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2 | 김수영 시인 40주기에 부쳐

 

김수영의 현대성 또는 현재성

 

 

황현산 黃鉉産

문학평론가, 고려대 불문과 교수. 저서로 『얼굴 없는 희망』 『말과 시간의 깊이』, 역서로 『라모의 조카』, 말라르메의 『시집』 등이 있음. poetique@dreamwiz.com

 

 

김수영(金洙暎)은 비범한 일을 했다. 구태여 이름을 밝힐 필요가 없는 한 ‘원로시인’이 몇해 전에 현대 한국시 전반에 걸치는 시인론집을 출간하면서 거기서 김수영을 제외해야 했던 이유에 대해 “그는 시인이 아니기 때문”이라고 잘라 말했다. 이 놀라운 발언은 그러나 거기에 걸맞은 파동을 일으키지 못했다. 김수영을 깊이 존경하거나 자신의 문학적 성장을 그에게 크게 빚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여러 문인들의 편에서라면, 이 말이 무력함을 자신들의 무응답으로 실증했다고 할 수도 있고, 끝내 겉돌다 끝날 지루한 논의에 힘을 낭비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다. 그들에게 김수영의 공적은 어떤 바람도 움직일 수 없을 만큼 단단한 것이다. 그러나 문단에 적을 걸고 있는 여러 ‘계층’의 인사들을 이러저런 사석에서 만나보면, 한국 현대시의 역사가 ‘왜곡된’ 근본원인이, 적어도 자신들이 문단생활에서 부당하게 겪어야 했던 온갖 불운의 일차적 책임이, 김수영에게 있음을, ‘이론이 딸려서’ 공론을 펼 수는 없지만, 확신하고 있다고 고백하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 그들에게도 김수영은, 어느 누구에게서보다도, 살아 있다. 어느 편에서나 김수영의 존재는 이렇게 무겁다. 이 점은 우리에게서 시가 무엇인지, 혹은 어떤 시가 좋은 시인지 묻는 논의에서 김수영을 인사치레로라도 거론하지 않을 수 없었던 저간의 사정과 일치한다. 훌륭한 시인이냐 아니냐를 떠나서, 김수영은 그만큼 특별한 일을 한 것이다.

이 작은 글은 그 특별함을 들춰보고, 그가 유명을 달리한 지 40년이 지난 지금까지 그 특별한 것들이 그 특별함을 유지하면서도 그 세월에 값하는 어떤 보편적 가치를 지니고 있는지, 그렇다면 그 힘은 어디서 오는지 살펴보기 위한 것이다. 그의 초상을 문학적이건 아니건 어떤 이데올로기로 환치하거나, 그의 시를 오지랖만 넓은 어떤 용어들 속에 포진해야 할 필요는 없다. “시인은 밤낮 달아나고 있어야” 한다고 말한 것은 김수영 자신이다. 그의 시들이 여전히 좋은 힘이건 나쁜 힘이건 어떤 힘을 행사하는 것은 그들 시가 여전히 어디에 가두어질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런 일에서라면 김수영 자신이 어떤 말로 어떻게 시를 썼고 그것이 어떻게 차별되는지 살피고, 그 의의를 숙고하는 일보다 더 좋은 방법은 없을 터이나 이 글로 그 일을 다 하기는 어렵다.

김수영이 시를 거칠게 썼다는 의견에 반론을 펴는 사람은 드물며, 그 평가는 사실에 가깝다. 김수영의 시법에 대한 논의도 거기서부터 시작하는 것이 효과적이라고 보는 것은, 자명하게만 보이는 이 의견이 김수영에 대한 여러 다른 평가의 근저를 형성하면서도 그 구체적인 내용은 상술된 적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김수영은 시를 매끄럽게 쓰지 않았다. 그는 가지런한 시행과 영탄조의 문장과 시적일 것 같은 말과 멋 부린 말을 믿지 않았으며, 말 하나하나를 생경하게 드러내는 방식으로 문법을 밀어붙이고, 무엇보다도 그럴듯하거나 비겁한 논법에 기대지 않았다. 그는 누가 울 때 ‘운다’고 썼지 ‘웁니다’나 ‘우옵네다’라고 쓰지 않았다. 그는 먼 것을 보고 ‘먼’이라고 썼지 ‘먼먼’이라고 쓰지 않았다. 「奢侈」 같은 시의 “길고긴 오늘밤”이나 “어서어서 불을 끄자”처럼 입에 발린 첩어가 나타날 때는 거의 예외없이 어떤 종류의 것이건 모멸감이 섞인 희화가 있다. 김수영은 이 시를 “불을 끄자”라는 짧은 말로 끝내면서 그 희화를 접는다. 「孔子의 생활난」의 마지막 시구는 “그리고 나는 죽을 것이다”라는 말로 끝난다. ‘고요히’나 ‘흡족한 마음으로’ 같은 말은 거기 없지만, 말의 리듬을 끊는 “그리고”는 대범하게 거기 있다. 모든 언어에는 사실을 전달하는 기능장치 외에도 그 전달된 사실을 화자의 의도에 따라 일정한 방향으로 이끌고 가는 장치가 있으며, 이를 수사학에서는 논증요소라고 부른다. 한문 같은 고전어가 이 논증요소에 최소한으로만 의지하는 데 비해 문어의 구속력을 적게 받으며 발전한 한국어에서는 이 논증요소의 힘이 매우 강해서, 조사와 술어의 어미 하나하나가 모두 논증적 기능을 지닌다. ‘키는 크다’와 ‘키가 크다’가 다르고, ‘키가 크다’와 ‘키가 크더라’가 다르지만, 전달되는 사실은 모두 ‘키의 큼’이다. 서정주(徐廷柱)가 “인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이라고 읊을 때, 왜 ‘인제’가 돌아와야 할 시간인가를 따지기는 매우 어렵다. “인제는”에서 ‘는’의 힘은 그렇게 강하다. 정서적 논증력은 논쟁을 가로막는다. 논쟁적이지만 논증적이 아닌 김수영의 시쓰기는 “인제는”과 같은 마술적인 정서장치의 후원이 없다. 마찬가지로 사실의 무게가 어떤 주관적 정서의 개입으로 가벼워지지도 않는다. 그래서 김수영의 시에서, 먼 것은 멀다고 느껴지는 것이 아니라 말 그대로 먼 것이며, 우는 사람은 울 것 같은 심정에 복받치는 사람이거나 제 울음을 어디에 보여주려는 사람이 아니라 정말로 그리고 단순히 우는 사람이다. 「孔子의 생활난」의 죽음은 죽음에 대한 몽상이나 죽음과 유사한 것에 대한 비유가 아니라 절대적으로 죽음이다. 이 먼 거리, 이 울음, 이 죽음은 사실인 것처럼 이미 논증된 사실이 아니라, 항상 논쟁을 기다리고 야기하는 사실이다.

김수영의 시어를 그의 현실인식과 결부시키는 일은 새삼스럽지만 그만큼 정당하기도 하다. 그러나 시인으로서 김수영이 현실을 천착했다는 말은 부족하다. 그는 현실만 보았고, 그것도 매우 좁은 현실만을 천착했다. 그는 단 한편의 여행시도 쓰지 않았으며, 자연경관에 관한 길고 깊은 관상보다 그에게 더 낯선 것은 없다. 그의 시는 종로를 비롯한 서울 거리와 그 외곽 동네들을 벗어난 적이 없다. 그는 양계장을 경영했지만 그것은 가내공업이나 진배없었고, 곁들여 채마밭을 일구기도 했지만 거기에 지속적인 정성을 바칠 처지가 아니었다. 그는 자연을 농사꾼이 바라보듯, 다시 말해 그의 시대에 이 땅의 거의 모든 사람이 바라보듯 바라보지 않는다. 「거대한 뿌리」가 증언하듯 그의 마음속에도 전통의 깊은 뿌리가 분명하게 존재했지만, 자신이 체험한 현실을 그 정서의 전통에 끌어다 붙이는 일은 그에게 금지된 것이나 같았다. 자연에 대한 감정은 어디서나 민족감정과 엇물려 있기 마련인데, 그렇기에 더욱 이 감정은 「屛風」에서 말하듯 “무엇보다도 먼저 끊어야 할 것”인 “설움”이나 다를 것이 없었다. 그에게 땅에 떨어진 눈은 겨울 산촌의 아늑한 풍경과 연결되지 않았고, 봄에 돋는 새싹은 친구의 사무실이 사무실인 것만큼만 새싹이었다. 그는 눈과 새싹을 처음 보는 사람처럼 보았고, 처음으로 그 이름을 부르는 사람처럼 눈이라고, 새싹이라고 말했다.

모든 속절없는 감정에서 차단된 이 언어는 그만큼 사물에 육박할 수 있겠지만, 그 언어로 쓴 시가 어떤 서정에 닿기 위해서는 그만큼 절박한 모험을 감행하지 않을 수 없다. 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