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 한국소설의 새로운 가능성을 찾는다

 

남과 북의 새로운 역사감각들

김영하의 『검은 꽃』과 홍석중의 『황진이』

 

 

최원식 崔元植

문학평론가, 인하대 인문학부 교수. 저서로 『문학의 귀환』 『생산적 대화를 위하여』 『민족문학의 논리』 『한국계몽주의문학사론』 등이 있음. ps919@hanmail.net

 

 

1. 하위자집단의 반란

 

최근 역사물이 대유행이다. 「다모(茶母)」(2003)에서 시작하여 「대장금(大長今)」(2004)으로 이어진 사극열(史劇熱)에는 새로운 역사감각이 준동하고 있다. 궁중암투극으로 시종하던 기존 역사물에서는 전경(前景)으로 나서기 어려운 다모나 궁녀 또는 의녀(醫女) 같은 하위자들이 드라마의 축으로 떠오른 것은 중세 기사도소설(romance)이 근대 ‘부르주아 서사시’(novel)로 이행한 변화에 준한다고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니다. 그런데 왕실과 양반관인층이 지배하던 궁정사극을 일거에 해체한 이 하위자 반란은 단지 때늦은 부르주아혁명일까? 최근 역사물에 또렷이 드러난 반란적 성격은 2002년 월드컵에 신화처럼 출현하여 마침내 참여정부를 출범시킨 대중의 문화적 폭발과 일정하게 연락될 것이다.‘구텐베르크 은하계’와 경쟁하는 ‘인터넷 은하계’, 이 미지의 영토에 익숙한 이 ‘대중’은 왕년의 ‘민중’ 즉 민족주의 또는 사회주의 기획에 기초한 역사의식으로 무장한 민중이 아니다. 그것은 민중을 계승하는 한편, 민중의 전위적 성격을 다시 해체하고 있기 때문이다. 저항적 전위가 새로운 지배집단으로 전향하는 것에 대한 거의 무의식적 경계심을 공유하고 있는 새로운 대중 또는 새로운 민중은 근대와 탈근대의 경계에 둥지를 틀고 있는지도 모른다.

대중문화부문에서 뚜렷한 새로운 역사감각은 역사소설에서 이미 징후를 드러낸 바 있다. 그 앞장에 선 작가가 김탁환(金琸桓)이다. 그는, 우리 민족주의서사를 대표하는 이순신(李舜臣) 이야기를 탈신화화한 『불멸』(전4권,1998) 이후, 『홍길동전(洪吉童傳)』보다 더 소설적인 작자 허균(許筠) 이야기를 ‘복원’한 『허균, 최후의 19일』(전2권,1999), 그리고 명·청 교체기의 격동 속에서 좌절한 광해군 기획의 전말을 새로 쓴 『압록강』(전7권,2000~ 2001)에 이르는 “조선중기 비극 3부작”1의 완결을 통해, 외롭게 그럼에도 집요하게 이 작업을 추진해왔다. 이 고독한 작업은 또하나의 ‘주변인’ 김훈(金薰)의 가세로 새로운 국면을 맞이한다. 역시 이순신에서 취재한 『칼의 노래』(2001)가 그해 동인문학상 수상작으로 선정되면서 세간의 주목을 받기 시작하더니, 급기야 노대통령과 그 참모들의 애독서로 선전되면서, 뜻밖에도 베스트쎌러로 떠올랐던 것이다. 이 작품은 『불멸』에서 드러나기 시작한 이순신의 탈영웅화를 한 극점까지 끌고 간 소설이다. 그런데 ‘나, 이순신’의 긴 독백으로 점철된 이 소설에서 독자가 만나는 인물은 이순신인가? 그것은 ‘김훈의 이순신’, 아니 이순신의 의상을 입은 작가 자신일지도 모른다. 김훈은 뛰어난 복화술사(腹話術師)다. 안팎의 적의에 맞서 절대고독 속에서 전쟁을 수행한 비극적 무인의 황량한 내면풍경을 통해서 작가는 역사를 사적(私的)으로 전유한다. 작가는 말한다.“2000년 가을에 나는 다시 초야로 돌아왔다. 나는 정의로운 자들의 세상과 작별하였다. 나는 내 당대의 어떠한 가치도 긍정할 수 없었다. 제군들은 희망의 힘으로 살아 있는가. 그대들과 나누어 가질 희망이나 믿음이 나에게는 없다. 그러므로 그대들과 나는 영원한 남으로서 복되다. 나는 나 자신의 절박한 오류들과 더불어 혼자 살 것이다.”2 이 멋진 발언의 속뜻은 무엇인가? 작가는 수상 인터뷰에서 이 발언을 감싸고 있는 의고적 감상주의를 벗고 솔직하게 고백한다.“이 작품을 쓰게 된 힘은 이 세상에 대한 증오감”(『조선일보』 2001년 11월 7일자)이라고. 기실 이 작품의 반영웅주의는 영웅주의와 은밀히 제휴하고 있는 것이다. 이 점에서 이순신의 집합적 표상을 개체화하는 해체적 성격에도 불구하고 과거와 현재의 대화를 강잉(强仍)히 놓지 않으려는 『불멸』과 차별된다. 『칼의 노래』는 춘원(春園) 이광수(李光洙)의 『이순신』(1931)과 닮았다. 박해에도 불구하고 왕조에 충성을 바치는 이순신의 순교자적 면모를 부각함으로써 조선에 저주를 퍼붓는 이 작품에서 이광수는 어느 틈에 ‘식민지시대의 이순신’으로 자신을 축성(祝聖)한다. 물론 『칼의 노래』는 역사의 사적 전유를 민족주의로 포장한 춘원풍(春園風)과는 차별되는 작품이지만, 역사영웅을 작가의 입마개로 바꾸는 변신술은 공통적이다. 이 점에서 『칼의 노래』를 전반적으로 지배하고 있는, 독한 허무주의에 기초한 행동주의에 대한 경계를 애독자 특히 노대통령에게 환기하는 고언(苦言)이 인터넷에 떠도는 것도 흥미롭다. 바야흐로 새로운 역사감각들이 21세기 벽두의 한국사회를 유령처럼 배회하는 것 또한 우리 시대 넋의 한 모습일 터이다.

그런데 대중적 역사극과 역사소설에서 보이는 새로운 경향의 근원에 이은성(李恩成)의 허준(許浚) 이야기가 놓인다는 점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천한 신분에서 최고의 의료전문가로 떠오른 허준 이야기를 처음으로 창안한 사극 「집념」(1975~76)의 각본을 집필한 그는 그 소설화에 착수, 『동의보감』을 1984년부터 연재하는 도중 1988년 별세하였다. 이 미완의 소설이 창비에서 출간되고(1990) 때마침 이 소설에 의거하여 다시 드라마로 꾸며지면서(1991) 소설과 사극 모두 공전(空前)의 열기에 휩싸임으로써 작가의 소설적 죽음을 완성하였던 것이다. 반체제적이든 체제적이든 남성영웅들의 투쟁을 축으로 삼는 사극과 역사소설의 캐넌(canon)을 파괴하고 ‘권력의 교체서사’ 사이에서 실종된 허준 같은 인물의 숨은 영웅주의를 드러낸 이은성은 역사적 과거의 재현이 아니라 현재의 문화코드로 과거를 재창안하는 퓨전사극 또는 새 역사소설의 길을 열었다.3 허준 이야기에서는 보조자에 지나지 않던 의녀가 어의(御醫)로 등극한 「대장금」이나, 질서에 대한 도전과 그 수호라는 지극히 남성적인 세계의 가장 깊은 안쪽에 위치한 규방을 규찰하는 특수임무에나 투입되는 다모가 무협멜로의 여주인공으로 화려하게 상승한 「다모」는 허준 이야기를 한층 하방(下放)한 것이다. 물론 후자에는 황석영(黃晳暎)의 의적소설 『장길산(張吉山)』(1974~84)도 물리지만, ‘큰 이야기’로부터 ‘작은 이야기’로 코드를 바꾼 이은성이 더 직접적 원천으로 될 것이다. 남성주인공 중심에서 그 하위자인 여성주인공 중심으로 전환한 것도 그렇거니와, 허준보다 기록이 영성(零星)함으로써 상상의 자유를 더욱 누리는 퓨전사극의 등장은 하위자 반란이 새로운 수준으로 진행되고 있음을 잘 보여준다. 역사영웅의 정전을 해체한 김탁환과 김훈의 작업도 속종으로는 하위자 반란과 기맥(氣脈)을 통하는 것이라는 점에서, 통속소설과 본격소설의 중간지대에서 대중의 새로운 역사감각을 담아낸 이은성의 위치는 결코 가볍다고 할 수 없다.

우리 시대의 이 흥미로운 역사전쟁에 대해 한편에서는 원본으로서의 역사 또는 대문자 역사가 한줌의 ‘얄푸른 연기’로 사라지는 것이 아닐까 우려하고, 또 한편에서는 그 역사로부터의 탈주에 환호한다. 과연 이 전쟁은 어떻게 진행할 것인가? 나는 최근 두 편의 역사소설, 김영하(金英夏)의 『검은 꽃』과 홍석중(洪錫重)의 『황진이』를 흥미롭게 읽었다. 두 작품은 여러모로 대조적이다. 대한제국이 반식민지로 전락하기 직전(1905년 4월) 제물포항을 떠나 아득한 미주대륙으로 팔려간 멕시코 노동이민의 집단적 운명을 추적한 전자와, ‘조숙한 근대인’ 황진이(黃眞伊)의 초상을 16세기 개성이란 ‘장소의 혼’ 속에 재창안한 후자. 김영하가 1980년대 문학의 과잉사회성에 대한 반란을 주도한 1990년대 남한 신세대작가의 하나라면, 홍석중은 남한에도 잘 알려진 (북)조선의 중진작가다. 특히 『임꺽정(林巨正)』(1928~40)을 통해 의적소설의 길을 연 벽초(碧初) 홍명희(洪命憙)의 무거운 전통으로부터 대담하게 이탈한 후자는 최근 남한을 떠도는 역사감각이 북에서도 함께 작동하고 있음을 잘 보여준다. 남과 북은 역시 둘이면서 하나다. 새로운 변화의 물결을 타면서도 근본적 질문을 자제하지 않는 본격문학의 응전이라는 성격을 공유하고 있는 두 작품을 자상하게 검토하는 것은 우리 시대, 비평의 즐거운 임무일 터이다.

 

 

2. 집합적 자서전의 형식

 

역사로부터 실종한 멕시코 노동이민의 운명을 다룬 김영하의 『검은 꽃』(문학동네 2003)은 분명 민족서사시를 꿈꾸지 않는다. 한국인에게 멕시코는 지금도 여전히 너무나 멀다. 하와이 노동이민(1902~1905)이 20세기 한미관계의 복합 속에서 모국과의 인연이 단절되지 않은 집단이라면, 그 뻣센 에네껜(henequen,어저귀,龍舌蘭)농장으로 팔려간 멕시코 노동이민은 역사의 블랙홀로 사라진 ‘버림받은 백성’이다. 나라가 버린 또는 나라를 버린 1033명의 기민(棄民)들을 운반한 일포드(Ilford)호는 화물선이었다.[4. 최근 이 배의 사진과 기초항목이 공개되었다. 영국기선회사(Britain Steamship Co.Ld.) 소유의 일포드호는 1901년 영국 뉴카슬에서 건조

  1. 김탁환 「작가의 말」, 『압록강』 1, 열음사 2001,9면.
  2. 김훈 「책머리에」, 『칼의 노래』 1, 생각의 나무 2001,12면.
  3. 그러나 하위자 반란이 성공담이라는 대중코드에 제약되고 있는 점은 명백히 기억되어야 한다.“고백된 하나의 작은 악이 감춰진 많은 악에 대한 승인을 구제”(Roland Barthe, Mythologies, trans. by Annette Lavers, New York: Hill and Wang 1972, 42면)함으로써 다른 차원의 체제서사로 떨어지는 한계까지 옹호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