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단과 현장

 

남남갈등에서 한반도 선진사회로

어디가 중도며 어째서 변혁인가

 

 

백낙청 白樂晴

문학평론가, 서울대 명예교수. 올해 출간한 저서로 사회비평서 『한반도식 통일, 현재진행형』, 문학평론집 『통일시대 한국문학의 보람』이 있다. paiknc@snu.ac.kr

* 이 글은 ‘한반도 갈등, 어떻게 풀 것인가’라는 주제로 열린 ‘2006 한반도 평화와 상생을 위한 학술회의’(민족화해협력범국민협의회와 한겨레통일문화재단 공동주최, 2006년 9월 29일 서울 여의도 63빌딩 코스모스홀)의 제2부 ‘남남갈등 해결의 길—상호이해와 협력 그리고 사회통합’에서 발표한 내용을 수정 보완한 것이다. 당일 구두발표가 시간에 쫓겨 부실한데다 자료집의 내 발표문에서 모든 각주가 누락되는 사고마저 겹쳤기에 이렇게 보완할 기회가 생겨 더욱이나 다행스럽다. 회의중 토론과 이후의 사태진전을 감안해 추가한 내용을 더러는 본문에, 더러는 각주로 담았다. 논평해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드린다.

 

 

1. 시작하는 말

 

죽은 사회는 갈등이 없다. 그러나 갈등이 생명현상의 일부일지라도, 소모적인 갈등을 가급적 줄이고 불가피한 갈등을 생산적·창조적인 동력으로 활용하는 사회가 훌륭한 사회이며 남들이 본받음직한 선진사회일 것이다. 한국에서 사회통합을 말하는 것도 모든 갈등이 제거된 상태를 겨냥하기보다 소모적 갈등을 생산적 대화로 바꾸려는 것임은 물론이다. 그런 취지에서 ‘중도개혁주의’ ‘중도보수’ ‘화해와 상생’ ‘사회적 대타협’ 등 중도를 표방한 여러 노선이 제시되었고 나 자신 ‘변혁적 중도주의’1라는 것을 내놓기도 했다.

그런데 한국사회 내부의 갈등을 굳이 ‘남남갈등’으로 표현할 때는 남북간의 갈등을 포함한 남북관계를 염두에 두고 있다.2 2000년 6월의 남북정상회담과 공동선언은 남북화해를 위한 획기적 사건이었지만 남쪽 내부의 갈등을 오히려 격화시키는 결과를 낳기도 했던 것이다. 더구나 이것이 남북문제를 둘러싼 다툼만이 아니고, 예컨대 의약분업을 둘러싼 ‘의료대란’처럼 국내문제에 관한 이해대립이 대대적인 사회혼란으로 치닫기도 했다. 물론 당국의 미숙한 대응 등 여러 다른 요인이 개재했지만, 크게 볼 때 분단체제의 억압적 장치에 짓눌렸던 모순들이 표출된 것이며 과거에는 ‘안보 차원’에서 억제할 수도 있었을 갈등이 표면화되었다는 점에서 선진화의 한 과정이기도 했다. 사실 그 점은 남남갈등이라는 표현이 나오기 전인 1987년에도 6월항쟁으로 독재정권의 철권통치가 완화되자마자 노사갈등이 폭발한 ‘7·8월 노동대투쟁’의 경우 역시 마찬가지다.

그러나 이렇게 1987년 이후, 특히 2000년 이후 표출된 내부갈등들이 해결되거나 생산적으로 진화하지 못한 채 지속되는 경우가 많아지면서 한국사회는 소모적 논쟁과 대결이 넘쳐나는 위기를 겪고 있다. 이를 87년 6월항쟁과 그 직접적 후속사태들의 소산인 ‘87년체제’가 한계에 달한 현상으로 진단하기도 하는데,3 달리 표현해서 ‘87년체제’로부터 한걸음 더 나아갈 계기에 해당하는 ‘2000년체제’ 내지 ‘6·15시대’가 아직 충분한 힘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다는 진단도 가능하다.

그 점은 지난 10월 9일 북이 핵실험을 강행하면서 남쪽의 내부갈등이 전에 없이 심해진 데서도 확인된다. 나 자신은 10월 말에 6자회담 재개합의 소식이 전해지기 전에도 6·15시대와 한반도식 통일이 여전히 진행중임을 공언하고 다녔지만, 남남갈등의 한쪽 당사자로서 남북의 화해와 협력을 옹호하던 인사들조차 한때 6·15시대의 존속을 의심했을 만큼 공통의 인식이 부족한 실정이다. 그런 가운데서도 이번의—물론 아직도 미해결인—한반도의 핵위기가 분단현실 및 그 일부로서 북의 존재를 제쳐둔 채 남쪽 사회의 여러 문제와 갈등의 근본적 해결을 논하는 것이 허황된 일임을 일깨워준 점은 불행 중 다행이 아닐 수 없다.4

아무튼 기계적인 중간지대 찾기가 아닌 참된 중도(中道)는 당연히 시대현실에 대한 정확한 인식에 근거해야 할 터이며, 그러한 중도만이 불필요한 갈등을 해소하고 적절한 사회통합에 기여할 수 있을 것이다.

 

 

2. ‘대한민국의 정체성’에 관한 중도적 시각

 

‘보수’와 ‘진보’가 흑백논리를 내세워 소모적 논쟁을 키우곤 하는 본보기의 하나가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둘러싼 논란이다. 물론 이것이 공허한 논쟁만은 아니고 현실적 이해관계가 얽힌 다툼이기도 하지만, 기왕이면 좀더 차원높은 논쟁을 통해 다툴 것을 다투는 것이 선진사회로 가는 길일 터이다.

국가정체성을 즐겨 들먹이는 세력 중에는 1987년 이전의 강압체제와 거기서 비롯한 기득권에 연연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이들의 현실적 위세는 결코 무시할 수 없지만 담론 차원에서는 ‘보수’와 구별되는 ‘수구’로 돌려도 무방할 것이다. 그에 비해 1987년의 의의를 인정하고 6월항쟁 이래의 민주화과정이 국가정체성의 중요한 일부를 이룬다고 인식하는 새로운 보수논객들은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전면적으로 부인하는 극단론에 비해 상당한 설득력을 지니는 것이 사실이다.

문제는 이들 또한 자신이 설정한 ‘대한민국의 정체성’에 동조하지 않는 사람들을 ‘반대한민국 세력’으로 못박아 공인된 담론의 세계에서 배제하기 일쑤라는 점이다. 다음과 같은 발언을 최근의 한 예로 들 수 있겠다.

 

“저는 한국사회의 세력을 크게 셋으로 나눕니다. 반(反)대한민국 세력과 진보, 보수입니다. 반대한민국세력은 대한민국의 역사적 정통성 자체를 부정합니다. 이들은 흔히들 좌파적 역사관 또는 수정주의 역사관을 갖고 있어요. 기본적으로 역사를 민중과 외세의 대립으로, 가진자와 못가진자의 갈등으로 파악합니다. (…) 이 사람들을 제외한 나머지 세력들에서 진보·보수를 논해야 합니다.”5

 

본인이 직접 쓴 기고문이 아닌 대담기사이니만큼 엄밀한 분석의 대상으로 삼을 성질은 아니지만, 이런 식의 3분법이 수구세력의 2분법과 흡사한 결과가 되리라는 것은 쉽게 짐작할 수 있다.6 포용과 통합 및 민주적 소통의 논리라기보다 배제와 갈등조장의 논리로 작용하기 마련인 것이다.

물론 이러한 흑백논리가 보수진영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박세일(朴世逸) 교수가 비판하듯 대한민국의 기형적 출발을 문제삼아 오늘날까지도 그 국가적 존재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태도가 이른바 진보진영 일각에 엿보임은 사실이다. 게다가 진보담론의 또다른 일각에서는 오히려 박세일 교수와 비슷하게—그러나 물론 박교수와 같은 식으로 ‘배제’를 주장하지는 않으면서—‘분단시대적 시각’ 대 ‘대한민국 인정’이라는 이분법을 구사하기도 한다.7

이처럼 일견 다양하게 갈리는 입장들이 결과적으로 서로를 굳혀주고 키워주는 형국이 되는 데는 국가의 정체성(正體性)이라는 것을 너무 단순하게 이해하는 사고방식이 작용하고 있다. 한 국가의 정체성은 ‘역사적 정통성’과 ‘현재적 정당성’을 포함하는 복합적인 내용이며, 복수의 잣대로 평가한 결과도 호적에 적자(嫡子)로 올리고 말고 하듯 흑백으로 갈라지는 게 아니다. 역사의 진행에 따라 상대적 비중이 달라지는 사안인 것이다. 대한민국의 경우 일제 식민지지배에서 벗어나면서 나라가 타율적으로 분단된 상태에서 친일세력이 사회적 우위를 점한 국가로 출발한 것은 엄연한 사실이며, 뒤이은 폭압과 전쟁 및 분단고착의 상황에서 이런 국가의 정통성과 정당성을 의심하는 이런저런 저항논리에는 각기 그나름의 합리적 근거가 있었다

  1. 졸저 『한반도식 통일, 현재진행형』(창비 2006) 30~31, 58~69면 참조.
  2. 실제로 6·15공동선언 이후의 국내갈등을 대상으로 이 표현이 등장하기도 했다(경남대 극동문제연구소 편 『남남갈등—진단 및 해소방안』, 경남대학교 출판부 2004, 13~4 및 102면).
  3. 예컨대 『창작과비평』 2005년 겨울호 특집 ‘87년체제의 극복을 위하여’ 참조.
  4. 나의 창비주간논평 「북의 핵실험으로 한가해졌다?」(2006.10.24) 참조(magazine.changbi.com).
  5. 「경향과의 만남: 박세일 ‘선진화국민회의’ 공동상임위원장」, 『경향신문』 2006.9.19, 29면.
  6. 당일 토론에서 나성린(羅城麟) 교수는 박교수가 지칭하는 ‘반대한민국 세력’은 대한민국을 전면적으로 부정하는 극소수에 한정될 따름이라고 해명했다. 그런데 한국사회의 3대세력의 하나로 지목한 점이나 “좌파적 역사관 또는 수정주의 역사관” 같은 포괄적인 표현들을 볼 때 박교수가 과연 얼마나 ‘극소수’를 말하고 있는지도 불분명하려니와, 설혹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부정하는 인사들일지라도 그들이 (행동을 통해 국가전복을 꾀하는 것이 아니고) 담론의 장에서 활약하는 한 대화하고 소통하는 것이 자유민주주의의 기본원리일 것이다.
  7. 후자에 관한 논의로는 『한반도식 통일, 현재진행형』 62~3면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