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 21세기, 어떤 시대인가

 

나와 우리, 그리고 세상

통일시대의 문학

 

 

최원식 崔元植

인하대 인문학부 교수. 평론집으로 『생산적 대화를 위하여』 『민족문학의 논리』 등이 있음. cws919@inha.ac.kr

 

 

1. 우리들의 시대

 

얼마 전 흥미로운 얘기를 들었다. 대학생들에게 이문구(李文求)의 『관촌수필(冠村隨筆)』(1977)을 읽혔더니 아주 재미있어하더라는 것이다. 약간은 뜻밖이다. 사실 나도 황석영(黃晳暎)의 「객지」(1971)를 학생들과 함께 검토한 적이 있는데, 보고서에 나타난 반응의 주류는 줄거리를 따라가기도 힘들었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그처럼 참담한 노동현실이 우리 사회에 존재했다는, 아니 아직도 다른 차원에서 존재할 수 있다는 진실로부터 도망가고 싶은 무의식적 방어심리도 한몫을 했던 것 같다. 그럼에도 고생해서 읽은 보람이 있었다고 감사하는 학생들이 많아서 새삼 기억의 전승에 있어 교육의 중요성을 스스로 다짐한 바 있었다. 그때는 마침 IMF사태의 여파가 미쳐서, 실직한 또는 실직의 위험에 처해 거리로 뛰쳐나간 아버지들의 경우와 학생들 스스로 대조가 가능했기에, 이 작품이 던져준 충격을 이만큼이라도 완충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이 작품을 남에게 권하겠냐는 질문에는 반으로 갈렸다. 오늘의 젊은 독자들이 이 작품과 힘겹게 화해하는 착잡한 과정을 지켜보았기에 이문구에 대한 반응이 의외였던 것이다. 그래 『관촌수필』의 어떤 점을 재미있어하더냐고 물으니, 그 대답이 걸작이다. 이 작품집의 세계를 포스트모던한 것으로 수용해서 놀랐다는 얘기다. 이 맹랑한 도시의 아이들에게 이문구의 웅숭한 농촌이야기는, 도시의 성찬(盛饌)에 물린 이들이 토종 맛을 우정 찾듯이, 오히려 진기한 ‘보물섬’으로 여겨졌던 모양이다. 황석영과 이문구에 대한 반응은 겉으로는 상반되는 듯, 기실 상통한다. 소통의 가능성 여부를 떠나서 두 반응 모두, 현실독자와 70년대 (민족)문학 사이에 심리적 거리가 엄존한다는 점에 말미암은 것이기 때문이다.

분단과 독재 아래 고통받는 민중의 발견을 핵심 의제(議題)로 우리 민족의 역사적 운명을 본격적으로 탐구하기 시작한 70년대 민족문학운동이 산출한 최고의 작품들에 대한 요즘 독자들의 반응에서 엿볼 수 있듯이, 90년대 이후, 특히 최근 들어 더욱, ‘민족’ ‘국가’ ‘민중’ ‘계급’과 같은 집합적 표상에 대한 의식적·무의식적 충성이 현저히 약화되었다. 20세기 전반기의 식민지시대와 그 후반기의 분단시대를 겪어오면서 거의 내면화하였다고 보아도 좋을 그 충성 덕에 그 표상들은 감히 부정할 수 없는 일종의 신성상징으로 되었던 것이다. 물론 좌·우파 사이에 다양한 또는 미묘한 편차가 존재했다. 가령 우파들은 ‘민중’과 ‘계급’에 비우호적이고, 좌파들은 ‘민족’과 ‘국가’에 대해 소극적이었다. 그런데 이 의식의 정치학에서 한걸음만 층계를 내려가면 풍경은 교차한다. 현실적으로는 시종일관 지배적 우위를 점유하면서도 끊임없이 정당성의 위기에 시달려온 우파는 좌파를 과잉의식하고, 좌파들은, 특히 동아시아 민족해방형 사회주의에 두드러지듯이 근본적으로 애국적이다. 이 흥미로운 적대적 공존을 가능하게 한 꼭지점에 바로 한국현대사의 비원(悲願), 나라 만들기(nation-building)가 놓여 있지 않을까? 이 점에서 70년대에 산출된 민족문학의 고전적인 작품들이 세대의 이월(移越)에서 일정한 장애에 부딪치고 있는 최근의 변화는 괄목상대(刮目相對)할 일이 아닐 수 없다.

그 원인은 무엇일까? 우선 이 작품들 자체의 이월가치에 의문을 품을 수 있겠다. 그런데 독자들이 노력 끝에 소통에 성공하는 것을 보노라면 수용자측에 문제가 생겼다고 판단된다. 재독의 기회를 가진 「객지」의 경우, 내가 읽기에도 때로 뻑뻑했다. 강철무지개처럼 쨍쨍하지만, 독자가 참여할 틈을 좀체 주지 않는 작품이다. 바꾸어 말하면 철저히 생산자 중심의 ‘작품’(work)이어서, 수용자가 놀 수 있는 ‘텍스트’(text)의 성격이 부족한 것이다. 서사공간 밖의 작가 또는 그 안에서 작가를 대행하는 이야기꾼이 서사상황 전체를 빈틈없이 통어하는 리얼리즘적 서사전략에 대한 독자의 적응에 균열이 발생했다고 보아도 좋다. 이 현상이 꼭 부정적인 것만은 아닐 터이다. 어떤 점에서는 민주화의 진전이기도 하다. 작품 안에서 누리던 권위적 위치에 기초한 작가의 일방통행 시대가 어느 틈에 종언을 고하고 있다는 예감이 실감으로 다가서는 것이다.

시대의 표정에 미묘한 변화가 일어났다. 최근 알렉산더시대를 다룬 옛 논문을 흥미롭게 읽었다. 덕분에, 기원전 334년 알렉산더의 동정(東征) 개시에서 고대사를 양분하는 계기를 발견한 19세기 독일 사학자 드로이젠(J.G. Droysen)을 알게 되었다.1 알렉산더 이후를 지칭하는 ‘헬레니즘’이란 용어의 발명자이기도 한 그는 전기를 동방 전제정치와 그리스 도시국가의 시기로, 후기를 그 독특한 융합에 기초한 알렉산더의 세계제국 시기로 나누었는데, 그 변화는 ‘도시국가(polis)에서 세계국가(cosmopolis)로’ 요약할 수 있겠다. 이에 대응하여 도시국가에 충성스런 ‘시민’(polites)으로부터 탈각, 코스모스를 조국으로 삼는 ‘세계시민’(cosmopolites)이 탄생하였다. 교역과 여행기회의 증대 속에서 태어난 세계시민은 폴리스 중심, 신분 중심, 또는 종족 중심의 낡은 결속으로부터 결정적으로 해방된 ‘개인의 강화’(accentuation of personality)와 맞물려 있으니, 헬레니즘이라는 조숙한 보편주의 물결과 개인주의는 동전의 양면을 이루는 것이다. 이 점에서 이 시대를 대표하는 스토아철학이 “개체적 인격이 지니는 긍지에 넘치는 확고부동한 존엄성”2을 내세우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그런데 인종 또는 국적의 차이를 넘어선 세계시민적 개인에 대한 스토아적 강조가 “알렉산더대왕의 후계자들이 형성한 제국이라는 기성사실의 표현”이라는 하우저(A. Hauser)의 지적을 기억해야 한다. 초국가적 자본주의 단계의 국제적 혼합문화의 물결 속에서 동방과 서방, 그리스와 주변민족, 계층과 계층 사이의 경계를 지우는 사회적 평준화가 빠르게 진행되면서 “개인에게 주어진 기회의 동질성에 따라 구성”된 이익공동체가 출현함에 따라 고전 그리스시대의 폴리스 시민이념이 급속히 해체되었던 헬레니즘 시대3는 거의 현대세계를 방불케 하는 것이다. 또한 이 격동의 개인주의 시대에 유토피아적 몽상도 더욱 강렬해졌으니, 기독교·이슬람교·불교·힌두교 등 세계 4대종교가 헬레니즘과 오리엔트 문명의 해후 속에 출현했다는 지적도 유의할 대목이 아닐 수 없다.4

우리 시대의 알렉산더는 전지구적 자본이다. 특히 문민정부 출범 이후 더욱 두드러진 자본의 격렬한 진군 속에 집합적 표상들에 대한 충성이 약화된 개인들이 젊은 세대 속에서 증가하였다. 사회적 보편 속에 특수로서 위치하는 개인이 아니라 그 맥락으로부터 자유로운 단독자로서의 개인이 출현한 것이다. 그 단적인 징표의 하나가 머리 물들이기다. 거의 태생적 숙명으로 여겨졌던 머리색깔마저 바꾸는 행위는 인종적 또는 민족적 고착지표에 대한 의식적·무의식적 교란이 아닐 수 없다. 개인의 탄생은 동아시아 현대사의 숙원의 하나였다. 서구근대를 앞서서 수용했던 일본이 ‘individual’을 번역하느라 골머리를 앓은 경험은 흥미롭다. “신에 대해서 홀로인 인간, 또는 사회에 대해서 궁극적 단위로서 홀로인 인간”5을 뜻하는 이 서양용어의 실제태가 일본사회에 부재했기 때문이다. 더구나 이 용어는 ‘society’와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다. 특정한 이해(利害)와 목적을 위해 형성된 인간집단 또는 그 생활방식을 지칭하는 후자 또한 일본인에게는 난해했다. 전자 없이 후자도 성립할 수 없기 때문이다. 결국 근대가 하나의 제도로서 정착한 메이지(明治) 20년대에 가서야 전자는 ‘개인’으로 후자는 ‘사회’로 번역어가 안착했던 것이다. 그런데 이처럼 어려운 과정을 통해 정착된 이 용어들이 그 이후 일본사회 안에서 구체적 내용을 순조롭게 획득하지는 못했다. 개인이고 사회고 조숙한 군국주의 물결 속에 동원·흡수돼버린 것은 이미 주지하는 바이다. 한국에서도 이 사정은 다른 차원에서 유사하게 진행되었다고 할 수 있다.

저간의 사정에 비추어볼 때 최근 한국사회의 개인주의의 심화는 긍정적인 면이 없지 않다. 물론 그 개인이 오랜 결속으로부터는 탈각했지만 아직 사회로의 적절한 통로를 찾지 못했다는 점에서 문제적이긴 하다. 개인은 결국 적대적이든 통합적이든 사회와의 관계맺음에서 형성·정립되는 것이기 때문인데, 이 과제는 여전히 우리가 성취해야 할 근대 기획의 핵심이다. 그런데 근대극복의 전망 없이 ‘개인 대 사회’라는 고정축만에 지필 때 이 전형적 근대기획 또한 제대로 성취될 수 없다는 점에 유의해야 한다. 최근 우리 사회에서 증대하는 해체적 개인주의는 개인과 사회의 균형을 이념형으로 삼는 서구적 개인주의의 귀결태(歸結態)일지도 모른다. 압축성장을 거듭해온 한국사회야말로 서구 근대의 숨은 모순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거울이기 때문이다. 자율적 인격이라는 모형에 기초하여 개인을 사회적 최소단위의 실체로서 구축하는 것을 궁극적 목표로 삼는 한, 개인은 결국 단자화(單子化)의 운명을 면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렇다고 예전처럼 집합적 훈육 속에 개인을 창출하자는 것은 아니다. 이미 그런 시대는 지나갔다. 남한사회에서 진행되는 해체적 개인주의가 함유하는 긍정·부정의 양면성에 주목하면서 어떻게 사회적 통합을 새롭게 구축할 것인가? 아상(我相)의 집착과 아공(我空)의 허무라는 양변을 여의고 개인을 탈구축적으로 재구축하는 복안(複眼)의 시각을 견지하는 것이 관건이다. 인연 따라 모였다 인연 따라 흩어지는 모든 목숨받은 유정(有情)들의 슬프고도 찬란한 유전(流轉)을 알아차릴 때, 없으면서 있는 개인들의 궁극적 상호의존성에 입각, 타자를 배제하고 동일성의 무한복제로 떨어지기 쉬운 주체의 형이상학을 넘어서 새로운 사회적 통합의 단초를 잡아챌 터이다.

한반도는 목하(目下) 새로운 시대, 통일시대로 진입하고 있다. 냉전의 해체가 불안하면서도 기이하게 안정적이었던 한반도 분단체제의 와해를 향해 드디어 본격적으로 작동하기 시작하였다. 낡은 시대의 종언과 새 시대의 시작이 겹쳐지는 이 미묘한 회색지대, 날카로운 과도기가 그랬듯이, 아마도 적지 않은 곤란이 예상된다. 6·15선언이 확인하였듯이, 한반도의 통일은 남에 의한 흡수통일 또는 북에 의한 무력통일을 배제한 평화통일을 지향하기 때문에 극적인 통일이 야기할 극적인 혼란의 위험은 거의 없을 것이다. 평화통일이 연착륙할 경우, 우리는 새로운 차원의 곤란에 직면할지도 모르는데, 아마도 초유(初有)라고 보아도 좋을 평화통일의 실험이 지금 한반도에서 발진하고 있다는 높은 자각이 절실히 요구되는 국면이다.  물론 이를 너무 특권화할 필요는 없다. 사실 한반도의 통일은 새로운 단계의 전지구적 자본의 요구라는 측면이 없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통일에 냉담한 또는 부정적인 태도를 견지하다가 정작 통일 앞에 황망했던 독일의 진보적 지식인의 전철을 되짚어서는 안된다. 우리가

  1. 池東植 「아렉산더대왕과 世界市民主義思想」, 『史叢』 제2집(고대 사학회 1957) 78면.
  2. H.J. 슈퇴릭히, 林錫珍 역 『세계철학사』 상권(왜관: 분도출판사 1983) 257면.
  3. A. 하우저, 白樂晴 역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 고대·중세편』(창작과비평사 1976) 118〜19면.
  4. A. 토인비, 盧明植 역 『역사의 연구』 Ⅱ(삼성출판사 1993) 239면.
  5. 柳父章 『飜譯語成立事情』(東京: 岩波書店 1997) 33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