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은희경 殷熙耕

1959년 전북 고창 출생. 1995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당선. 소설집 『타인에게 말 걸기』 『행복한 사람은 시계를 보지 않는다』, 장편소설 『새의 선물』 『마지막 춤은 나와 함께』 등이 있음.

 

 

 

내 고향에는 이제 눈이 내리지 않는다

 

 

1960년 2월생

사람들은 모두 내가 6월에 태어날 줄로만 알았다. 나의 부모가 결혼식을 올리기 두달 전 이미 나를 가졌다는 사실을 몰랐기 때문이다. 제대로 된 계산에 따르면 나는 4월에 태어나야 옳았다. 내가 태어나면 나의 부모님은 내가 팔삭둥이라고 우길 작정이었다. 그러나 나는 부모의 기대 따위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내가 세상에 나온 것은 2월이었다. 진짜 팔삭둥이였던 것이다. 며칠째 계속해서 눈이 퍼붓던 윤년 2월의 마지막날, 탯줄에 매달려 우는 붉고 작은 나를 문틈으로 흘끗 들여다본 아버지는 ‘요량 없고 성질 급한 놈’이라고 마땅찮은 첫인사를 던졌다고 한다.

장남인 나는 항렬자인 ‘준’자를 가운데에 넣어 준영이라고 이름이 지어졌다. 나에게 그것은 좋은 이름이 아니었다. ‘준’자나 ‘영’자는 처음 입에서 발음이 되어 나올 때 무척 힘이 들어갔다. 성까지 붙여서 ‘윤준영’이라고 발음하려면 더욱이나 목구멍에서부터 소리가 막혔다. 하긴 내 이름을 지은 것은 내가 말을 시작하기 이전이었으니 아버지도 내가 말더듬이란 걸 알았을 리가 없다. 달변이고 유식한 아버지에 따르면 말더듬이에는 같은 음절을 반복하는 연발성, 잡아끄는 신발성, 첫 발음이 나오지 않는 난발성 등이 있는데, 나의 경우는 그 모든 것을 고루 갖춘 복합성 완결판이었다. 아버지는 남에게 지적을 받기 전에 먼저 제 입으로 털어놓으면 덜 창피하다고 생각하는지 내가 있는 자리에서도 손님들에게 그 말을 자주 했다.

나에게는 다른 이름도 있었다. 베드로, 영세명이었다. 베드로는 언젠가 도래할 ‘신의 날’에 예수의 오른편에 앉을 수제자이자 교회의 반석이다. 내가 그 이름을 영세명으로 선택한 것은 단지 요셉, 로사리오, 라자로, 스테파노, 라파엘, 그런 이름들보다 발음하기가 훨씬 쉽기 때문이었다. 짐작하다시피 나는 무섭게도 말수가 적은 아이로 알려져 있었다. 그러나 이름을 물어도 대답하지 않는 것까지 말수 적은 데 해당시킬 수는 없었다. 나는 누가 내게 말을 거는 것을 두려워하다 못해 무시하려 했지만 이름을 묻는 어른에게까지 거만하게 굴 만큼 눈치없이 매를 버는 아이는 아니었다.

어쨌든 ‘윤준영’보다는 ‘베드로’라고 대답하는 쪽이 나았으므로 나는 학교보다 성당에 있을 때 더 마음이 편했고 또한 착한 표정까지 지을 수 있었다. 젊은 보좌신부님은 다른 아이들이 나를 놀리지 못하도록 엄히 주의를 주었다. 유명한 사람 가운데도 말더듬이가 많다며 써머씻 모옴이라든지 처칠이라든지 하는 이름을 들먹이기도 했는데 모두 내가 모르는 이름이었다. 다만 나는 그 훌륭한 사람들이 말더듬이라는 사실을 보좌신부님이 무슨 근거로 그렇게 쉽게 확신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으므로 나를 위로하기 위해 거짓말을 지어낸 신부님을 마음 깊이 따르기로 결심했다. 보좌신부님은 어머니에게도 친절하여 어머니의 영세명을 특별히 지어주었다. 그것은 파비올라였다. 먼 나라 왕녀였다는 파비올라라는 이름이 어머니에게 썩 어울리는 건 아니었지만 마리아나 요한나보다는 나은 것 같았다. 우리 집 식모였던 순덕이 누나는 마리아라는 이름을 갖고 싶어 교리공부를 시작했는데, 몇주일도 채우지 못하고 공장에 취직하기 위해 도시로 떠났다. 그해에는 도청소재지 근교에 제지공장과 코카콜라 공장이 세워져서 우리 동네의 많은 처녀들이 도시로 갔다.

또한 그해는 유난히 눈이 많이 내린 해였다. 녹슨 난로 속에서 조개탄이 탁, 탁, 튀며 타고 있는 교실 창문을 통해, 뿌옇게 성에가 덮인 아버지 제재소 사무실의 유리문을 통해 언제나 눈을 볼 수 있었다. 그 즈음엔 아버지가 계속 집을 비웠기 때문에 나는 마음놓고 이불 속에 엎드려 만화책을 보았다. 그것이 싫증나면 마루에 나와 앉아서 눈을 바라보았다. 장독 하나하나를 서서히 덮어가는 눈, 허공에서 잠시 머뭇거리며 어느 쪽으로 내려갈까 궁리하는 눈, 이웃집 굴뚝에서 피어오르는 연기 위에 질세라 날아와서 내려앉는 눈. 내리는 눈을 그렇게 한참 동안 보고 있자면 점점 머릿속이 텅 비어 아무 생각도 떠오르지 않았고 이내 가물가물 졸음이 찾아왔다. 불현듯 바람이 처마밑까지 들이칠 때 이마에 닿는 차가운 눈송이 아니면 언제 마루로 나왔는지 옆에서 들리는 어머니의 긴 한숨소리가 나를 깨우곤 했다.

그해 겨울 하면 생각나는 것으로 어머니의 기도도 빼놓을 수 없다. 어머니는 전에 없이 기도에 열심이었고 저녁미사 때마다 나를 데리고 성당에 갔다. 성당은 불빛이 드문드문 흩어져 있는 당산나무 마을에서도 더 들어가는 외진 동네에 있었는데, 어머니와 나는 갈 때는 뒷골목으로 해서 갔지만 돌아올 때는 밤이 깊었으므로 사거리 한길로 돌아서 오곤 했다. 초저녁 골목에는 덧창마다 노랗게 불이 밝혀져 있었고 청국장 고린내나 갈치 졸이는 단내, 김 굽는 냄새가 났다. 어쩌다 나무쪽문이 열리고 눈발 사이로 두부를 사러 나오는 바느질집 아주머니와 마주치기도 했다. 곰보인 아주머니는 언제나 똑같은 나일론 한복 치마의 허리를 동여매고 팔꿈치에 보풀이 많은 낡은 스웨터를 걸친 차림이었다. 사모님, 성당 가세요?라고 어머니에게 인사를 건넨 뒤, 준영이 공부 잘하지?라고 내게도 말을 붙였다. 갑자기 용을 쓰며 입술을 덜덜 떨기 시작하는 나를 대신해서 어머니는 내가 중학생이 되고부터는 키가 부쩍 자라 코트가 작아졌다고 대답해주었다. 고동색 모직에 진한 밤색 체크무늬가 있고 목깃에 인조털이 붙은 그 코트를 나는 4년째 입고 있었지만, 어머니 말과 달리 그다지 작아진 것은 아니었다.

나는 꿈을 자주 꾸는 편이었다. 어딘가를 마구 달리다가 날아오르려는 순간 낭떠러지 아래로 떨어지는 꿈을 가장 많이 꾸었다. 낭떠러지에 닿을 때마다 꿈속의 나는 중얼거리곤 했다. 언젠가 날아본 적이 있었어. 분명 날 수 있을 거야. 하지만 번번이 떨어지고 말았는데, 어머니는 그 꿈이 키가 크기 위해 꾸는 꿈이라고 말하곤 했다. 키 크는 꿈을 그렇게 많이 꾸는데도 내 키는 아주 조금씩밖에 자라지 않았다.

한 며칠 눈이 오지 않는 날도 있기는 했다. 포장이 된 한길의 눈은 하루면 다 녹아서 차 바큇자국을 따라 검은 길바닥이 드러났다. 그러나 응달에 쌓인 눈은 녹지 않은 채 먼지가 그을음처럼 내려앉아 지저분했다. 더러운 표면이 버석버석하게 얼어붙어서 눈이라기보다는 모랫더미 같았다. 며칠 동안 낮이면 녹고 밤이면 얼기를 반복하다보니 제법 단단해져서 쓰레기를 던져도 그 위에 가볍게 얹히고 말았다. 골목에 쌓인 눈이 가장 지저분했다. 연탄재나 흙 따위가 뒤섞이면서 진흙이 되어 질척거렸는데 저녁이면 흙이 달라붙어 구둣굽이 무거워진 처녀들과 날씬하게 줄이 선 바짓단을 더럽힌 멋쟁이 청년들이 투덜거리며 그 골목이 끝나는 곳에 있는 극장으로 향했다. 깊게 팬 자전거 바큇자국이 그대로 얼어붙어서 길이 울퉁불퉁해지기도 했다. 그러나  아침이 되면 밤새 내린 눈으로 세상은 다시 새하얗게 바뀌어 있었다.

방학식날 담임선생님은 흥분된 목소리로 우리 고장이 중앙신문에 났다고 전했다. 우리 고장은 기차역이 있는 도시까지 버스로 두 시간이 걸리는 외진 읍이었으므로 신문에 날 만한 일은 거의 일어나지 않았다. ‘거 참 신문에 날 일이네’ 하는 말은 하도 기가 막힌 일을 당했을 때나 쓰는, 별로 쓸 일이 없는 농담이었다. 전국에서 가장 높은 강설량을 보인 지역으로 지명만 언급되었을 뿐이지만 그 사실만으로 청년애향단장이기도 한 담임선생님은 감격한 듯했다.

12년 만의 폭설이라고 했다. 하긴 내가 태어나던 12년 전의 눈도 굉장했던 모양이었다. 특히나 그해에는 2월에 눈이 많았다고 하는데 제재소 주인인 아버지는 눈을 좋아하지 않았다.

눈 때문에 방학식은 운동장 대신 교실 안에서 치러졌다. 너희들이 중학생으로서 처음 맞는 겨울방학이다. 선생님이 길게 훈시를 늘어놓았다. 방학도 엄연한 학교생활의 연장이며, 학생의 본분은 어디까지나 면학에 정진하는 일뿐이란 걸 명심하도록. 선생님은 사거리 기름집의 둘째아들이었다. 기름집은 사거리의 예각에 있는 아주 조그만 가게였는데 수리조합장이 사거리의 하꼬방 같은 옛집 몇채를 사들여 허물고 그 자리에 새로 3층 건물을 지으려 하고 있었다. 선생님의 아버지는 집을 팔 마음이 없다고 고집을 부렸다. 그 집을 사지 못하면 수리조합장의 새 건물은 귀퉁이가 떨어져나가 모양이 우스꽝스러울 것이다. 옆방에 갈 때도 바로 건너가지 못하고 신발을 신고 일단 한길로 나가서 돌아들어가야 한다. 선생님은 늘 바닥에 검은 기름이 번들거리는 어둠침침한 기름집과 그 집의 처지와 꼭 닮은 자기 아버지의 존재가 고장의 발전을 가로막는다고 생각했으므로 부자간의 사이가 좋지 않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나는 그 소문에 관심이 있었다. 나는 소문 같은 걸 곧이곧대로 믿는 경솔한 사람은 아니었지만 아버지를 좋아하지 않는 아들 이야기라면 대체로 사실일 거라고 생각했다.

잠시 그쳤던 눈이 선생님의 훈시 도중에 다시 내리기 시작했다. 아이들은 일제히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지만 교단 위에 버티고 선 선생님의 눈길이 느껴지자 재빨리 자세를 바로했다. 그러나 홍두깨만한 지휘봉으로 교실바닥을 쿵쿵 내리치며 ‘주목!’을 크게 외쳤을 선생님도 이번만은 슬리퍼를 끌며 천천히 창가로 다가가 고장의 명예를 빛낸 하얀 눈발을 흐뭇하게 바라보는 것이었다. 생활통지표를 나눠줄 때 선생님은 내게 물었다. 윤준영, 요새 아버지 집에 계시냐? 내가 고개를 젓자 선생님은 이맛살을 모으고 알 듯 모를 듯 고개를 몇번 끄덕이더니 통지표를 내려다본 뒤, 이럴 때일수록 공부 더 열심히 해야지,라며 기어코 꾸중을 했다.

그해 방학식날은 크리스마스 이브이기도 했다.

내가 기다리는 것은 성탄미사가 아니라 초저녁에 펼쳐질 성탄축하 행사였다. 중등부 대표로 아녜스가 무대에 올라가 춤을 출 것이기 때문이었다. 수리조합장 집 셋째딸인 아녜스 오민희는 6학년 때 나와 같은 반이었다. 나는 한번도 아녜스에게 말을 붙여보지 못했다. 말문을 열려면 다른 아이의 열 배 가까운 시간이 필요했는데 피아노를 배우러 다니고 무용대회와 백일장에서 상을 받느라 바쁜 아녜스에게서 감히 시간을 뺏을 엄두가 나지 않았다. 언젠가 미사 때 아녜스는 우연히 내 옆자리에 앉았다. 그 미사가 끝난 뒤 아녜스가 먼저 내게 말을 붙였다. 윤준영, 너 성가 참 잘 부르더라. 그러더니 웃음을 참으려고 입꼬리를 어색하게 오물거리며 이렇게 덧붙였다. 노래할 때는 하나도 안 더듬던데. 나는 여자애에게 그 정도 칭찬쯤 들은 걸 갖고 썩 기뻐하지는 않는다는 듯이 간단하게 ‘고마워’라고 적절한 예의만 차리려고 마음먹었다. 그래서 눈을 내리깔고 침착하게 숨을 고르며 입술을 떨기 시작했는데 가까스로 소리가 나왔을 때 눈을 떠보니 아녜스의 자리는 텅 비어 있었다. 아녜스가 아무 대꾸 없는 나를 거만한 아이라고 생각하고 상처를 받은 것은 아닌지 약간 신경이 쓰였지만 나쁜 기억은 아니었다.

성탄축하 행사 가운데에는 선물교환 순서도 있었다. 나는 추석빔을 사러 어머니를 따라 양품점에 갔을 때 진분홍 테두리가 둘려 있고 자잘한 꽃무늬가 박힌 손수건을 눈여겨 봐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