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평론
‘나’는 왜 ‘너’인가
박소란 朴笑蘭
시인. 시집 『심장에 가까운 말』 『한 사람의 닫힌 문』 등이 있음.
noisepark510@hanmail.net
얼마 전 이연주(1953~92)의 시집을 다시 읽었다. 꼭 30년 전인 1991년 10월에 발간된 『매음녀가 있는 밤의 시장』(세계사). 이 시집을 아끼는 이들은 공감할 것이다. 책장을 넘길 때면 언제나 묘한 열기를 감지하게 된다는 것. “거리마다 화농한 살덩어리/불그스름한 피고름이 질펀하오.”(「집행자는 편지를 읽을 시간이 없다」)와 같은 적나라한 현실 인식 때문인지, “배가 고파요 내 죽음을 도마에 올려 놓고 실제 한번 토막내 보시라구요”(「죽음을 소재로 한 두 가지의 개성 2」) 등 도처에 산적한 죽음의 이미지 때문인지. 어쨌든 시집을 채운 여러 강렬한 시편들 가운데 유독 마음을 붙드는 시는 이런 것이다.
달아오른 한 대의 석유 난로를 지나
진찰대 옆에서 익숙하게 아랫도리를 벗는다.
양다리가 벌려지고
고름 섞인 누런 체액이 면봉에 둘둘 감겨
유리관 속에 담아진다.
꽝꽝 얼어붙은 창 바깥에서
흠뻑 눈을 뒤집어쓴 나무 잔가지들이 키들키들
그녀를 웃는다.
반쯤 부서진 문짝을 박살내고 아버지가 집을 나가던 날
그날도 함박눈 내렸다.
검진실, 이층 계단을 오르며
그녀의 마르고 주린 손가락들은 호주머니 속에서
부지런히 무엇인가를 찾아 꼬물거린다.
한때는 검은 머리칼 찰지던 그녀,
몇 번의 마른기침 뒤 뱉어내는
된가래에 추억들이 엉겨 붙는다.
지독한 삶의 냄새로부터
쉬고 싶다.
원하는 방향으로 삶이 흘러가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일까……
함박눈 내린다.
—「매음녀 4」 부분
시인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을 ‘매음녀’ 연작 중에서도 이 시는 여러모로 놀라운데, 지금에 와 특히 예사롭지 않다고 여겨지는 부분은 시의 후반이다. 마지막 두 연, 매음녀인 ‘그녀’가 쉼표(,)를 남기고 불쑥 자취를 감춘 순간. ‘그녀’는 어디로 갔을까. 주어를 잃고 부유하듯 이어지는 “지독한 삶의 냄새로부터/쉬고 싶다.//원하는 방향으로 삶이 흘러가는 사람들은/어떤 사람들일까……”라는 아픈 독백은 누구의 육성일까. 표면적으로는 분명 생략된 ‘그녀’의 것이겠으나, 여러번 들여다볼수록 이는 왠지 시인의 것에 가까워 보인다. 어느 틈엔가 불쑥 ‘그녀’가 시인이자 화자로 전이된 것이다,라고 한다면 지나친 감상일까. ‘그녀’라는 타인을 향한 시인의 이입 혹은 몰입이라고 한다면.
시집 전반을 통해 이런 광경을 거듭 마주하다보면 시인의 생애가 왜 그다지도 짧을 수밖에 없었는지 감히 짐작하게 된다. 물론 여기서 그 형편을 세세히 파고들려는 것은 아니다. 다만 한가지 강조하고 싶은 것은 일순간 ‘그녀’를 ‘나’로 받아 안은 시와 시인의 진정(眞情) 앞에 한 사람의 독자인 나는 어떤 신비와 경이를 느낀다는 사실이다.
타인의 감정에 진정으로 감응하는 시. 타인과의 교통을 이끄는 시. 문학의 본령을 상기하도록 하는 이런 시가 지닌 힘은 실로 강력할 수밖에. 그러나 이런 시를 발견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오늘날 우리는 문학의 안과 밖을 막론하고 대체로 자신 속에 지나치게 함몰되어 있으니까. 어떤 경우 이는 자신에 대한 치열한 탐색이라기보다 세계와의 재빠른 ‘손절’로 읽힌다. 우리가 발 딛고 살아가는 세계는 지워지고 ‘나’만 남아 부유하는. 자신을 타인과는 다른 특별한 주체로 규정한 뒤 그 비대해진 자의식을 고스란히 노출하기도 한다. 자기중심의 여느 유아적 유희가 그렇듯 이는 결국 현실과의 관계를 무너뜨리고 한층 깊은 고립으로 이어진다. (나의 시 쓰기 역시 이런 혐의에서 자유롭지 못함을 안다.)
세계와의 유기성을 구축하고 자신과 타인을 동일선상의 연대적 존재로 인식하는 일은 분명 일정한 수고와 에너지를 요한다. 복잡한 현실의 면면에 제대로 대응할 수 없다는 패배감을 회피하고자 하는 욕망, 손쉬운 허무와 감상에의 유혹을 이긴 결과일 테니까. 이런 에너지는 어디서 어떻게 생겨나는 걸까. 다행스럽게도 최근의 몇몇 시는 여전히 이같은 질문을 가능하게 했다.
먼저, 유병록. 두번째 시집 『아무 다짐도 하지 않기로 해요』(창비 2020)를 즈음한 유병록은 한창 ‘고통’의 시인이다. 스스로 “슬픔이 휩쓸고 지나간 폐허”(「다행이다 비극이다」)임을 숨기지 않고 자신만의 내밀한 시적 풍경을 그려낸다. 이야기의 초점은 대체로 한 ‘죽음’에 맞춰져 있다. 시인은 그것을 “죽은 이의 몸을 태워 한줌의 가루로 만든” ‘불’의 사건이라 명명한다. 죽은 이는 “이미 뜨거움을 느끼지 못하”고 “몸을 움츠리지도 않”는데, 졸지에 “남은 자”가 된 그는 “불길 가까이 다가갔다가 화들짝 놀라서 물러서”(「불의 노동」)곤 하는 것.
이 결정적 사건을 두고 취하는 시인의 자세는 조금 특별하다. 그는 “산 자가 죽음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는가”(「질문들」) 자문하고, “고통을 연주하는 음악이 아름다워도 될까”(「악공이 떠나고」) 회의한다. 일반의 작가적 검열이라기보다, 죽음의 위력 앞에 소중한 이를 지키지 못했다는 절망과 자책 등의 감정이 합쳐진 일종의 결벽적 산물로 보인다. 동시에 그 고통이 정련되고 원숙해지는 과정일 수도 있겠다. 그렇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