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문
나는 어쩌다 무신론자가 되었는가
조광희 趙光熙
1967년 서울 출생. 민변 사무차장과 여러 영화사의 고문변호사로 일했고, 현재 영화제작사 ‘봄’ 대표이자 변호사로 활동중이다. 최근 한명숙 전 총리 재판의 변호인단에 참여했다. hehasnoid@gmail.com
나의 정체성에 대하여 생각해본다. 나는 인간이고, 남자며, 이성애자다. 한국인이고, 도시인이며, 중년이다. 중산층이고, 법률가며 가끔 영화인 행세를 한다. 정치적으로는 진보주의자이고, 종교적으로는 무신론자다. 그런데 그런 정체성들은 과연 실재인가, 아니면 내가 그렇게 믿고 있을 따름인가. 본래 나의 고유한 것인가, 아니면 내 의도와 상관없이 내게 스며들어 나를 차지해버린 것인가. 어느 평론가의 말마따나 누구나 ‘자본의 지령에 따라 움직이는 고정간첩’이 되어버린 시대에 이런 케케묵은 이야기를 꼭 해야겠느냐고 묻는다면 할 말은 없다. 하지만 나는 자신이 어떤 ‘이데올로기의 노예’가 아닌지 불안하다. 어쩌면 누군가 만들어놓은 거대한 매트릭스의 한 부분으로 놀아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걱정된다. 한번 알아보아야겠다. 어쩌다가 이렇게 생겨먹었는지, 왜 그런 물이 들었는지. 그러다 보면 내가 인간으로서 가망이 있는지 아니면 세상에 아무 도움이 안되고 밥만 축내는 자인지 알 수 있을지 모른다. 이 글은 그러한 정체성들 중에서도 무신론자라는 정체성에 대한 두서없는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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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처음으로 종교적인 구원을 필요로 했던 날은 수십년이 지났건만 잊혀지지 않는다. 열두살이던 1977년 12월 24일 밤의 일이다. 부모님은 여동생과 어딘가로 외출했고, 형은 성탄전야라서 교회에 가고 없었다. 겁이 많았던 나는 불안한 상태에서 혼자 집을 지키며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설익은 머릿속에 ‘내가 죽으면 어떻게 될까’라는 물음이 떠올랐다. 이전에는 생각해보지 않은 주제를 두고 궁리한 끝에, 나는 너무도 당연한 사실에 이르렀다. 죽으면 ‘나’라는 존재가 지워져서 태어나기 전과 마찬가지의 상태로 된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나는 공포를 느꼈다. 마치 제대로 겪는 실연의 아픔이 ‘총 맞은 것처럼’ 실제적인 통증을 수반하듯 신체적인 고통이 느껴졌다. 워낙 소심한 성격인지라 그후 몇년 동안 하루에 한두번씩 나는 그러한 심리적 공황을 반복하여 체험했다. 그것은 나로 하여금 하나님이든 누구든 누군가 제발 이런 생각을 하지 않게 해주었으면 하고 원하게 만들었다. 몇번 가까운 친구들에게 너희도 그런 생각을 하느냐고 물었지만 그들은 ‘이런 한심한 겁쟁이가 있나’ 하는 표정으로 나를 물끄러미 쳐다볼 뿐이었다. 나는 혼자만의 고민에 빠진 가엾은 아이였다. 그러한 공황체험은 나이가 들수록 빈도가 줄어들다가 이십대 중반을 넘어서야 거의 사라졌다.
그무렵 나는 서울의 상암동에 살고 있었다. 지금은 월드컵경기장이 들어선 번듯한 동네가 됐지만, 당시만 해도 상암동은 서울에서 가장 낙후된 변두리였다. 부모님은 동네에 몇 안되는 2층 상가건물의 1층을 세내서 가게 겸 가옥으로 사용했는데, 그 건물의 2층이 감리교회였다. 젊은 목사님이 이끌어가는 개척교회였는데, 나는 여자아이들도 만날 겸 들락날락하고 있었다. 나는 그곳에서 하나님을 영접하지 못했다. 몇년에 걸쳐 교회를 다니다 말다 했지만 단 한번도 제대로 된 교인이 되지 못했다. 그런가 하면 내가 다닌 이화여대 부속중학교는 미션스쿨이었다. 성경수업이 있었고, 일주일에 한번씩 의무적으로 이화여대 대강당에서 예배를 드렸다. 나는 성경이 훌륭한 말씀이라는 것, 예수님이 상당히 존경할 만한 분이라는 것에는 공감했지만 어린 마음에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하나님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감정적인 측면에서 하나님에 대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