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문명에 대한 묵시록적 비전이나 대재앙을 그린 작품을 나는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폐허에서 간신히 살아남은 자들이 지구를 지키기 위해 싸워나가는 과정을 선악의 축으로 보여주는 식상한 이야기들이 많은 탓도 있겠지만, 무엇보다 급변하는 세상에서‘변하지 않는 것들’에 대해 생각하기를 좋아하는 취향 탓도 크지 싶다. 그래 그런지 시절이 유난히 하수상한 올가을, 시대의 풍경이 크게 바뀌어 우리 삶을 받쳐주던 뿌리들이 어이없이 뽑혀나갈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위기의식 가운데 만난 작품, 코맥 매카시(Cormac McCarthy)의 『로드』(The Road, 정영목 옮김)에 그리 큰 기대를 하지는 않았다. 윌리엄 포크너, 허먼 멜빌, 어니스트 헤밍웨이에 비견되는 작가,‘성서’에 비견되는 소설, 2007년 퓰리처상 수상작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