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론

 

길의 시학

신경림과 황동규

 

 

최두석 崔斗錫

시인, 한신대 문예창작학과 교수. 시집으로 『대꽃』 『임진강』 『성에꽃』 『사람들 사이에 꽃이 필 때』와 저서로 『리얼리즘의 시정신』 『시와 리얼리즘』 등이 있음. pinus@hanshin.ac.kr

 

 

1. 근래의 작풍과 기행시

 

‘시인부락’ 동인이기도 한 함형수(咸亨洙)는 「해바라기의 비명(碑銘)」 한 편으로 남은 시인이다. 그런데 만약 오늘날 함형수 같은 이가 있다면? 아마 그는 시인이 되지도 못하고 「해바라기의 비명」 수준의 그의 시는 빛도 보지 못하고 묻히고 말 것이다. 수준작이 여러 편 있어야 등단의 기회가 주어지고 시집 한 권이라도 내야 겨우 문학판의 말석에 고개를 내밀 수 있는 시대이므로.

오늘날의 시작풍토와 관련하여 우선적으로 두드러지는 현상은 다작이라는 것이다. 시를 부지런히 읽는 편인 나로서도 읽지 못하거나 대충 훑어보고 넘어가는 잡지와 시집이 허다하다. 주요한 시인이라도 예전에는 시집 한두 권 내고 생애를 마치는 경우가 많았었는데 요즘에는 삼년이 멀다 하고 새 시집을 내는 이가 적지 않다. 그러지 못하면 시인으로서의 존립을 위협받는 시대라는 생각도 든다.

물론 시인에게 좋은 시를 왕성하게 쓰는 것만큼 바람직한 일이 어디 있겠는가. 하지만 좋은 시가 어찌 그리 쉽게 씌어지겠는가. 이른바 절창이라고 불리는 시에는 시 쓰는 주체의 땀과 피와 혼이 스며들어 있는 법이다. 막연하게 많이 쓰다보면 절창도 쓰게 되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크게 보아 동어반복의 유사품을 대량생산하기보다는 한편 한편의 시에 최선을 다하는 본분을 지키는 태도가 새삼스럽게 요구된다고 하겠다.

다작의 시대이기는 하지만 주도적인 흐름을 형성할 만한 시적 경향은 보이지 않는다. 문예지도 많이 발간되지만 뚜렷한 색상을 드러내는 잡지도 눈에 띄지 않는다. 필자의 눈이 어두워서인지는 몰라도 시운동이라고 불릴 만한 경향은 나타나지 않고 있다. 굳이 지적하라면 사회역사적 상상력의 거대담론은 위축되고 개인의 내면을 드러내는 미세담론이 다양해졌다고나 할까. 아무래도 오늘날은 시인이 횃불 들고 군중 앞에 서 있는 시대는 아닌 듯하다.

다작이나 미세담론이라는 작풍과도 연결되는 것인데 근래에 기행시가 참 많이 나오고 있다. 해외여행까지 포함해서 여행이 빈번해진 사회현상과 무관할 수 없다 하겠다. 첨예하거나 우렁찬 목소리가 요구되는 절박한 사회적 쟁점도 줄고 시가 여가생활의 읽을거리로 존재하는 탓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근래에 기행시가 많아진 가장 큰 이유는 다작의 유혹을 물리치기 힘든 시인이 여행을 통해 손쉽게 소재를 구한다는 데에 있는 듯하다.

하지만 손쉽게 소재를 구하는 차원에서 쉽게 기행시를 쓴다면 좋은 시가 나오지 않는다. 어차피 풍물을 구경하는 수준에 머물러서는 삶의 깊이를 드러낼 수 없다. 문학적 소재로서의 여행이란 주체의 세계로의 편력과 무관할 수 없고 편력이 사색의 깊이를 수반할 때 비로소 시로서의 성취를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해 세계로의 편력이라는 길의 의미가 제대로 살아날 때 범상한 기행시의 평면성을 뛰어넘을 수 있다고 하겠다.

인생길이라는 비유가 설득력을 갖듯이 삶은 길 위에 펼쳐진다고 볼 수도 있다. 그러니까 길의 의미찾기는 삶의 의미찾기와 겹쳐지는 부분이 많다. 이런 맥락에서 필자가 주목하는 시인이 신경림과 황동규이다. 문단의 원로이면서도 현재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는 두 시인은 기행시가 유행하기 훨씬 전부터 오랫동안 길의 의미를 천착해왔다. 지금은 색깔이 많이 바랬지만 속칭 창비파와 문지파를 대표하는 두 시인이 길을 중심에 놓고 상상력을 펼쳐왔다는 것은 흥미로운 일이다.

 

 

2. 신경림의 떠돌이의 노래

 

‘방안 퉁소’가 명인 되기 어렵듯이 집안에 틀어박혀서 좋은 시를 쓰기는 힘들 것이다. 세상 돌아가는 물정과 사람살이의 형편을 완전히 외면한 채 누에의 집짓기 식으로 시를 쓸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런 의미에서 길은 시인에게 세상 돌아가는 물정과 사람살이의 형편을 살피는 통로로서의 성격을 갖게 된다. 세상과 사람에 대한 관심의 정도나 방향에 따라 길의 의미나 성격이 달라지겠지만 원천적으로 길과 무관하게 시를 쓸 수는 없다고 하겠다.

1956년에 등단한 신경림(申庚林)의 이력 가운데 특이한 것은 1957년부터 1965년 사이에 시작활동을 쉬었다는 것이다. 유명한 이 ‘십년 공백’이 실은 ‘십년 공부’라는 사실은 웬만큼 알려진 사실이지만 그 공부의 내막에 대해서는 좀더 살펴볼 필요가 있을 듯하다. 크게 보아 순수시 혹은 전래적 서정시의 흐름 속에서 등단했던 시인이 십년의 잠복기를 거쳐 민중시 혹은 리얼리즘시의 흐름을 열게 된 사연이 잠겨 있기 때문이다.

 

아편을 사러 밤길을 걷는다

진눈깨비 치는 백리 산길

낮이면 주막 뒷방에 숨어 잠을 자다

지치면 아낙을 불러 육백을 친다

억울하고 어리석게 죽은

빛바랜 주인의 사진 아래서

음탕한 농지거리로 아낙을 웃기면

바람은 뒷산 나뭇가지에 와 엉겨

굶어죽은 소년들의 원귀처럼 우는데

이제 남은 것은 힘없는 두 주먹뿐

수제빗국 한 사발로 배를 채울 때

아낙은 신세타령을 늘어놓고

우리는 미친놈처럼 자꾸 웃음이 나온다

–「눈길」 전문

 

위의 「눈길」이 개인적인 정서를 드러내는 서정시와 사뭇 다르다는 점은 웬만한 안목의 독자라면 일독하면서 금방 감지할 수 있을 것이다. 우선 ‘나’ 대신 ‘우리’가 등장하는 것이 전래적 서정시와 다른데 시적 자아는 산골에서 은밀히 재배한 아편을 몰래 수집하러 다니는 약종상패에 끼어 있다. 시적 자아가 어떻게든 먹고살아야 하는 맨주먹 인생들에 자연스럽게 섞여들어 있는데 무엇보다도 그 점이 『농무』와 『새재』 시절 신경림의 민중시가 갖고 있는 장점이다.

외형상으로 시를 놓고 지낸 십년 공백기가 실은 본격적으로 자신만의 득의의 시를 준비하던 시기였음은 인용시 「눈길」이 이 시기의 떠돌이생활 속에서 초고를 써둔 것이라는 본인의 술회에서도 드러난다. 실제로 공사판이나 광산에서 일하기도 하고 장돌뱅이 친구를 따라다니기도 한 이 시기에 시인은 본격적으로 세상공부를 한 것이다. 물론 시를 의식하거나 쓰기 위한 체험이 아니고 하루하루 살아가기 위한 밑바닥 체험이기에 더욱 시쓰기에 소중한 자산이 되었다고 하겠다.

시가 사는 만큼 나오는 것은 아니겠지만 시가 삶을 속일 수 없다는 것은 사실인 듯하다. 이른바 중국식 하방체험으로는 「눈길」과 같은 자연스러운 경지에 이를 수 없다. 「눈길」과 같은 신경림의 민중시가 갖는 장점이자 미덕은 지식인 냄새가 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빛바랜 주인의 사진 아래서 주막집 아낙과 음탕한 농지거리를 하고 아낙의 신세타령에 미친놈처럼 웃는 장면의 포착은 시인의 체험이 진하게 녹아들지 않고서는 불가능하다고 하겠다. 즉 시인의 떠돌이생활 십년의 체험이 그의 민중시를 낳게 한 것이다.

‘순수시’와 대비되어 1960년대에 널리 통용되었던 말로 ‘참여시’가 있다. 육이오 이후에 잠복하던 사회현실 문제에 대한 시적 관심이 사일구를 계기로 터져나오게 된 것이다. 그런데 1970년을 전후하여 민중시가 종전의 참여시를 이어받게 되는데 그러한 전환을 가져온 대표적 시집이 신경림의 『농무』라고 할 수 있다. 목소리를 높이다가 자칫 공허해지기 쉬운 참여시가 사람살이의 체취가 물씬 풍기는 민중시로 거듭났다고 하겠으니 그러한 문학사적 맥락에서 신경림의 떠돌이 십년이 갖는 의미를 따져볼 수도 있겠다.

그러니까 신경림의 초기시편들에서 길은 스스로 민중의 일원이 되어 민중의 삶을 체험하는 통로라 하겠고 인용시 「눈길」은 그 점을 잘 보여준다. 그에게 민중은 ‘민중 속으로’라는 지식인의 구호나 의식적 실천의 차원에서 발견한 존재가 아니고 나날의 삶의 현장 속에서 함께 부대끼며 동행하는 존재이다. “못난 놈들은 서로 얼굴만 봐도 흥겹다”(「파장」)나 “우리는 어느새 동행이 되어 있었다”(「동행」)와 같은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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