이어 나왔다.
  3. 김현 「영원히 닫힌 빈방의 체험–한 젊은 시인을 위한 진혼가」(『입 속의 검은 잎』 해설) 참조. 기형도 시를 두고 퇴폐적이라는 비판을 상정하는 대목은 당시 문단의 ‘대세’인 현실주의 문학의 도식성을 겨냥한 것으로 짐작된다. 하지만 지금 와서 보면, 김현이 기형도의 시세계를 도저한 부정적 세계관으로 정의한 것 자체가 역설적으로 그같은 현실주의의 기계적 반동(反動)이 아닌가 하는 느낌도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