촌평

 

내 마음의 에피스테메

강석경 장편소설 『내 안의 깊은 계단』, 창작과비평사 1999

 

이선옥 李仙玉

숙명여대 강사, 국문학

 

 

강석경(姜石景)은 「물 속의 방」 「거미의 집」 「폐구」 『숲 속의 방』 등으로 잘 알려진 작가이다. 특히 『숲 속의 방』은 이념적 투쟁에도 현실의 안전한 삶에도 뿌리내리지 못한 자의식적 인물을 통해, 80년대 고뇌하는 젊은이의 초상을 그려낸 소설로 우리에게 기억되고 있다. 그녀의 소설에는 언제나 뒤틀린 혈연의 굴레와 강팍한 사회현실이 인물들을 둘러싸고 있고, 이러한 세계와 인물이 팽팽한 긴장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하지만 인물들의 고뇌는 그녀를 ‘자아주의자’라고 불러도 좋을 만큼 강렬한 자의식에서 비롯된다. 그 때문에 끊임없이 광장공포증에 시달리고 나만의 방, 자아의 오롯한 세계를 찾아 떠도는 영혼들의 이야기가 강석경 소설세계의 중심이 되어왔다.

107-386새로이 발표된 장편 『내 안의 깊은 계단』 역시 그간의 소설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 이야기 구조만을 따라 읽어보면, 단조로울 정도로 혈연의 굴레나 억압적인 사회현실이 배경으로 깔려 있고, 그러한 어둠에 갇힌 자의식적 인물의 구도가 반복되는 것이다. 고고학을 전공하는 강주, 첩의 자식이라는 불행한 운명을 지고 가는 강주의 사촌 소정과 강희, 강주의 아이를 임신한 채 강희와 결혼하게 되는 이진, 이 네 사람의 뒤얽힌 운명은 그리 새로운 이야기는 아니다. 게다가 교통사고로 인한 강주의 갑작스런 죽음은 서사의 필연성마저 의심스럽게 만든다.

하지만 고고학이라는 소재와 다중 시점의 서술방식을 연결지어 다시 읽어보면, 작품의 의미는 전혀 달라진다. 1,3,5,9장에서 서술되는 고고학 발굴현장의 세밀한 묘사와 다채로운 고고학적 지식은 서사에 몰입하고자 하는 독자들에게는 끊임없는 방해꾼일지도 모른다. 강주, 소정, 강주, 강희, 강주, 강희, 소정, 이진 등으로 이야기의 주체가 각 장마다 달라지면서, 각각을 반영인물로 삼아 각자의 시점에서 보고 느끼고 말하게 하는 방식도 독자들의 발목을 잡고 늘어지기는 마찬가지이다. 왜 고고학인가. 이야기는 왜 토막나 있는가. 토막난 이야기의 사이사이를 채우고 있는 원삼국시대 유적의 발굴작업과 그에 대한 보고가 의미하는 것은 무엇인가. 천천히 그 유적들이 천년의 잠에서 깨어나는 과정을 다시 읽기 시작했을 때 이 소설의 재미는 발견의 과정에 있음을 알게 된다.

“발굴은 할리우드 영화에 나오는 보물찾기가 아니야. 이건 천팔백년 전 조상들의 숨결이 담긴 유물이야. (…) 작은 구슬 하나로도 시대를 추정할 수 있고 그래서 소중히 다루어야 하는 거야.”(13면) 강주가 후배에게 발굴의 정신에 대해 강조하는 이 대목에서 우리는 언뜻 작가의 목소리를 느낄 수 있다. 경제원칙과는 무관하게 끊임없는 인내심을 요구하는 발굴작업. 하지만 지나간 시간의 복원이고 보이지 않는 집단무의식의 발견이기 때문에 그것은 가치가 있는 일이다. 우리 속에 잠들어 있는 ‘우리’를 발견하는 과정이 고고학이라고 할 때, 내 안에 잠들어 있는 ‘나’ 역시 지난한 발굴작업을 요구하는 유적지인 것이다.  

“‘나’라는 화두를 들고” 여행을 떠나는 소정이 자신의 여행을 “묻혀 있는 내 일부를 발굴하기 위”한 “고고학 학습”(274면)으로 표현하는 것이나, “고고학으로 가득 차 있”는 “누구의 가슴속에나 저만이 딛고 내려가는 깊은 계단이 있”(198면)다는 이진의 말에서, ‘우리’를, ‘나’를 발견하는 방법이 바로 고고학적 발굴임을 확인할 수 있다. 떨어진 구슬들, 청동의 검, 날아가는 자세의 초록색 청동새, 거울 등 조각조각의 유물들은 아무 연관성이 없는 것 같지만, 그 징후들은 차츰 어떤 뚜렷한 ‘의도와 설계, 개념’으로 드러난다. 이처럼 우리를 발견하는 작업과 나를 발견하는 작업을 고고학적 방법으로 겹쳐놓음으로써 강석경은 자아와 집단의 역사를 새롭게 소통시키는 방식을 모색하는 것이다.

강주는 이러한 고고학의 의미를 이해하고 있는 인물이다. 그러한 인물이기에 그는 강희의 파괴적 욕망과 그에 이끌리는 이진의 열정을 감지한다. 또 사촌누이 소정의 고통에 진심으로 교감하면서 그녀에게 위안과 안식을 주는 인물이기도 하다. 우리 삶의 불행을 이해하고 또다른 병적인 징후들을 예감하는 것이다. 자신의 의미 찾기가 불가능한 현실에서 본다면, 언뜻 비치지만 잡을 수 없는 본질의 빛처럼 강주의 죽음은 예정된 소멸로 이해될 수 있다. 그리고 남은 사람들. 첩의 자식이라는 굴레를 냉소와 파괴로 넘어서려는 강희와 그의 열정에 휩쓸린 이진의 불행한 결혼생활이 남아 있다. 하지만 다시 길은 열린다. 첩의 자식이면서도 아들이라는 이유로 버젓이 장자로 대접받는 강희와 달리 자식으로 등재되지 않은 소정은 유폐된 삶 그 자체이다. 유부남과의 첫사랑에도 실패하고, 결혼에도 실패하지만 그녀는 자신의 순정한 삶을 포기하지 않는 인물이다.    

강주의 죽음과 소정의 새출발은 그래서 시작과 끝처럼 서로 맞물려 있다. 강주가 권했던 창사 여행에서 그녀는 ‘마왕퇴한묘’의 신비로움이나 ‘꾸이린’의 비경보다 더 아름다운 사람과 만나게 된다. 여행지에서의 하룻밤 사랑이라는 도식성이 느껴지긴 하지만 이국의 몽환적 분위기와 어울려 재생의 기호로서 기능하고 있다. 타인의 짐을 나누어질 줄 아는 사람이라고 표현되는 일본인 히로는 그녀에게 사람 사이의 교감과 사랑의 가능성을 알게 해준다. 그와의 만남은 일상에서 벗어난 여행지에서 이루어진 것이어서 그 만남이 현실의 관계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그러한 상징적 공간이기 때문에 그녀는 제도나 이익을 떠난 순수한 사람 사이의 친밀감을 경험할 수 있었으며, 이러한 자유의 경험은 유폐된 자아의 벽을 허물고 자신만의 세계를 찾겠다는 자각의 계기가 된다. “이제 사랑이 무엇인지 알기에 사랑을 찾아 또다른 혹성으로 떠나려 한다. 제도가 인간을 짓누르지 않는 자유의 땅으로.”(307〜308면) 제1장 ‘새장을 열어놓으면’으로 시작한 이 소설은 이렇게 자아를 찾아 떠나는 소정의 이야기로 끝을 맺고 있다.

그렇다고 소정의 재생 이미지가 모든 갈등을 해결하는 대안적 의미로 제시되지는 않는다. 죽은 사람과 남겨진 사람들, 불행의 굴레로 치닫는 사람들과 새로운 출발을 하는 사람들은 동시에 공존하며, 그것이 우리 시대의 어떠한 ‘의도와 설계, 개념’으로 드러날지는 미지수다. 각각의 징후로만 존재할 뿐. 다만 우리 안의 무엇인가, 내 안의 무엇인가를 발견하려는 고고학적 여행을 멈추지 않으리라는 것이 이 소설에서 우리가 발견할 수 있는 희망이다. 언젠가 내 마음의 퇴적층 속에서 푸꼬의 에피스테메를 발견할 수 있다면 우리는 집단과 자아를 훨씬 성숙한 자세로 대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