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 한국소설의 새로운 가능성을 찾는다

 

낭만적 사랑은 어떻게 부정되는가

이만교와 정이현

 

백지연 白智延

문학평론가. 평론집 『미로 속을 질주하는 문학』이 있음. llauper@hananet.net

 

 

1. 사랑의 부재를 알리는 서사

 

낭만적 사랑의 유효성을 부정하는 냉소적인 나르시시스트는 근래 우리 소설에서 자주 볼 수 있는 캐릭터 중의 하나이다. 이들은 수많은 물질적 기호와 상품 등이 넘쳐흐르는 대중문화 속에서 사랑의 환상이 쉽게 변질될 수 있음을 직시한다.“사랑은 아무런 장벽도, 아무런 계급도, 아무런 법도 알지 못한다”라는 낭만적 신념은 사랑의 이데올로기가 본질적으로 환상을 필요로 함을 알려준다. 문학 속의 나르시시스트들이 부정하는 것은 이 환상의 허구성이다. 온통 사랑의 상품으로 치장되어 있는 문화현실 속에서 낭만적 사랑에 대한 의심과 부정의 태도는 연약한 자아를 감정의 상처로부터 보호하는 방식이기도 하다.

이만교(李萬敎)와 정이현의 소설에서 발견되는 사랑의 담론 역시 냉소적 나르시시즘의 자기보호적 측면을 반영하고 있다. 이들의 소설은 자본주의사회의 결혼과 가족제도를 둘러싼 물신화 현상, 계층화 현상에 민감한 촉수를 들이민다. 낭만적 사랑의 유효성을 진단하는 나르시시스트들의 책략은 이미 은희경(殷熙耕)과 김영하(金英夏)의 소설에서 노출된 바 있다. 은희경의 소설이 거듭 천명하는 자조와 냉소는 타인으로부터의 상처를 예감하는 자들이 보여주는 자구의 방식이며, 김영하의 소설에서 보여주는 자기단절의 태도 역시 같은 맥락에 서 있다. 이들의 소설은 낭만적 사랑을 견제하는 자기보호의 전략을 만들어내지만 그것 자체가 사랑에 대한 기대를 완전히 단절시키는 것은 아니다. 이들의 냉소적 나르시시즘은 오히려 타인과의 단절이 가져오는 고독의 공포를 암암리에 호소한다. 김영하의 소설에서 종종 드러나는 삶의 낭만성에 대한 감각이나, 은희경의 소설에서 드러나는 자기연기술(自己演技術)의 허구성은 나르시시즘의 본질이 소통욕구에 있음을 짐작하게 해준다.

이만교와 정이현의 소설이 이들 소설에 비해 한결 가볍게 다가온다면 그것은 나르시시즘에 덧씌워지기 쉬운 감정적 상처를 말끔히 지워내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만교와 정이현 소설의 인물들은 어떤 부담감도 없이 사랑의 문화적 기호가 퍼뜨려놓은 이미지들을 적극적으로 포식한다. 경제적인 조건으로 결혼상대를 가늠하는 결혼시장의 풍속, 여성과 남성을 묶어두는 순결이데올로기의 강박, 연애의 기술 속에 스며들어 있는 물신화(物神化)된 기호들, 행복을 과시하는 가족의 내적인 분열 등등 소설 속에서 파헤쳐지는 사랑의 위선적인 행태는 다양한 모습으로 드러난다. 낭만적 사랑이 포장해놓은 온갖 세속적인 가치들과 물신화된 욕망을 세세히 거론하고 분석하는 이들 소설은 통속적 세태묘사를 거침없이 동원한다. 결혼식장의 한 풍경 속으로, 맞선을 보는 남녀의 어색한 눈빛 사이로, 정결한 연인으로 보이려고 안간힘을 쓰는 여대생의 수줍은 미소 속으로 파고드는 작가의 시선은 그 자체로 경쾌하고 유연하다. 더이상 묘사에 대한 강박이나 윤리적 미의식에 얽매이지 않는 시대에 이들의 작품은 소비적 생산품으로서 소설이 지닌 특징을 선명하게 보여준다. 무수한 기호 속에서 자기연기술마저도 철저한 쾌락행위가 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이 과정은 소비사회의 소설이 암시하는 새로운 특징을 내포한다.

 

 

2. 가족로망스의 몰락과 결혼제도의 세속화: 『결혼은, 미친 짓이다』

 

이만교의 『결혼은, 미친 짓이다』(민음사 2000)는 물질화된 결혼문화에 대한 직설적인 공격을 담고 있는 작품이다. 자본주의적 결혼세태에 대한 작가의 비판적 관심이 어디에서부터 비롯되었는가를 알고 싶다면 이후에 씌어진 『머꼬네 집에 놀러 올래?』(문학동네 2001)를 먼저 읽어볼 필요가 있다.

‘머꼬네’ 식구들이 겪은 경제공황 속의 서민생활사를 세밀하게 그려낸 『머꼬네 집에 놀러 올래?』는 ‘IMF 시대의 가족로망스’라고 명명할 만하다. 복숭아밭으로 둘러싸인 마을 언덕 오르막에 자리한 아담한 단층집에 살던 식구들은 도시개발과 재건축 바람에 휩싸여 ‘지하로 내려앉고 있는 무덤’과도 같은 집에서 소시민의 삶을 이어나간다. 여유롭지는 않지만 소박하고 행복한 생활을 영위하던 식구들은 IMF 경제공황이 닥치면서 수난을 겪기 시작한다.

『머꼬네 집에 놀러 올래?』에서 그려지는 가족적 가치에 대한 신뢰는 경제적 궁핍의 생활 속에서도 여전히 서로를 아끼고 보듬는 화목한 식구들의 모습에서 발견된다. 식구들은 “꾀죄죄하니 차려입고는 다만 먹고살기 위해 다급하게 뛰어다니”(92면)지만 서로에 대한 우애와 사랑을 잃지 않는다. 이만교가 다른 소설들에서 보여주는 냉소적 시선과는 사뭇 다른 이 따뜻한 분위기는 『머꼬네 집에 놀러 올래?』가 지향하는 가족로망스가 다분히 과거지향적인 추억담임을 암시한다. 주인공에게는 귀여운 조카 머꼬와 자신이 사랑하는 여자친구가 함께하는 가족의 공간만이 바깥 세계의 폭풍우를 막아줄 수 있는 행복한 곳이 된다.“세상에서 가장 순결하고 빠르게 자라나는 머꼬와 세상에서 가장 예쁘고 가장 매력적인 해연이 마루에서 노는 모습”(160면)에 황홀해하는 주인공의 모습에서 짐작되듯이 머꼬네를 감싸는 것은 소박한 소시민적 행복론이다.

추억의 가족로망스는 농담과 과장에 의해 힘을 얻는다. 이전 시대의 가족소설과 달리 『머꼬네 집에 놀러 올래?』가 보여주는 새로운 면모가 있다면 세밀한 풍속을 다루는 유머러스한 묘사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돈을 벌기 위해 나물을 다듬던 사돈할머니가 잠결에 칼로 자기 손을 다듬는 바람에 병원에 실려가는 장면이나 다세대주택으로 변모한 머꼬네 집에 유명인들이 머물다 갔다는 식의 과장된 해학은 이 소설을 움직이는 중요한 힘이다. 소설을 빛내는 밝고 명랑한 웃음의 화법은 머꼬네 식구들에게 닥쳐온 외부적 역경이 얼마나 불합리한가를 역설적으로 드러내는 장치이기도 하다.

머꼬네 식구들은 가족공동체의 행복한 삶을 영위하려고 노력하지만 비정한 현실은 이를 허락하지 않는다. 이들이 꿈꾸는 가족애의 가치는 비정한 자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