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 생태정치 확장과 체제전환

 

기후위기 해결, 어디에서 시작할까

 

 

백영경 白英瓊

제주대 사회학과 교수. 저서 『배틀그라운드』 『고독한 나에서 함께하는 우리로』 『프랑켄슈타인의 일상』(이상 공저), 역서 『유토피스틱스』 등이 있음. paix@jejunu.ac.kr

 

 

우리가 알던 세계의 종말

 

지구 곳곳에서 전에 없던 규모의 재난이 잇따르고 있다. 2018년에는 미국 캘리포니아에서, 2019년에는 아마존 밀림에서 화재 소식이 들리더니 호주에서도 대규모 산불이 발생했다. 해를 넘겨 이어진 호주의 산불은 남한 넓이와 맞먹는 면적을 태우고서야 겨우 진화되었다. 시베리아와 동남아에서도 산불이 잦아지고 있으며, 극지방에서는 빙하가 녹아내리고 있다. 각각의 직접적인 원인이 다르다고는 하지만, 변화하는 기후 양상이 자연의 회복력을 감소시키고 있다는 점은 분명하다. 이번 호주 화재가 코알라나 캥거루 같은 유대류의 멸종을 재촉하리라는 예측이 나오는 가운데 이미 지난해, 인간이 유발한 기후변화로 멸종된 첫번째 포유류가 나왔다. 호주 북부 산호초 지역 섬에 서식하던 ‘브램블 케이 멜로미스’라는 이름도 어려운 설치목 동물이다. 해안선에 땅굴을 파고 살던 이 동물은 2009년 이후 자취를 감췄는데, 과학자들은 해수면 상승으로 멸종한 것으로 결론지었다. 한편 작년 스위스의 알프스 산맥 정상에서는 더이상 버티지 못하고 사라져버린 빙하의 죽음을 애도하는 장례식이 열렸다. 90퍼센트의 빙하가 사라져서 알프스 전체가 하얗게 덮인 모습을 이제 볼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말 그대로 지구 곳곳에서 ‘우리가 알던 그대로의 세계’가 종말을 맞는 중이다.

어떤 이들에게 기후변화는 그 자체로 재난이 되기도 한다. 도시의 사무직들은 체감하는 정도가 다르겠지만 땅과 바다가 생업의 무대인 사람들의 사정은 심각하다. 심던 작물이 더이상 자라지 않고 전에 없던 병충해에 시달리며 수온의 변화로 물속 생태계가 바뀌어 곤란해졌다는 사연이 도처에서 들린다. 한때 기후변화는 온실가스로 인한 지구온난화로 이해되곤 했지만 종잡을 수 없는 이상기후가 반복되며 대중들도 이제는 기후변화가 단지 기온 상승만이 아님을 잘 안다. 중국 고비사막에는 비가 자주 내려서 풀이 자라기 시작했다니 반드시 나쁜 점만 있는 건 아니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우리가 알던 세계의 종말이란 많은 사람들에게 최소한 고단한 적응을 요구하고 있으며, 더 나쁜 경우에는 수몰이나 기근, 전쟁 속에서 기후난민으로 전락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야기한다.

코로나19, 중국발 신종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의 유행은 언뜻 기후변화와 무관한 듯하지만, 알고 보면 결코 그렇지 않다. 2002년 사스(SARS), 2009년 신종플루, 2012년 메르스(MERS, 중동호흡기증후군), 그리고 2019년의 코로나19는 모두 바이러스가 야생동물로부터 사람에게 전이된 것으로 추정된다. 기후변화와 개발의 광풍 속에 야생동물의 서식지가 파괴되고 개체수가 급감하자, 이전에 야생동물을 거처로 하던 바이러스들은 이제 밀집생활을 하는 인간이나 가축을 새로운 숙주로 삼기 시작했다. 미세먼지의 경우에도 물론 오염원의 증가가 가장 큰 원인이지만, 기후변화로 인해 북극의 얼음면적이 감소하면서 북극과 동북아 지역의 기압 배치에 이상이 유발되고, 위도 간 온도차가 낮아져서 계절풍이 약화되는 것도 상황을 악화시키는 요인이다. 물론 기후변화 가운데 어느 만큼이 인간의 활동에 의해 촉발된 것인지 정확히 산정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인간에게 책임이 있는 변화들로 인해 공기, 물, 흙, 먹거리, 날씨 등 인간의 일상을 지탱하고 거기에 영향을 주는 모든 요소가 미래를 장담할 수 없는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기후위기의 공통성과 한계

 

2018년 10월 기후변화에 관한 정부 간 협의체(IPCC)는 「지구온난화 1.5℃ 특별보고서」에서 지구 평균온도의 상승이 인간과 자연에 미치는 영향을 분석하면서, 지구온난화가 예상보다 빠른 속도로 진행되고 있음을 경고했다. 또한 지구 평균온도가 2도 상승하는 것과 1.5도 상승하는 것 사이에는 매우 큰 차이가 예상되기 때문에 억제 목표를 빠리협정의 ‘2도 아래’보다 ‘1.5도 아래’로 더 엄격하게 두어야 하고 이를 위해서는 온실가스 배출량을 지금보다 더 빠른 속도로 감축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강조했다. 한마디로 기후변화에 대한 대응을 지금대로 하다가는 인류의 미래에 치명적인 결과를 낳을 수 있다는 내용이다.1

IPCC의 보고서는 전세계적으로 기후행동을 이끌어내는 결과를 낳았다. 중립적으로 들리는 기후변화라는 용어 대신 기후위기, 기후재난, 혹은 기후비상사태로 바꿔 불러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왔으며, 영국에서는 2019년부터 ‘멸종저항’(extinction rebellion) 시위가 이어지고 있다. 그레타 툰베리(Greta Thunberg)를 비롯하여 세계 곳곳에서 청소년들은 기후위기 결석시위를 벌이고 있고, 한국에서도 ‘청소년 기후행동’이 결성되어 학교파업 시위를 계속해나가고 있다. 이들은 기후변화로 인해 인간 역시 멸종위기에 처했으며, ‘멸종위기 청소년’이라고 할 수 있는 자신들에게 학교는 무의미하다며 정치권과 기성세대의 행동을 촉구한다. 이들에게 한국은 온실가스 배출량 세계 7위, 1인당 배출량 세계 4위의 ‘기후악당’이다. 그런데도 정부는 여전히 석탄화력발전소 수출에 대해 재정지원을 하고 있고, 온실가스 제거량과 배출량을 상쇄시켜 2050년까지 ‘탄소중립’ 상태로 만드는 계획을 포기해 국내외의 비판에 직면해 있다.

정부의 미온적 대응과는 반대로, 위기에 공감하는 이들의 긴박한 연대도 등장했다. 작년에는 환경단체뿐 아니라 노동조합, 과학자, 일반 시민 등 사회 각계에서 모인 ‘기후위기 비상행동’이 결성되어 9월에 처음으로 혜화역부터 종각역까지 행진을 펼쳤다. 이들은 당면한 기후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비상행동의 필요성을 널리 알리면서 시민들의 연대를 촉구하는 한편, 정부에 기후위기 상황 선포를 요구했다. 하지만 아무리 비상상황임을 강조한다고 해도 구체적인 맥락에서 어떤 연대를 이뤄낼 것인지는 쉬운 문제가 아니다. 예를 들어 탈핵은 이제껏 한국의 환경운동에서 중요한 지향 가운데 하나였지만, 지금 상황에서 탈핵을 부각하는 것은 연대에 방해가 되기도 한다. 기후위기가 원전의 필요성을 정당화하는 논리로 이용되거나 화석연료를 대체할 충분한 재생에너지를 확보할 때까지 탈핵을 유보하자는 입장이 제시되기도 하는 상황에서, 위기 진단에 동의한다는 이유만으로 원전 찬성론자들과 연대하는 게 옳은지가 비상행동이 내부적으로 고민에 처한 문제다. 사실 기후위기는 산업계나 보험업계를 포함한 경제계 전반에서도 절실한 문제로 인식할 만큼 문제의식을 공유하는 집단의 외연이 매우 넓다. 물론 이들이 생각하는 위기란 앞으로 닥칠 화석에너지 규제나 이상기후 및 불확실성 증대에 따른 보험업계의 손실 등과 관련되기에 극복하기 어려운 인식의 차이가 존재하지만 말이다.

기후위기라는 문제의식 속에서 새로운 정치적 구호이자 성장전략으로 떠오르고 있는 ‘그린뉴딜’의 경우를 보자. 그린뉴딜은 미국 대선에서 중요한 쟁점 가운데 하나이며, 한국에서도 제21대 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고 정의당과 녹색당이 기후위기에 대한 대응으로 내세우고 있다.2 하지만 내놓고 기후위기를 부정하거나 탄소배출 감소에 반대하는 세력은 제외하더라도, 그린뉴딜 정책이라는 동일한 명칭 속에 매우 다양한 계보와 지향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공동 행동이 쉽지만은 않을 것임을 예측하게 한다.

아무리 공통의 위기임을 인식하고 강조한다 해도 대응방안에서 극복하기 어려운 차이들이 생겨나는 이유는 기후위기라는 것이 단지 기후만의 위기가 아니라는 점이 종종 간과되기 때문이다. 현재를 살아가는 인간 모두에게 결코 똑같이 경험되지 않는다는 차원에서 기후위기는 극히 정치적인 문제일 수밖에 없으며, 사회경제적인 체제를 빼고 위기의 원인을 분석할 수도 없다. 그러니 막연한 인류 공멸의 위기의식만으로는 행동은 고사하고 상황인식에 대한 합의조차 이끌어내기 어려운 것이다.

기후위기가 우리가 알던 세계의 종말로서의 기후변화와 그것이 초래하는 복합적인 위기상황을 의미하는 것이라면 해결을 위한 노력과 투쟁 역시 다양한 층위에서 요구될 수밖에 없다. 그린뉴딜같이 사회구조를 변혁하는 정치를 통해 정책적인 변화를 이끌어내는 차원도 필요할 것이고, 플라스틱처럼 일상적으로 사용되는 물질에 대해 그 기원은 물론 폐기 처리에까지 관심을 가지고 생활방식을 바꿔가는 당장의 실천도 필요할 것이며, 더 나아가 근본적으로 몸과 마음 자체를 바꿔나가는 수준까지 포괄할 필요가 있다. 그중에서 이 글은 기후위기와 관련되어 나오는 담론들을 살펴보고, 생태전환의 관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토착민의 투쟁을 조명하면서 위기해결에 어떤 관점이 필요한지 모색해보려고 한다.

 

 

인류세라는 진단명

 

기후위기는 단지 기후만의 문제가 아니지만, 그 복잡함을 너무 강조하다보면 대중이 일반적으로 실감하는 위기와는 논의의 결이 달라지는 문제가 있다. 눈앞에서 일어나고 있는 기후변화의 문제 상황에 위기의식을 갖도록 하는 기후위기론의 강점마저 잃게 될 우려가 있는 것이다. 아마존 화재의 예를 들어보자. 불이 번지는 데 기후변화로 인해 고온건조해진 날씨가 큰 몫을 했을지는 모르지만, 일차적인 원인은 숲을 없애고 농경지나 목초지를 얻기 위한 목적으로 저질러진 고의적 방화에 있다. 단기간에 넓은 목초지가 필요해진 이유는 홍콩 등 아시아 지역에서 쇠고기 수요가 증가했기 때문이고, 더 많은 농지가 필요해진 것은 중국이 미국과 갈등을 빚으면서 미국 대신 브라질에서 콩을 수입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남미의 트럼프’로 불리는 자이르 보우소나루(Jair Bolsonaro) 브라질 대통령은 이에 발맞춰 취임하자마자 환경보호구역 지정을 해제하고 국립공원을 민영화하며, 아마존강에 수력발전소와 다리를 건설하고, 지역 토착민의 권리를 탄압하면서 각종 환경규제의 빗장을 푸는 등 개발정책을 밀어붙였다.

기후위기를 해결하려면 이렇듯 아마존 화재와 기후변화 사이의 단순하지 않은 관계를 살피면서, 화재에 기여하는 요인들이 무엇인지 따져 물어야 마땅하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탄소배출량의 증가니 인간의 탐욕이니 하는 식으로 자신이 관심 있는 어느 한 측면에만 주목하곤 한다. 그러나 위기 해결을 위해서는 산업구조의 조정이나 국제관계 등 현실적인 차원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고, 구조적인 불평등 문제 역시 함께 다루지 않을 수 없다. 이 역시 기후위기라는 용어에서 일반적으로 기대되는 것과는 거리가 있는데, 사실 기후위기론에서 제일 간과되기 쉬운 측면이 인간들이 실시간으로 저지르는 생태계에 대한 범죄행위이다. 수온변화와 해양오염으로 인한 해양생물 멸종은 기후위기의 중요한 현상으로 거론되는 반면에 아베 정권의 후꾸시마 원전 오염수 방류는 정치적인 차원으로만 여겨지는 것이다.

그렇다면 기후변화를 포함하여 현재 생태계가 맞닥뜨린 재난적인 상황에 인간의 책임이 핵심적이라는 사실을 좀더 직접적으로 강조하는 논의로는 어떤 것이 있을까. 최근에 한국에서도 점차 파급력을 키우고 있는 인류세(Anthropocene) 담론은 현생인류의 활동이 지구의 상태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고 주장한다.3 지구의 역사를 나타내는 지질시대 구분법에 따르면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는 신생대(新生代, Cenozoic era) 제4기에 속하는 홀로세(Holocene)이다. 공룡의 시대였던 중생대가 약 1억 8천만년, 그 이전인 고생대가 약 3억 3천만년 지속된 것과 비교할 때, 신생대는 시작된 지 고작 6600만년이 지났을 뿐이고, 그 안에서도 제4기는 258만년 전에 시작되었으며, 마지막 빙하기가 끝난 1만년 전부터 비로소 홀로세에 돌입했다.

지구의 전체 역사에 비하면 너무나도 짧은 그 1만년 사이에 인간은 지질층에까지 크나큰 자취를 남겼다. 대규모 농업과 공업, 댐을 비롯한 각종 건설 공사 등을 통해 엄청난 퇴적층을 유실시켰는데, 이는 바다, 바람, 강 등 자연이 가진 침식력의 10배 이상의 결과다. 대기층에는 이산화탄소 농도 증가 문제 외에도 1945년 원자폭탄이 투하된 이래 태평양 마셜제도의 비키니 환초를 비롯하여 지구 곳곳에서 이루어진 핵실험의 결과로 10만년이 지나도 사라지지 않을 방사성 동위원소의 흔적을 남겼다. 체르노빌 발전소 폭발사고는 물론 일본정부가 추진하는 후꾸시마 오염수 방류까지 지구 전체에서 방사능 물질의 누적은 현재진행형이다. 탄소연료가 연소되면서 나온 검댕들은 히말라야부터 남극에서까지 발견되고 있으며, 지층에는 썩지 않는 플라스틱이 쌓여가고, 해양의 산성화로 해양 생태계가 붕괴되는 한편 강물을 포함한 담수가 부족해지고 있다. 그뿐 아니라 온실가스에 의한 지구온난화로 야기된 기후변화가 생태계를 교란시켜 종(種)의 멸종을 가속화한다. 현생인류의 활동이 남긴 자취들이 지질층에까지 큰 변화를 남기게 되었으니, 이를 홀로세와 구별되는 하나의 독립된 시대로 볼 정도라는 의미로 사용되는 용어가 바로 인류세다.

인류가 지질층에 영구적으로 남기게 된 흔적 가운데 긍정적으로 볼 것을 찾기가 어려울 지경이다보니, 기본적으로 인류세 담론은 인간으로 말미암아 생겨난 생태환경 위기를 비판하는 성격을 띤다. 용어 자체는 현생인류의 활동이 지구 상태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게 된 시대라는 뜻이지만, 사실상 종말론적인 의미로 들리게 되는 것도 같은 이유에서일 것이다. 물론 그 가운데는 자연에 대한 더 나은 관리를 주장할 뿐 인간중심 체제에 대한 근본적인 전환을 요구하지 않는 경우도 있고, 심지어는 자연에 대한 인간의 지배력이 최고에 이른 시대로서 인류세를 찬양하기도 한다. 그럼에도 인류세라는 진단에는 환경생태 위기가 인간 활동의 결과라는 사실이 못 박혀 있다는 점에서 단순한 기후위기론보다 진일보한 것이며 실천적으로 의미가 있다. 더욱이 인류세를 전면에 내세운 다큐멘터리나 전시 작업 등이 이어짐에 따라 이 담론의 영향력이 다방면으로 커지고 있는 만큼 그 개념에 대한 비평적 개입은 중요하다.

 

 

인류세는 인류 전체의 책임인가

 

인류세 담론은 인간과 자연을 이분법적으로 구분하는 인간중심 문명에 대한 비판으로서 의의를 가지지만 한계점도 분명하다. 스웨덴의 생태학자 안드레아스 말름(Andreas Malm)과 알프 호른보리(Alf Hornborg)는 인류세 서사를 비판하면서 인류가 당면한 문제를 호모사피엔스종 전체의 문제로 만드는 이 용어 대신 문제를 책임져야 할 주체를 명시하여 ‘자본세’(Capitalocene)라 불러야 한다고 주장한다. 인류세 담론은 그 말에서 떠올리게 되는 종류의 풍요를 다수가 경험해보지 못했음에도 문제를 인류 전체의 책임으로 돌리게 되는 것이 부당하며, 생태위기의 주범인 자본주의에 면죄부를 줄 뿐이라는 것이다.4 모든 사람에게 책임을 돌린다면 결국 누구의 책임도 아니게 된다는 이같은 우려는 지난 2015년 유엔 기후변화회의에서 채택된 빠리협정을 조약 당사국인 미국이 2017년에 탈퇴하면서 현실화되었다. 미국이 든 이유는 “인류 전체가 나눠 져야 할 온실가스 감축 부담을 미국에 과도하게 지운다”라는 것이었다.

페미니스트 이론가인 도나 해러웨이(Donna Haraway)는 마찬가지로 자본세라는 용어를 쓰지만, 기존 자본세 담론이 지적하지 않은 자본주의체제의 남성중심성을 비판대에 올리고자 한다.5 해러웨이에게 현재 생태계의 파괴는 종으로서의 인류와 관련된 문제라기보다는 자본주의적 발전과 관련된 문제이고, 그 자본주의는 인종주의와 성차별주의적인 성격을 띤다. 따라서 그에게 인류세를 상징하는 인간상이란 화석연료를 손에 들고 태우는 백인남성이다. 해러웨이는 백인남성 중심의 인류세를 넘어 인류가 도달해야 할 미래는 다른 존재들과 조화롭게 살아가는 시대라고 보면서, 이 새로운 시대를 ‘술루세’(Chthulucene)라 부르자고 제안한다. 인류세의 인류와 대척점에 놓인 존재인 술루(Chthulu)는 인간의 통제에서 벗어나 있으며, 의도하지 않은 여러 행위를 통해 세계를 만들어가는 지하의 거대한 힘과 같은 존재이다.

한편 해러웨이의 자본세 논의와 술루세 요청 모두에 생각을 같이하면서 함께 활동해온 페미니스트 인류학자 애너 칭(Anna Tsing) 역시 인류세 담론의 보편화 경향을 비판한다. 인류세 시대를 상징하는 경작 형태라 할 수 있는 플랜테이션 농장을 보더라도, 각각의 플랜테이션은 단일작물을 대규모로 재배하여 상업적으로 판매한다는 기본 개념 차원에서만 동일하지, 어떠한 경우에도 정말로 같지는 않다고 지적한다.6 그럼에도 칭은 인류세라는 개념의 출현은 인간이 자연을 맞수로 삼아 벌여온 투쟁에서 승리해왔다는 남성적인 서사가 붕괴했음을 뜻하며, 자신이 초래한 파괴 행위에 공포를 느끼기 시작했음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고 보았다.

한마디로 해러웨이나 칭 같은 페미니스트 학자들은 지금의 인류세를 만들어낸 책임은 자본주의, 그중에서도 권력을 가진 백인남성에게 있다고 본다. 위기의 시대를 맞아 인간은 현재까지 제시된 세계의 상을 근본적으로 되짚어볼 필요가 있으며, 비인간 존재를 포함해 이 세계를 구성하는 다른 많은 존재들과 관계 맺는 법을 착취적이거나 파괴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새롭게 배워야 한다는 것이 이들의 주장이다. 이러한 인류세 담론 비판은 동등하게 책임이 있지도 않고 심지어는 고통조차 공평하게 분배되고 있지 않은 위기의 원인을 인류 전체로 돌리는 것의 문제점을 잘 짚고 있다. 하지만 인류세의 책임을 백인남성에게 돌리는 발상은 그 자체로 새롭다고 보기도 어렵거니와 해결의 실마리가 되기엔 지나치게 단순한 것도 사실이다. 실제로 이들의 작업에서 현실 자본주의체제를 어떻게 벗어날지에 대한 전망은 잘 드러나지 않으며, 많은 통찰을 얻을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환경재난과 기후응급사태를 살아내기 위해 분투하는 사람들의 곤곤한 삶과는 동떨어져 있다는 인상을 지우기 어렵다. 기후위기 해결을 위한 담론적 모색은 변화를 위한 투쟁의 문제로 이어질 수밖에 없으며, 투쟁은 결국 주체를 필요로 한다. 인류세가 사실은 자본세라고 지적한다 해서, 혹은 우리가 원하는 시대는 술루세라고 주장한다 해서 그것만으로 새로운 세계를 향한 동력이 곧바로 만들어지지는 않는 것이다.

 

 

인류세 극복과 토착민의 관점

 

이러한 맥락에서 여기서는 인류세에 대한 또다른 접근으로 토착민(the indigenous)7의 시각에 주목하고자 한다. 인류세 위기 담론 속에서 토착민은 중요한 역할을 하는데, 우선 피해자의 상징으로 등장한다. 토착민 거주지역 가운데 많은 곳이 바로 인류세에서 이야기되는 해수면 상승이나 잦은 산불, 밀림 축소, 극지방 온도 상승 등으로 인해 피해를 입었다. 이미 사람의 거주가 불가능해졌거나 이제껏 이어오던 생계방식을 더이상 유지하기 어려워진 지역들이다. 그러다보니 토착민은 기후난민의 대표적인 얼굴이자, 위기에 처한 자연을 상징하는 이미지로 활용되고 있다.8 그런가 하면 인류세 담론에서는 토착민과 그들이 가진 토착지식이 인류세라는 위기에서 벗어나기 위한 회복력(resilience)의 자원으로서 관심을 받는다. 토착민에게서 인간과 비인간이 관계 맺는 또다른 방식을 배우고, 데까르뜨적 이분법에 기초한 과학적 지식이 아니라 토착민이 쌓아온 지식을 통해 인류세 위기에서 벗어나자는 것이다. 이렇게 토착민의 곤경에 관심을 가지거나 토착지식의 가치를 인정하는 흐름이 대두된 것은 자연을 자원으로만 취급해 파헤쳐 이용하고, 화석연료를 엄청난 규모로 소비하는 행위를 자랑해온 시각에 비하면 큰 진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토착민을 열등한 존재로 바라보던 시각보다는 나을지 몰라도, 인류세의 일반적 담론 속에서 그들을 피해자로만 보는 시각, 과거에 머물러 사는 존재로 취급하는 것은 여전히 온당치 않다.

그보다는 환경투쟁을 수행하는 주체로 선 토착민의 모습을 눈여겨봐야 한다. 실제로 현재 석유와 천연가스, 목재를 이용하고 광물을 채취하기 위한 개발행위에 저항하는 세계의 주요한 투쟁은 거의 토착민들이 그 중심에 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작년 7월에는 브라질에서 토착민 지도자가 금광 개발업자들에 의해 살해당했다는 보도가 나오기도 했다. 2016년 미국 노스다코타주 스탠딩록(Standing Rock) 토착민 보호구역에서는 토착민들이 중심이 되어 대형 송유관 프로젝트에 반대하는 투쟁을 벌여서 결국 건설을 중단시키는 승리를 이뤄냈다. 미국 전역의 환경운동가와 시민들의 지지 속에서 투쟁을 이끌어낸 쑤(Sioux)족은 자신들이 “시위대가 아니라 신성한 물의 수호자”임을 자임했다. 캐나다에서도 대형 송유관과 가스관에 반대하는 토착민들의 투쟁이 벌어지는 중이다. 최근에 주목받고 있는 투쟁은 북서부 브리티시컬럼비아 지역의 웻수웻텐(Wet’suwet’en) 토착민들의 송유관 반대 투쟁이다.9

때로는 승리하고 때로는 실패하지만 어떻든 이들의 투쟁은 인간이 중심이 되어 자연을 착취하는 흐름에 대한 현재진행형의 저항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이들은 대형 송유관에서 사고가 날 위험을 걱정해서 반대하기도 하고, 새로운 송유관에서 오는 이득은 초대형 에너지기업이나 해안가 도시민들에게 돌아가고 자신들은 지역의 원형을 잃을 뿐이라는 부정의에 저항하기도 하며, 그동안 신성하게 여겨온 장소가 파괴되는 데 맞서 싸우기도 한다. 때로는 자신들의 의사를 제대로 반영하지 않은 채 공사가 강행되는 절차상의 문제에 저항하기도 한다. 하와이에서 ‘30미터 망원경’(Thirty Meter Telescope, TMT)의 건설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투쟁은 ‘마우나케아’라는 신성한 장소를 지키려는 싸움이기도 하며, 절차상의 문제, 역사적으로 누적되어온 불만, 군사적으로 이용될 수 있는 가능성 모두에 저항하는 투쟁이다. 이들의 투쟁은 과학의 발전이라는 목적이 과연 그 지역에서 살아온 토착민들의 권리에 앞설 수 있는가, 장소의 훼손은 얼마만큼 용납될 수 있는가 하는 문제를 던지고 있다.

사실 이러한 토착민의 투쟁은 정착식민주의(settler colonialism)의 역사를 모르면 그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기 어렵다. 정착식민주의가 일반적인 식민주의와 구별되는 것은 그것이 단지 지배 자체를 목적으로 하거나 노동력을 착취하기 위함이 아니라, 토지를 목적으로 하는 지배라는 점이다. 정착식민지라고 하면 신대륙에서 백인들이 토착민들을 몰아내고 자리 잡은 경우를 생각하기 쉽지만, 최근에는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의 경우 역시 중요한 사례로 다뤄진다. 매장된 자원을 채굴하거나 삼림자원을 채취하기 위해서, 기지나 공항을 짓기 위해서 토착민들을 살던 땅에서 몰아내는 경우 역시 정착식민주의로 보기도 한다.10 토착민 투쟁을 외부에서 바라보는 국외자들은 토착민들의 권리를 노골적으로 부정하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개별 사안의 정당성을 공리주의적으로 판단하려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토착민들에게 정당성의 문제란 자신들이 땅에 대한 권리를 한번도 적법하게 양도한 적이 없다는 사실에 있다. 투쟁하는 토착민들에게 식민지배의 청산 없이 공정한 거래는 성립하지 않는다.11

탈식민(decolonialization) 입장을 가지고 토착학(the indigenous studies)을 연구하는 이들 가운데는 인류세 담론을 비판하면서도 정착식민주의에 대한 주의를 환기하기 위해 그것을 활용하는 흐름이 존재한다. 이들은 세계 전역에 지금과 같은 자연착취적이고 파괴적이며 이성애중심적인 남성지배체제가 자리 잡게 된 것은 식민지배의 역사를 망각한 채로는 이해될 수 없으며, 식민지배체제의 청산 없이 인류세 문제의 해결도 어려울 것이라 주장한다.12 또한 인류학자들 중에 탈식민을 이야기하면서도 토지에 대한 권리를 주장하는 토착민들의 투쟁에는 전혀 관심이 없는 이들을 비판하기도 하고, 백인들끼리 모여서 토착지식의 중요성을 이야기하는 상황을 꼬집기도 한다.13 인류세가 이야기하는 기후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토착민들이 살아온 방식과 그들의 토착지식을 배워야 한다고 하지만, 불과 수십년 전까지도 토착민들을 대상으로 억압적인 동화정책을 펼쳐온 역사가 아직도 살아 있다. 결국 기후 및 생태 위기 해결을 논의하는 사람들은 권력의 문제, 식민화의 문제, 그리고 지식생산 방식의 문제에 민감해야 하며, 특히 유럽중심주의적 시각을 탈피하겠다면서 정착식민주의에 대한 비판에 눈감아서는 안 된다는 게 이들의 주장이다.

 

 

지금 여기의 투쟁과 연대하기

 

이제까지 주로 해외 토착민들의 투쟁 사례, 그것도 북미 대륙에서 벌어지는 사례를 언급했지만, 자원 채굴이나 개발을 강행하려는 세력들과 거기에 대한 지역민들의 저항은 한국 곳곳에서도 일어나고 있다. 제주, 밀양, 성주, 그리고 4대강사업으로 농사를 짓던 터전에서 쫓겨난 사람들까지, 정착자들이 토착민의 토지를 수탈할 때처럼 개발되지 않은 공간을 비어 있는 공간으로 보고 주민을 밀어내는 정착식민주의의 바람은 여전히 거세다. 특히 2000년대 이후 주민들의 강한 저항을 진압하면서 이루어진 평택 대추리, 제주 강정, 성주 소성리의 강제토지수용은 군사기지 건설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이들의 투쟁은 이제껏 살아온 땅을 지키고자 하는 토착민의 싸움이 먼 나라만의 이야기가 아님을 알게 한다. 또한 끝없이 이어지는 개발-재개발의 연쇄 속에서 생업의 터전이나 주거하던 집에서 밀려나지 않기 위한 도시에서의 투쟁도 토착민의 관점으로 벌이고 서로 연대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기후위기처럼 원인과 해법이 복잡한 문제일수록 그것을 둘러싼 담론이 중요하다. 관련된 모든 투쟁이 기후 및 생태 위기에 저항하는 것이라 단언하기는 어려울 수 있지만, 자신의 문제가 그것과 어떻게 연관되는지에 대한 인식을 새로이 하는 노력이 결부된다면 연결되지 않는 투쟁이란 없을 것이다. 가령 수명이 남은 건물을 부수고 다시 짓는 일을 멈추는 것은 곧 미세먼지도 온실가스도 줄이는 길이 된다. 그뿐 아니라 기후위기의 원인을 깊이 따져 들어가다보면 결국 한반도의 식민체제 청산, 평화와 외교, 노동문제 등까지 두루 관련성을 발견하게 될 것이며, 그렇게 보면 한반도에서 인류세의 문제는 평화체제 건설의 문제로 연결될 수도 있는 것이다. 수고롭지만 기후위기에 대한 기존의 담론들을 꼼꼼히 뜯어보면서 새로운 연대의 가능성을 모색하고 실천의 길을 찾아가는 작업이 필요하다.

 

 

  1. 김현우 「기후변화, 원전이 대안이라고?: IPCC 보고서와 두 개의 도전」, 레디앙 2018.10.10. IPCC 「지구온난화 1.5℃ 특별보고서」의 한국어 번역문은 기상청 기후정보포털에서 내려받을 수 있다.
  2. 그린뉴딜 개념의 다양한 계보와 성향에 대해서는 본지 이번호에 실린 김상현의 「그린뉴딜 다시쓰기: 녹색성장을 넘어」 참조.
  3. 1980년대에 처음 등장한 인류세라는 용어를 대중적으로 알린 것은 2000년 무렵부터 시작된 네덜란드의 대기과학자이자 노벨 화학상 수상자인 파울 크뤼천(Paul Crutzen)의 활동이었다. 그는 2009년부터 ‘인류세 워킹 그룹’(Anthropocene Working Group, AWG)을 출범시켜 공식적인 연구와 논의를 이어왔다. 지질 연대 구분을 공식적으로 결정하는 국제층서위원회(International Commission on Stratigraphy, ICS)와 국제지질학연합(International Union of Geological Sciences, IUGS)은 아직까지 인류세를 공식 인정하지 않고 있다. 지질학이 정치화되는 것에 대한 경계도 있고, 층서학에서 1만년이라는 시기는 매우 짧기 때문에 홀로세를 서둘러 마감하는 데 대한 두려움도 있는 것이다. 그렇다 해도 현재 인류가 대기와 해양, 지질층 속에서 비가역적인 흔적을 남기고 있다는 사실 자체를 부정하기란 어렵다.
  4. Andreas Malm and Alf Hornborg, “The geology of mankind? A critique of the Anthropocene narrative,” The Anthropocene Review 2014.1.7, 62~69면.
  5. Donna Haraway, “Anthropocene, Capitalocene, Plantationocene, Chthulucene: Making Kin,” Environmental humanities vol.6, 2015, 159~65면.
  6. Anna Tsing, “Earth Stalked by Man,” The Cambridge Journal of Anthropology 34 (1), 2016, 2~16면.
  7. 정착자(the settler)나 침략자들이 오기 전부터 특정 지역에 살던 사람을 지칭하는 용어로는 원주민(the native 또는 aborigine), 토착민(the indigenous), 선주민(First Nation) 등이 있는데, 용어의 의미가 조금씩 다른 데다 논자마다 쓰는 의미가 다르기도 하여 그 차이를 명확히 구분하기 쉽지 않다. 실제로 혼용되거나 지역에 따라 달리 쓰이기도 한다. 토착민은 일상적 용어라기보다는 식민주의의 경험 속에서 나온 정치적 성격이 상대적으로 강하며, 종종 특정한 장소와의 연결성, 그 장소를 통한 조상들과의 연속성의 의미를 강조하기 위해 사용된다. 토착민을 혈통에 의해 결정된다고 보는 것은 식민지배자들의 시각이며, 현실의 토착민 범주는 지속적으로 재구성되는 과정에 있음을 강조할 필요가 있다. 한국에서는 원주민이라는 용어가 익숙하지만, 이 글에서는 토착성의 문제가 혈통이 아니며 토착민이라는 용어를 스스로 사용하는 사람들은 식민지배 역사에 대한 자의식을 강하게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고 이 용어를 사용한다.
  8. 인류세의 알레고리로서 섬이 활용되는 방식과 토착민이 다루어지는 방식에 대해서는 Elizabeth DeLoughrey, Allegories of the Anthropocene, Duke University Press 2019 참조.
  9. “우리는 터틀 아일랜드(북아메리카 대륙)에 거주하는 아시아계 이민자로서 최근 캐나다 연방 경찰(RCMP)이 웻수웻텐 고유의 영토를 침범하고 거주민을 체포하며 저지른 폭력적인 행동을 강하게 규탄한다”라는 성명서가 한국어로도 나와 있다(http://asiansinsupportofwetsuweten.water.blog/kor).
  10. 로렌조 베라치니 같은 정착식민주의 연구자는 최근 자본주의는 도시에 사는 사람들의 노동력이나 소비로부터 이윤을 창출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몰아낸 후에 부동산 가치를 올리는 방식으로 작동하고 있으며, 자본은 더이상 노동자들의 재생산에 대해 고려하지 않는다고 지적한다. 정착식민지에서 정착자들이 토착민을 대상으로 하던 지배 방식이 이제는 토착민이 아닌 사람들에게까지 적용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암울한 현실에서 그는 현재 자본주의의 작동이 정착식민주의적 속성을 가지고 있다는 인식 위에서 토착민과 비토착민 사이의 연대가 가능해질 수 있다고 전망한다. Lorenzo Veracini, “Containment, elimination, endogeneity: Settler colonialism in the global present,” Rethinking Marxism 31 (1), 2019, 118~40면.
  11. 그렇다고 해서 토착민들의 투쟁을 미화하고 지지하는 데 그치는 것은 현실 왜곡이 될 수 있다. 토착민들의 투쟁은 하나의 단일한 입장으로 정리되지 않는데, 가령 그들 사이에서 개발과 보상을 둘러싼 갈등, 내부 부패와 불의, 전통을 따르려는 세습권력과 서구식 민주주의에 따르려는 선출권력 간의 갈등 등이 벌어지기도 한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갈등 양상마저도 식민지배의 유산과 무관하지 않다는 점이며, 여전히 지속되는 토착민들의 빈곤이 그중 어떤 사람들에게는 개발을 환영하게 만들기도 한다는 사실이다.
  12. Zoe Todd, “Indigenizing the anthropocene,” Heather Davis, Etienne Turpin eds., Art in the Anthropocene: Encounters among aesthetics, politics, environments and epistemologies, anexact 2015, 241~54면; Heather Davis, Zoe Todd, “On the Importance of a Date, or Decolonizing the Anthropocene,” ACME: An International EJournal for Critical Geographies 16 (4), 2017.
  13. Karen Brodkin, Sandra Morgen, Janis Hutchinson, “Anthropology as White Public Space?,” American anthropologist 113 (4), 2011, 545~56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