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 통일과정과 개혁과제

 

냉전구조들과 한반도의 지역적·전지구적 안보

 

 

브루스 커밍스 Bruce Cumings

미국 시카고대학 교수. 한국전쟁의 기원에 관한 방대한 연구 The Origins of the Korean War I·II 등 다수의 저서가 있으며, 최근 저서인 Korea’s Place in the Sun: A Modern History가 본사에서 번역·간행될 예정임. 본지에 「한국전쟁과 애치슨 발언」(64호) 「70년간의 위기와 오늘의 세계정치」(87호) 「비교론적 시각에서 본 시민사회와 민주주의」(92호)를 기고한 바 있음.

✽이 글은 고려대 아세아문제연구소와 한겨레신문사가 공동주최한 학술회의, ‘탈냉전과 평화: 경험, 조건, 선택’(서울, 2000년 12월 19일)에서 발표한 논문을 고친 것이다.─필자

 

 

남북한 두 지도자가 2000년 6월 평양에서 정상회담을 개최했을 당시 획기적인 일이 연달아 일어났다. 1945년 8월 일본의 항복에 따른 즉각적인 여파로 나라가 분단된 이래 한반도의 어떤 국가원수도 서로 만난 적이 없었다. 그렇기는커녕 그들은 55년 동안이나 계속해서 서로에게 비난을 퍼부었다. 이 회담은 또한 한국전쟁 발발 50주년 기념일을 막 앞두고 성사되었는데, 6월 25일이 그때처럼 다시 일요일에 돌아왔으니 요일까지 일치하는 기념일이었다. 한반도에서는 한국전쟁도 냉전도 아직 끝나지 않았으므로 이 두 행사가 겹친 것도 마침맞게 적절한 일이었는지 모른다.

정상회담은 선의의 분위기에서 진행되었고 실제로 어느 누가 예상할 수 있었던 것보다 더 잘 풀렸으며 이후에도 모든 것이 계속 순조로웠다. 10월에는 평양의 2인자 조명록 장군이 유례없이 워싱턴을 방문하여 빌 클린턴 대통령과 만났으며, 그후 10월 하순 당시 국무장관 올브라이트(Madeleine Albright)가 북한을 답방했고, 이 방문에 이어 평양에서 클린턴 대통령과 김정일의 회담이 거의 성사될 뻔했다.1 아마 한반도의 달라진 분위기를 인지한 가장 중요한 예는 김대중 대통령이 남북한과 미국을 화해로 이끈 선구적 역할을 인정받아 노벨평화상을 수상한 사건일 것이다.

불과 1년 전만 해도 그토록 엄청난 일련의 사건들은 거의 생각조차 할 수 없었을 텐데, 지금은 불행히도 새로운 부시행정부가 한반도에서 이루어진 진전의 중요성을 이해하고 있는지조차 분명치 않다. 따라서 나는 먼저 이처럼 놀라운 사태전환이 어떻게 그리고 왜 일어났는가를 묻고자 하며, 그런 다음 작금의 해빙기조와 부시행정부로부터 우리가 무엇을 기대할 수 있는지 몇몇 역사적 조건 및 제약 들을 검토하고자 한다.

많은 분석가들이 지적하듯, 한반도에서의 화해의 희망은 이전에도 양측 모두로부터 솟아난 적이 있었으나 번번이 짓밟히고 말았다. 1972년 7월, 김일성과 남한 중앙정보부장 이후락의 비밀회담 결과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통일에 관한 몇가지 원칙들을 공동으로 발표했을 때 기쁨과 기대로 넘치던 서울의 분위기를 나는 생생히 기억한다. 그러나 몇달 지나지 않아 최고조의 냉전적 대치상태가 재개되었을 뿐 아니라, 박정희 대통령은 계엄령과 유신헌법을 선포함으로써, 1987년에야 끝이 나는 공식적인 독재통치의 암울한 시대를 열었다. 1991년 말에도 화해와 통일에 관한 공동원칙들이 발표되었고, 1994년 6월에는 김일성이 남측 상대와 사상 최초의 정상회담을 제안했으나, 그러고는 2주 후에 사망하고 말았다. 1972년과 1991년의 회담에서 나온 ‘획기적’이라던 원칙들은 정상회담 제안만큼이나 순식간에 사라져버렸다. 그렇다면 지난해에는 어째서 그토록 많은 성과를 거둔 것일까?

2000년은 사정이 달랐고 거기에는 몇가지 이유가 있다. 주된 이유는 수년간의 외교로 성공의 기틀이 다져졌다는 점인데, 이는 남한과 미국의 극적인 정책변화를 통해, 북한을 그 적대국들과의 외교적 상호교류로 이끌려는 중국의 한결같은 정책을 통해, 그리고 완강하고 악의적이라는 여태까지의 이미지가 그릇된 것임을 보여준 최근 몇년간의 북한의 타협을 통해 이루어졌다. 북한의 핵개발계획을 둘러싼 3년간의 위기로 말미암아 1994년 6월에는 거의 전쟁이 일어날 뻔했지만, 활발한 외교 덕분에 1994년 10월 제네바 기본합의안이 타결됨으로써 북한의 핵원자로가 동결되었고, 지금도 그것은 동결되어 있다. 1997년 북한은 법률상 지속되는 전쟁상태를 대체하기 위해 ‘4자회담’(미국, 중국, 남북한)에 동의함으로써 휴전협정에 서명하지 않은 남한과는 상대하지 않겠다던 기존의 입장을 슬그머니 접었다. 이 회담이 매우 중요한 것은 평화협정을 통해 한반도의 갈등을 종결짓겠다는 목표를 내걸었기 때문이다. 핵시설을 감추고 있다는 거대한 지하기지를 둘러싸고 1998〜99년에 벌어진 소동은 북한이 이 현장과 그밖의 안보시설에 대한 미국측의 전례없는 사찰을 받아들임으로써 끝이 났다.

1998년 8월 말 북한이 발사한 로켓이 일본 혼슈우 섬 북단의 성층권을 침입했는데, 이는 인공위성을 궤도에 올리려는 시도─그럼으로써 1998년 9월 9일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50주년을 널리 알리려던 시도—가 실패한 결과였다. 이 사건은 북한측 장거리미사일의 새롭고도 대대적인 위협이라고 널리 (그리고 쉽게) 해석되었다. 이 위협은 광범위한 계층의 일본인들에게 불안감을 줄 정도로 실제적인 것으로 인식되었으나, 미국의 국가미사일방어계획(NMD) 주창자들에게는 하늘이 내린 선물이었다. 실로, 이 미사일 발사실험은 (현재 미국 국방장관인) 럼스펠드(Donald Rumsfeld)에게 곧바로 활용되었는데, 그는 바로 ‘깡패국가’의 그런 미사일 위협 때문에 NMD를 채택할 것을 강력히 요구하는 긴 연구논문을 1998년 7월에 막 완성한 참이었다. 남한 사람들은 이 사건에 대해 다른 반응을 보였다. 오랫동안 북한 단거리미사일의 위협 아래 있었던 탓인지 정부도 국민도 이 새로운 로켓 시험을 대수롭게 여기지 않는 듯했다(그리고 일부는 동족의 미사일이 일본을 발칵 뒤집어놓은 것에 대해 속으로 쾌재를 부르기도 했다). 하지만 미국에서는 또 한번의 ‘북한 위기’가 몇달간이나 언론매체들을 온통 휩쓸었는데, 이로써 북한의 미사일 실태가 밝혀지기보다는 분노만 한층 더 확산되었다.2

영변의 원자로와 마찬가지로 미사일도 지난 십년간 미국과의 협상에서 유용한 카드였기 때문에 북한 또한 자신의 포악한 이미지를 반겼을 것임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러나 이 도발적인 미사일 발사에 뒤이어 1999년 9월 워싱턴과의 중대한 합의가 이루어졌으니, 그것은 50년간 계속된 미국의 북한에 대한 경제제재를 서서히 그리고 부분적으로 완화하는 댓가로 미사일 발사시험을 중지한다는 것이었다. 남북정상회담 직전인 2000년 6월 중순 클린턴행정부가 마침내 경제제재의 부분적인 해제에 착수했을 때, 북한은 미사일 시험의 유예조치를 재차 확인했다.

새 천년의 도래는 북한 대외정책의 커다란 전환점을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2000년 1월 이래 평양은 외교적 공세를 취하여 이딸리아·독일·영국·오스트레일리아·필리핀·캐나다와 수교를 했고, 프랑스, 일본, 그리고 물론 워싱턴과의 수교에 대해서도 논의해왔다. 2000년 6월 초유의 고위급 북한대표단이 ASEAN(동남아국가연합) 회의에 참석했고, 거기서 올브라이트는 북한의 외무장관과 처음으로 만났는데, 이는 10월 조명록과 올브라이트의 상호방문을 예고하는 또하나의 전주곡이었다. 김정일은 20세기에 그의 아버지가 취한 것과는 사뭇 다른 외교적 자세로 새로운 세기를 맞고자 했음이 분명하다.

 

 

김대중의 ‘햇볕’정책

 

미국에서는, 이제 북한과의 관계 진전이 빌 클린턴 대외정책의 최고 업적 가운데 하나라고 주장할 만하지만, 민주당으로서는 선거가 있는 해에 이런 성공을 떠벌리는 일이 이로울 게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런데 화해과정을 줄곧 주도한 인물은 김대중이었다. 서울이 다른 어느 곳보다 훨씬 더 큰 직접적 위협에 직면해 있음에도 불구하고, 김대통령은 대북정책을 바꾸기 위해 남한과 미국의 어떤 전직 대통령보다 더 많은 일을 했다. 1998년 2월의 취임식에서 그는 북한과의 “화해와 협력을 적극 추진할 것을” 맹세했고, 워싱턴과 토오꾜오와 관계를 개선하려는 평양의 시도를 지지한다고 선언했는데, 이는 그런 화해의 어떤 조짐도 싫어했던 전임자들과는 완전히 대조적인 것이었다.

김대중은 또한 50년간 지속된 북한에 대한 경제제재를 끝내도록 미국에 공식 요청한 최초의 국가원수였는데, 1998년 6월의 워싱턴 방문기간중에 이런 요청을 했다. 클린턴행정부는 당시 이 제안에 현저히 냉담한 반응을 보였지만, 1999년 9월 제재조치를 점진적으로 해제하겠다는 입장을 밝힘으로써 마침내 김대통령이 요청한 일을 실행하기 시작했다. 김대통령은 또한 아무런 양보조치도 요구하지 않고 식량 및 다른 형태의 원조를 북한에 보냈고 북한 강경론자들의 자극에 동요되지 않았는데, 그럼으로써 지난 수십년간 남북관계의 어떤 진전도 확실히 가로막았던, 양측이 한치도 양보하지 않던 맞받아치기 관행을 끝장냈다. 김대통령은 남한의 많은 기업인들로 하여금 북한에 투자하도록, 특히 현대의 창업자이자 이북출신인 고(故) 정주영에게 대대적인 투자를 하도록 장려했는데, 그는 수년 동안 남북경제교류의 선봉에 서 있던 인물이었다. (정주영은 김정일과 면담하러 2000년 8월 다시 평양으로 건너갔고, 옛 고려의 도읍지 개성시와 그 일대에 20만명에 달하는 북한 노동자를 고용할 수백개의 공장을 개설한다는 서명합의서를 갖고 돌아왔다. 개성은 38선으로 양분되었으나 한국전쟁이 끝난 후에는 북한 땅에 확고히 소속된 도시이다.)

그러나 이런 다각도의 외교를 극적으로 보여주면서 동시에 김정일의 정치가로서의 등장을 뚜렷이 알린 계기는 역시 6월의 정상회담이었다(이전에는 그가 외국인이나 국가원수를 만난 적이 거의 없었고, 그런 일은 명목상의 국가원수인 김영남에게 맡겼던 것이다). 이제까지 어떤 북한지도자도 남한대통령과 악수조차 한 일이 없었지만, 김정일은 공항에 나가 김대중을 영접했고 유교식 예절을 보여주었다. 그는 연장자인 상대방 뒤를 천천히 따라 걸으며 문화적으로 너무나 적절한 몸짓을 구사하여 남한의 골수 반동세력조차 그가 구제불능의 야만인은 아닌 것 같다고 판단할 정도였다. 비록 옷차림과 머리모양이 미국 TV의 전문 논객들에겐 다소 어색하게 보였겠지만(사실 그는 ‘비날론’이라 불리는 화학산업의 합성섬유로 만든, 어디서나 흔히 볼 수 있는 노동복을 입고 있었다), 그는 분명 차분하고 여유있는 태도로 김대중(그리고 다른 모든 이들)과 스스럼없이 대화를 나누었다.

김대통령의 끈기있고 지속적인 ‘햇볕정책’은 남북문제에 관한 장기간의 연구, 그리고 분단 및 남북한의 역사 전체와 겹치는 성인기를 보낸 지도자로서의 실제 경험에서 나온 것이다. 그는 독재자들의 손에 수십년간 고초를 겪으며 대화, 화해, 평화 그리고 그런 쪽의 노력에 꼭 필요한 포용의 미덕을 어렵사리 배운 사람이다. 나는 여기서 특히 포용력을 강조하고 싶은데, 그것은 그의 깊은 카톨릭 신앙에서 나온 것으로 지난 3년간의 북한 강경파의 도발─그의 의지에 대한 시험임이 분명한 도발─에 반응하지 않겠다는 결의를 뜻한다. 과거 50년 동안 남북한간에 포용력보다 더 부족했던 것은 없었다. 취임식에서 김대통령은 1945년 이래 모두가 두려워한 평화와 화해의 모퉁이를 돌았고 지금껏 되돌아서지 않았다.

김대중이 전세계에서 그토록 폭넓은 존경과 찬사를 받는 최초의 남한대통령임이 너무나 분명한데도 한국인들은 때로는 자신들의 대통령이 지닌 미덕을 누구보다 알아주지 않는 듯이 보인다. 하지만 그가 무슨 성인군자가 아니라 가끔 때가 묻기도 하지만 그래도 존경할 만한 외양의 정치가임을 전제한다면, 그가 아직까지는 정말로 잘못된 조치를 취했다고 말하기는 힘들다. 남북정상회담, 미국과 일본의 대북정책 방향전환, 국가적 파산이라는 심연을 들여다보았던 1997년 말 이래 전혀 예기치 못한 남한경제의 급속한 두 자릿수 성장률 회복, 종종 삐걱대기는 하나 건강한 한국정치계와 시민사회─이런 수많은 성과는 취임 이래 김대중과 그의 수많은 협력자들이 제공한 지도력과 비전에 힘입은 것이다. 김대통령은 또한 남은 임기 동안 성취 가능한 목표를 가지고 있다. 그것은 한국전쟁을 끝낸 인물로 공직에서 물러나고 싶다는 것인데, 이는 궁극적인 화해와 통일에 필요한 전주곡이다. 지금까지의 진전으로 볼 때 그의 성공이 점쳐지지만, 이는 부시행정부가 그를 전적으로 지지할 경우라야 가능하다.

 

 

남한의 민주주의와 평화

 

김대통령이 받아 마땅했던 노벨평화상은 수십년간의 민주화투쟁에서 그가 수행한 핵심적 역할을 증언하는 것이기도 하다. 북한에 대한 최근의 정책변화 이면에는 남북화해의 전망에 버금갈 만큼 새롭고 예기치 못한 현실이 있다. 사상 최초의 진정한 정권교체를 거친 남한 최초의 참된 민주적 지도자의 등장이 그것이다. 김대중의 많은 업적은 대북정책의 관점이 아니라 출발선까지 거슬러올라가는 남한의 정치적 경험의 견지에서 보아야 제대로 평가될 수 있다.

내가 보기에 김대중이 이룬 혁신은 그의 남다른 정치적 경험의 결과이다. 그는 해방 직후인 1945년 9월 항구도시 목포에서 실천적인 정치가로 활동했고, 이후 당시 야당인 한국민주당(한민당)에 가담했다. 전쟁도 겪었는데, 그의 고향인 남서부 지방에서는 1950년 여름 3개월의 점령기 동안 많은 사람들이 북한에 적극 협조했다. 그는 유신체제의 가장 두드러진 표적(이자 희생자)이었는데, 사실 많은 학자들은 김대중이 1971년 대통령선거에서 온갖 부정행위에도 불구하고 46%를 득표했기 때문에 유신이 시작되었다고 믿는다. 그는 그 지역 토박이가 아니면 이해할 수 없는, 1980년 5월 광주항쟁을 촉발한 힘들을 이해했고, 만일 남한 사람들이 평화로이 함께 살 수 있으려면 1990년대에는 광주의 경험과 화해할 필요가 있음을 알고 있었다. 그는 1979년 박정희 암살 이후 광주와 그밖의 사건들에서의 역할로 말미암아 반란죄로 유죄판결을 받은 전두환과 노태우를 너그러이 사면했고, 그럼으로써 이 두 전직대통령은 그가 1998년 취임식에서 대통령 선서를 할 때 귀빈석에 앉아 안절부절못했으니, 이야말로 뛰어난 정치력, 포용력, 화해정신, 그리고 고단수의 극화를 결합하는 대가의 솜씨라 하겠다. 무엇보다 그가 집권함으로써 1998년 2월까지 겉모습만 다를 뿐 여당이 줄곧 권력을 장악해온 남한 역사에서 처음으로 진정한 정권교체가 이루어졌는데, 북한도 이 점을 인식하고 있다. 물론 김대중은 하나의 개인일 뿐이므로, 그는 연이은 독재자들에 대항한 수십년간의 격렬한 투쟁에서 자신의 생명과 사회생활을 희생한 수백만명의 사람들에게 하루도 빠짐없이 감사해야 할 것이다. 이 투쟁이야말로 대한민국의 강력한 민주주의와 시민사회를 건설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민주주의의 경험을 냉전의 종말 이후에 등장한, ‘민주주의적 평화’에 대한 옹호론을 펴는 새롭고 흥미로운 연구와 관련지어 살펴보면, 그 기본개념은 이렇다. 구공산권 국가에서건 우파 독재체제 국가에서건 1980년대와 90년대에 민주주의 정부들이 급격히 확산되었다는 사실은 우리 시대에 장기간에 걸쳐 평화가 지속되리라는 희망을 보여주는데, 그것은 민주주의 국가들은 서로 싸우지 않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3 나는 이와 정반대로 남한의 (그리고 타이완의) 민주적 통치라는 행복한 결과와 북한의 (그리고 중국의) 계속되는 민주적 통치의 부재는 1931년부터 1975년까지 동아시아를 괴롭힌 전쟁과 1945년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이 지역의 지도를 작성해온 냉전 및 열전의 안보분할구도와 떼어놓고서는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고 주장하고 싶다. 남한(그리고 일본과 타이완 역시)은 민주주의체제이면서 동시에 외세에 관통당한(penetrated) 반(半)주권국가로서, 2차대전 후 일찌감치 구축·재구축되어 냉전이 끝나고 소련이 붕괴한 다음에도 거뜬히 살아남은 미국의 헤게모니 체제 안에 들어앉아 있는 것이다.

이런 일반화가 사실인 한에서, 민주주의적 평화에 관한 문헌들의 핵심 가설─즉, 민주화를 강화하거나 더디게 하는 초국적체제(transnational systems)와 권력의 위계질서를 검토하기보다는 민주적 혹은 독재적으로 범주화될 수 있는 주권적 민족국가들의 규범을 가정함으로써 세계를 가장 잘 이해할 수 있다는 가설─은 지탱될 수 없다.  

동아시아에서 전쟁과 민주주의가 어떻게 상호 작용하는지를 파악하는 간편한 방법은 다음 사항들을 짚어보는 것이다. 일본은 1945년 이후에 민주주의 사회가 되었지만 전쟁과 군사적 점령이라는 격변을 겪은 후였고, 1998년 무렵에 남한도 민주주의 사회가 되었지만 혁명, 전쟁, 분단, 그리고 수십년의 군사통치(1961〜87)와 치열한 정치투쟁의 격변을 겪은 다음이었으며, 타이완은 1990년대에 이르러 민주주의 사회가 되었지만 혁명, 전쟁, 분단, 그리고 40년간의 계엄령(1947〜87) 이후에야 그렇게 되었다.

남한의 제1공화국은 가혹하고 극도로 부패한 독재국가였고, 마침내 1960년 민중항쟁으로 타도되었다. 일본군에 복무한 장교들이 주도한 1961년의 군사쿠데타는 전면적 안보국가(1961년에 창설되어 곳곳에 깔려 있는 중앙정보부로 상징되는)와 국가주도형 신중상주의적 산업개발이라는 1930년대 일본식 모델을 부활시켰는데, 이 권위주의 모델은 남한에 급속한 산업발전을 가져다주었으나 박정희의 암살과 더불어 1979〜80년에 무너졌다가, 그의 사도인 전두환에 의해 1981년에 다시 부활했다. 그후 이 모델은 1993년 선거에 의한 민간정부의 집권과 더불어 마침내 쇠퇴하기 시작했다. 독재자들이 내세운 전제이자 그들의 권력을 가능하게 한 핵심적 요소는 소련이나 중국 혹은 북한의 안보위협이 뚜렷이 감지되는 한 미국정부는 그들을 지원하리라는 것이었는데, 이런 가정은 냉전이 종식될 때까지는 실제로도 옳았고 1980년 남서부 도시 광주의 시위자 대학살에서 극적으로 부각되었다(대학살은 지미 카터의 대통령 재임시 일어났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다른 곳에서는 인권을 지지하였다).

남한은 (타이완과 마찬가지로) 인구비례를 훨씬 상회하는 거대하고 부풀려진 군대를 갖고 있으나, 이 군대는 공산주의를 막는 보루를 표현하는 동시에 실제로 구성하는 것이었다. 이런 군사구조는 지역적인 의미에서 일본이라는 국가의 완성을 뜻한다(만일 남한과 타이완이 강력한 군대를 갖지 않았다면 일본이 약한 군대를 갖고 있을 리가 없었을 것이다). 남한과 타이완은 애초에 망명객들에 의해 접수되었다는 사실로 인해 사회로부터 상당한 자율성을 갖고 있었는데, 그 주된 결과는 개량주의적 토지재분배였고, 이는 두 나라 공히 1950년대 초반경에 완료되었다. 또한 두 나라 모두 미국의 군대와 원조체제에 깊이 관통당했고, 노동자들에게 고질적인 배타성을 갖고 있었다.

남한이 외세, 즉 미국 안보체제에 ‘관통당했다’는 말은 무슨 의미인가? 첫째, 물론 이것은 이 거대한 한국군에 대한 미국의 직접 지휘권을 뜻한다. 사실, 지난 55년 가운데 한국인들이 자국 군대에 대한 자율적 통제권을 가진 기간은 1949년 6월 30일부터 1950년 6월 25일까지 단 1년뿐이다(이 점은 나중에 다시 다루겠다). 둘째, 그것은 돈줄의 꼭지가 열려 있었다는 뜻이다. 처음부터 상대적으로 엄청난 양의 미국 원조가 남한(그리고 대만)으로 쏟아져 들어왔는데, 이 모든 원조가 냉전에 따른 안보 차원의 배려라는 것으로 정당화되었다. 1940년대 후반에는 대한민국에 대한 미국의 전체 원조수준이 대략 연 2억 달러였으나 1959년 6월에 이르러서는 그것이 그리스와 터키에 대한 트루먼독트린 원조를 합한 것보다 더 많아졌다. 대한민국의 1951 회계연도의 국가예산 전체가 1억 2천만 달러였는데, 그중 2700만 달러가 방위예산으로 공식적으로 책정되어 있었다(실제로는 약 80%가 방위 및 국내치안에 지출되었다).4 따라서 이승만 대통령과 그가 대표한 사회계층이 적을 탄압하고 자신들의 사회적·정치적 지위를 영속화하기 위해 강력한 식민지 관료체제를 활용하는, 그런 국가정책을 미국의 돈이 지원한 것이었으니, 국내 세수가 강압정치에 소요되었다면, 미국은 그외의 모든 것에 돈을 댄 것이다. (타이완도 거의 마찬가지였다.)

이와같은 자금 유입이 최고조에 달한 때는 1957년으로, 당시 한국은 국내 세수가 4억 5600만 달러인 데 비해 미국으로부터 3억 8300만 달러의 경제지원을 받아냈는데, 주한미군 유지비용 3억 달러를 논외로 하고도 추가로 4억 달러의 군사원조가 이루어졌다. 이 군사원조 수치만도 유럽 전체에 대한 군사원조보다 더 컸고, 라틴아메리카 전체에 대한 총 군사지원비의 4배였다.5 우리는 종종 1960년에 한국의 1인당 국민소득이 100달러였다는 말을 듣는다. 하지만 한 분석가는 1945년에서 1976년까지 연간 1인당 미국 원조 수치는 600달러였다는, 다시 말해 30년간 한국의 남자, 여자, 어린이 한 사람 당 모조리 600달러였다는 주장을 제시했다.6

일본이나 타이완과 달리 한반도는 1950년대 초 온통 내전의 광풍에 휘말렸는데, 이것은 근대화 이론가들이 ‘전통’이라 부르고 싶어하는 것의 지배력을 묘한 방식으로 완화하는 데 기여했다. 1935〜45년에 일본인들이 한국 주민들을 대대적으로 동원함으로써 시작한 일을, 1940년대 후반에 분단이 한층 더 강화한 일을, 한국전쟁이 완성한 것이다. 모든 계층의 한국인들이 이제 그들의 지역적 뿌리로부터 철저히 이탈하게 되었다. 모두가 자신들의 사회적 공간으로부터 밀쳐지거나 밀려나거나 아니면 통째로 쫓겨났다. 혈연관계·후견인관계·소작관계 등으로 ‘아랫’사람들을 통제하는 농업엘리뜨들의 능력과 시장을 통제하고 농민의 자작농화를 억누르려는 그들의 지속적인 경향은 완전히 박살났다. 사람들은 더이상 농촌의 주어진 자리에 붙박여 살아갈 수 없었다. 연이은 두 차례의 전쟁이 그들을 뿔뿔이 흩어지게 했으니, 그들은 전후 수년간 수백만명씩 도시로 몰려나갔던 것이다(남한은 현재 미국보다 더 도시화되어 있다). 혈연과 지연이 그토록 견고했던 나라에 이제 홉스(Thomas Hobbes)가 말한─아노미와 근대의 전조인─‘주인 없는 사람들’(masterless men)의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전쟁이 탁월한 평등화 장치라는 경구의 깊은 의미는 여기에 있다.

오늘날 남한의 강력한 시민사회는 미국의 시혜 혹은 자유민주주의에 대한 그 흔한 수사적 지지의 덕택으로 돌릴 수 없거니와, 단순히 경제발전과 중산층 출현의 결과만도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시민사회를 강화하고 민주적 정치를 실현하기 위한 갈등과 투쟁의 건강한 공헌을 보여주는 완벽한 사례이다. 남한의 민주주의체제가 전적으로 빚지고 있는 것은 독재체제에 맞서 형성되면서 아래로부터 성장한 민주주의 운동이며, 또한 이 민주주의체제 자체는 독재의 탄압대상인 다수의 학생·노동계급·중산계급의 저항단체들로부터 떼어놓고서는 설명될 수 없는 것이었다.

길고도 피비린내 나는 이야기를 간략히 줄이자면, 남한의 군부지도자들은 공공영역(public sphere)의 숨겨진 역량과 두터워지는 성숙성을 잘못 판단했다고 할 수 있다. 공공영역은 (헨더슨Gregory Henderson이 오래 전 『소용돌이의 정치』The Politics of the Vortex에서 보여주었듯이 1960년에도 이미) 경제와 관련해서는 과도하게 발전했으나, 팽창하는 국가의 곳곳에 깔려 있는 기관들─즉 광대한 행정관료체제, 방대한 군대, 대규모의 경찰, 약간이라도 저항할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되는 곳이면 공작원을 배치하고 강제로 가속화된 산업화의 이름으로 모든 대안적 사고를 이데올로기적으로 덮어누르는 중앙정보부─에 비하면 아직도 충분히 발전된 것은 아니었다. 박정희의 유신독재는 끊임없이 시민사회의 위기를 야기했으니, 그 위기는 1979년 8,9월 마산과 부산에서 일어난 도시소요에서 정점에 달하였다. 이 소요사태는 이 나라에서 가장 산업화가 진전된 지역에서 발생하였고, 곧 10월에는 박정희가 자신의 심복인 중앙정보부장의 손에 암살되기에 이른다. 그런데 이 사건은 다시 박정희의 두 부하인 전두환과 노태우가 일으킨 ‘쿠데타적 사건’으로 이어져, 1981년에 이르러서는 또하나의 매우 강력한 독재체제가 구축되는 듯하였다. 사실, 약화되는 중앙 정부당국이 강화되는 재야시민들과 다투는 과정에서, 시민사회의 위기는 더욱 심화됐을 따름이다.

1986년 말 미국의 정책은 서울의 독재자들을 지지하던 입장에서 물러섰는데, 이는 워싱턴이 남한의 민중혁명을 걱정하기 시작하고 미국의 정책이 세계적 차원에서 제한된 형태의 민주주의를 지지하는 쪽으로 옮겨갔기 때문이다. 이 점은 윌리엄 로빈슨이 밝혀낸 증거에서 상당히 분명해졌다. 로빈슨은 1983년 아키노(Benigno Aquino) 살해 이후 필리핀이야말로 레이건행정부의 핵심적인 시험 사례라고 주장한다. 1984년 11월에 승인된 국가안보위원회(NSC)의 한 비밀지령은 “우리는 민주적 제도의 소생을 강력히 요구하고 있으며, ‘인맥 중심의’ 독점자본주의를 타파하고 경제가 자유시장의 힘에 부응할 수 있도록 허용하고 있다”고 하면서 필리핀 정치에 미국이 개입하기를 요청했다는 것이다. 이 요청은 마닐라에서 마르코스(Ferdinand Marcos)와 CIA 국장인 케이시(William Casey)의 회동(1985년 5월), 마르코스와 레이건의 개인밀사인 랙솔트(Paul Laxalt) 상원의원의 회동(1985년 10월)으로 이어졌고, 워싱턴은 또한 마닐라 대사관의 정치담당 요원 수를 크게 늘렸다.7 똑같은 일이 1986년말 한국에서도 일어났다. 오랜 경력의 CIA 관리인 릴리(James R. Lilly)가 서울의 대사로 부임했고, 1980년 이래 처음으로 야권세력과 만나기 시작한 것이다. (레이건 시절의 대사인 워커Richard Walker는 김대중을 만나기를 거절했고, 당시 다수의 미국 관리들이 김대중을 과격파 또는 그보다 더한 인물로 즐겨 모욕했음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1997년 12월 김대중이 마침내 선거에서 승리했을 때, 나의 주장과 관련하여 그의 승리가 지닌 중요성은, 만약 냉전시대였다면 그는 결코 당선되지 못했을 것이며 한국의 보안기관들이 그것을 저지했을 것이라는 (그리고 워싱턴의 안보관련 인사들이 한국의 보안기관들을 암묵적으로 지원했을 것이라는) 점이다. 김대중은 시민사회의 오랜 위기를 끝내기 위해 기민하게 움직였다. 이 위기를 보여주는 가장 좋은 상징은 아마 1945년 이래 노동계급이 체제에서 배제된 것이었을 텐데, 김대중은 신속히 노·사·정 3자간의 최고위 협의제를 채택했다. 1998년 1월의 이 탁월한 조치로 말미암아 한국의 강력한 노조들은 1997년의 아시아 위기로 요구된 경제개혁을 (파괴하기보다는) 틀잡는 데 도움을 주었다. 심지어 그런 개혁들이, 1999년 실업률을 사상 최고의 수치(8%였으나, 2001년 초에는 4%로 다시 떨어졌다)로까지 끌어올린 대량해고를 의미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한국의 시민사회는 마침내 승리를 성취했는데, 이는 한국 내에서는 아직 충분히 진가를 인정받지 못할지 모르나 상대적으로 볼 때에는 상당히 놀라운 일이다. 화이트칼라 은행원들이 ‘IMF 신탁통치’를 비난하는 머리띠를 동여매고 수천명씩 거리를 행진하는 나라가 어디 있겠는가? 대한민국의 민주주의 이행은 라틴아메리카와 구소련, 그리고 몇몇 동유럽국가들에서 나타난 약한 민주주의로의 위태롭고 일시적인 날림식 이행이나 필리핀의 계속되는 혼란 상태를 훌쩍 뛰어넘은 것이다.

김대중이 이 새로운 민주주의를 이끌었다 해도, 대중들의 저항과 치열한 정치투쟁이 이런 결과를 낳는 데 기여한 바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다. 그것은 “투쟁 속에 창조된(…)사회에 대한 새로운 비전이 지닌 교화력”8을 보여주는 고전적 사례이다. 특히 1980년대에 (라틴아메리카식 해방이론의 한국판 격인) ‘민중’ 이념과 실천의 매개를 통해 한국의 학생·노동자·청년들은 정치적·사회적 저항의 유례없이 독특하고 자율적인 형태들을 공적 공간으로 가져왔는데, 이런 형태들은 여러차례 군사독재와 미국 비호의 구조를 전복시킬 듯할 정도로 위협적이었다. 또한 (최근의 연구에 따르면 3천명 이상의) 많은 학생들이 노동계급과 유기적으로 융합하기 위해 교정을 떠났는데, 이들은 종종 ‘위장노동자’란 죄목으로 투옥되거나 고문을 당했으며 평생의 사회생활을 희생당할 위험을 늘 감수했다.9 한국의 공공영역의 이 부문은 현재 상대적으로 조용하지만, 1980년대의 한국 민주주의에 뚜렷한 공헌을 남겼다.

한국의 민주주의 운동은 작년까지만 해도 어쩌면 세계에서 가장 제어하기 힘든 시민적 투쟁으로 이어졌다는 점에서 더욱 주목할 만하다. 민주주의 이론가들이 민주주의의 외적 자원과 장애요소에 대해 그토록 고려하지 않는 나라는 아마 미국밖에 없을 것이며, 냉전의 오랜 세월 동안 전쟁과 민주주의 사이의 내적 연관이 존재한 사실이나, 냉전이 마침내 종식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전세계에 걸쳐 미국의 안보구조가 지속되는 현실이 마치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듯 1990년대에 ‘민주주의적 평화’에 관한 문헌이 등장하는 것도 오로지 미국에서나 일어날 법한 일이다.

 

 

냉전의 구조와 탈냉전의 기대  

 

이제 이런 내적·외적 구조, 즉 냉전, 한국전쟁, 그리고 남북한이 함께 구축한 ‘분단체제’(백낙청의 용어)에 관한 논의로 옮겨갈 수 있겠다. 이런 구조의 문제는 남북정상회담과 그 이후의 지속적인 화해국면에 있어서 시사성이 덜하거니와 논의는 더욱 되지 않은 측면이다. 냉전은 한반도에 매우 일찍, 실제로 1945년의 마지막 3개월 동안 들어왔으며(일본과는 달리 〔미소의 동맹에서 대립으로 가는─옮긴이〕 ‘역행’이 즉시 시작된 것이다), 오늘날까지도 한반도는 이 소멸한 전지구적 분쟁의 박물관으로 남아 있다. 한국전쟁 이후 수십년 동안 가족이나 친지간의 악수나 작별인사, 심지어 소인이 찍힌 서신 한통조차 (두 정부가 몇몇 소규모의 교환을 승인한 사례를 빼고는) 합법적으로 경계를 건너갈 수 없었다. 북한은 어떤 남한대통령도 마음에 들지 않았으며(지난해 4월경까지는 현 대통령도 여기에 포함된다), 남한은 남한대로 누군가 ‘수령’의 지위를 가질 수 있는 또하나의 국가가 한반도에 존재한다는 것을 언제나 부인했다(대한민국 국가보안법에 따르면 북쪽의 영토는 반역을 기도한 ‘반국가단체’의 일시적 점유지일 따름이다).

지난해로 한국전쟁 발발 50주기가 되었는데, 기념주기란 것은 대개 어떤 식의 종결을 전제로 한다. 하지만 실제로 이 전쟁은 결코 끝나지 않았고, 휴전이 체결되었을 뿐 평화협정도 없이 극단적인 긴장의 연속이었다(미 국가안보담당 보좌관 버거Sandy Berger는 2년 전 서해상에서 소규모 접전이 있은 후 한반도에서 또다시 전쟁이 일어날까 걱정되어 밤잠을 설쳤다고 토로했다). 동북아 안보는 미국의 일련의 냉전전략들로써 계속 유지되는데, 그 첫번째 전략은 (1947년에) 일본, 남한 그리고 타이완을 반(半)주권국가로 배치하고, 그런 다음 일본의 중공업을 부흥시키는 한편 남한, 타이완 그리고 아직 활용 가능한 동남아시아 일부와 일본 사이의 예전의 경제적 연계망을 다시 이어붙이기로 결정한 것이다. 같은해 봉쇄전략이 등장했는데, 이 전략은 두 얼굴을 갖고 있었다. 즉, 그것은 공산주의 적국뿐 아니라 자본주의 우방 역시 봉쇄하려는 의도를 시종일관 갖고 있었다.  

전략의 두번째 국면은 한국전쟁과 더불어 시작되었는데, 이 전쟁의 위기로 말미암아 마침내 미국의회는 전세계에서 미국의 냉전적 입장을 유지할 수 있는 수준의 막대하고도 상시적인 방위예산을 제공하기로 했다(참전 6개월 만에 방위비 지출은 현재 달러 가치로 5천억 달러에 달했는데, 이 기록적인 수치는 그후 갱신된 적이 없다), 전쟁이 수행되는 방식과 종결되는 방식 역시 미국의 봉쇄전략을 안정되고 견고하게 만드는 효과를 가져와, 동북아시아의 분할을 한층 더 심화시켰다. 중무장의 요새화한 비무장지대가 38선 대신 들어섰고 소멸한 전지구적 냉전의 박물관으로 오늘날까지 남아 있으니, 남북한은 민간인 대 군인의 비율이 매우 높은 병영국가로 개조된 것이다.

한국전쟁은 또한 한 세대 동안 중국이 전후의 세계체제에서 배제되는 것을 의미했는데, 그 까닭은 중국의 한국전쟁 참전과 중국의 동맹관계 그리고 미국의 봉쇄와 남북한 양측 모두로부터 계속되는 전쟁위협 때문이었다. 일본 역시 이 전쟁의 결과로 어느정도 재무장을 했다. 무엇보다 한국전쟁은 이 지역의 비공산권 전역에 걸쳐 열도처럼 수많은 미국의 군사시설을 남겼는데, 그 가운데 남한과 일본의 기지들은 아직도 10만명의 군대를 보유하고 있지만 이에 관해 논의하는 문헌은 매우 드물다. 그러나 이 기지들은 동북아시아에서의 미국의 지위를 확보하고 공고히하면서 이 지역 국가들의 자율권을 계속해서 제약하는 강압적 구조이다. 이런 역사에 관해 아는 바가 없는 사람들만이 2001년 4월 하이난 섬 근방에서 격추된 미국정찰기가 오끼나와의 카데나 공군기지에서 이륙했다는 사실에 놀랄 것이다. 베를린장벽이 무너지고 소련이 붕괴했을 때 많은 관측자들은 이런 안보구조가 사라질 것이며, 나아가 한반도의 통일이 다가올 것이라고 기대했다.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고, 사실상 미국은 민주당이 집권하든 공화당이 집권하든 가까운 장래에는 이 주둔군을 그대로 유지하고자 한다.

그러나 역사의 간지(奸智)라고나 할까, 냉전이 종식된 이후 일어나지 않은 일이 최근 한반도의 외교적 진전을 촉진하는 데 핵심적이었음이 판명되었다. 내가 보기에는 최근의 이 모든 진전의 이면에는 두 가지 중대한 전제조건이 있다. 첫째는 베를린장벽이 무너진 후 북한이 붕괴하지 않았다는 점이고, 둘째는 전쟁은 더이상 어느 누구에게도 선택 가능성이 아니라는 점이다. 이 두 전제조건에 더하여 성공의 지속을 위해 앞으로 고려해야 할 한가지 핵심적 사항(내지 후제-조건 post-condition?)이 더 있으니, 그것은 주한미군의 장기 주둔이다.

나는 한번도 북한이 붕괴하리라 믿은 적이 없는데, 나이가 든다는 것이 주는 몇 안되는 잇점들 중 하나(생각해보니 사실상 단 하나의 잇점)는 자신의 판단들이 얼마나 옳은지 아닌지를 확인해볼 만큼 오래 산다는 것이다. 물론 내가 북한이 붕괴하지 않으리라고 확신한 것은 아니었다. 인생, 달리 말하면 역사가 우리가 어디서 틀렸는지를 깨우쳐주는데, 나 자신 틀린 적이 종종 있었다. 다만 이 점에 관해 내가 틀렸다면 북한에 대한 나의 이해가 그저 한번의 실수를 범한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잘못되었음을 뜻하기 때문에 직업을 바꿔야 하리라 느낀 것이다. 1974년에 발표한 첫번째 논문에서 나는 북한이 모스끄바나 뻬이징의 ‘꼭두각시’가 아님은 물론이고, 단지 하나의 공산주의 국가일 뿐 아니라 혁명적 민족주의 국가이자 탈식민·반(反)제국주의 국가, 구체적으로 말하면 반일(反日)의 정체로 이루어진 국가이기도 하다는 주장을 펼쳤다. 어느 경우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여전히 거기에 있고 여전히 존재한다. 한 세기 전 한국의 완고한 보수파들이 ‘은자의 왕국’의 근대적 운명이 열강들의 수중에 떨어진 데 대해, 특히 오랜 세월 지켜온 독립과 국가주권을 일본제국주의에 상실한 데 대해 학자다운 통곡을 연달아 쏟아낼 적에, 21세기에도 여전히 ‘은자의 왕국’다운 경향이 근대세계에 대해 ‘공산주의’ 혹은 ‘위대한 주체사상’으로 단장한 채 깊고 강하게 남아 있을 줄 누가 생각이나 했겠는가?

이런 관점에서 볼 때 1990년대는 매혹적인 시기였다. 북한의 임박한 붕괴설이 매주나 매일은 아니라도 매월 발표되었으나 한결같이 약간은 시기상조였다고 밝혀졌으며,10 평양측의 능란한 외교수완은 재앙의 아가리에서 매번 성공을 낚아챘다. 물론 1995년 이래로 자국 내에서 엄청난 재앙이 발생하여 기근이 계속되고 해외원조의 필요성이 밑도끝도 없이 생겨난 탓에 북한의 대외노선에 노련함은 거의 없고 자포자기가 많이 실렸던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김대중이 취임한 1998년 2월에 이르러서는 북한이 앞으로 얼마 동안은 건재하리라고 가정할 수밖에 없었고, 따라서 김대통령은 평화적 공존을 추구할 것과 독일식 통일모델에 근거하여 북한의 붕괴를 자극하거나 ‘흡수’하려는 시도를 삼갈 것을 서약했다. 나의 견해로는 이런 점들이 김대중의 ‘햇볕정책’ 전체에 담긴 핵심적으로 중요한 사항이며, 북한이 새롭고 다면적인 외교정책을 택하기로 결정한 자신감을 마침내 갖게 된 이유를 설명해준다. 북한은 붕괴하지도 사라지지도 않았고, 또 남한이 최소한 다음세대 동안은 (신속한 통일을 기대하지 않고) 북한과 우호적으로 지낼 것을 서약한만큼, 미국도 북한을 어떤 식으로든 사라질 것이라고 희망하기보다는 현재 존재하는 바로서 상대해야 함을 인식하게 되었다.

북한이 붕괴하지 않은 데는 또하나의 매우 심각한 요소가 있는데, 그것은 평양의 지도자들이 세계가 북한의 붕괴를 바라는 것은 제2의 한국전쟁을 바라는 일이라고 여러차례 경고한 점이다. 아마 가장 극적인 예는 북한이 붕괴하느냐 마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다만 언제 붕괴하느냐의 문제라는 CIA 국장 듀치(John Deutch)의 의회증언에 뒤이어 나온 성명이었다. 48시간이 채 지나기 전에 김광진 차수(次帥)는 “이제 문제는 한반도에서 전쟁이 발발하느냐 아니냐가 아니라(…)언제 전쟁이 개시되느냐이다”라고 응수했다. 그러나 실제로 전쟁을 불가능하게 만든 것은 1994년 6월에 있었던 일촉즉발의 상황이었다. 전쟁은 대다수의 사람들이 깨닫고 있던 것보다 훨씬 가까이 다가와 있었고, 그 댓가는 엄청난 파멸이었을 것이다. 수백만명의 한국인들이 사망하고 한반도는 황폐화되며 10만명 이상의 전사자와 1억 달러에서 10억 달러에 이르는 경비를 그것도 선거가 있는 해에 감수해야 할 판이었다. 다행히 전쟁은 회피되었고(누구도 그것을 원치 않았다), 외교의 길이 펼쳐지기 시작했다.11

북한의 위협을 둘러싼 미국의회의 떠들썩한 반론과 미국 언론매체들의 계속되는 소동(심지어 최근의 보도는 북한이 천연두 바이러스를 어쩌면 미사일 탄두에 장착하여 적들에게 살포할지 모른다고까지 했다12)에도 불구하고, 1991년 이래 국무부 중간관리들은 다양한 의제에 관한 일련의 회담들을 통해 평양과 하나하나 끈기있게 합의안을 협상해왔다. 그들은 또한 1998년 가을 한반도정책에 관한 6개월간의 재검토에 착수했는데, 이는 미국 정책방향의 현저한 변화를 가져왔으며 1998년 6월 페리의 평양 파견에서 절정에 달했다. 페리 대사는 1999년 10월 이 재검토의 공개본을 내어놓았는데, 그 핵심은 앞으로 상당기간 두 개의 한국이 공존한다는 전제에 입각한 대응정책과, 북한에 대한 미국 경제제재의 점진적 해제, 그리고 외교관계의 심화이다. 중국의 외교도 미국과 북한을 협상으로 이끌어내는 데 주요한 역할을 했고, 얼마 전에는 일본 역시 김대중과 클린턴행정부에 전적인 지지를 보냄으로써 상당한 도움을 주기 시작했다.

뭔가 다른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즉 반(反)쏘비에뜨 봉쇄 방벽에 배치된 것이라고 내세워지던 미군이 아직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은 것이다. 동북아시아에 열도처럼 퍼져 있는 미군기지들이 제국주의는 격세유전의 일종이라는 슘페터식 정의의 전형적 속성을 지닌 것으로 지난 십년 동안 보였다면, 이는 공산주의를 봉쇄한다는 예전의 집착 때문에 야기된 환상일 뿐이다. 미국 국방부와 군기지들은 실로 슘페터가 말한 영구적 작동기제일지 모르지만, 그것들은 엄연히 기능하고 있으며 이 기능이란 새로운 것이 아니다. 일본, 남한, 북한 그리고 중국에 대한 봉쇄의 기능인 것이다.

분단되어 불안정한 반도로서의 한국은 이런 전략적 환경에서 특별한 지위를 갖는데, 그것은 미국이 1949년 무렵에 하나의 전략을, 즉 남북한 모두가 서로에게 전쟁을 도발할 수 없도록 저지하고 억제하는 내전억제 구조를 발전시켰고 그것을 지금까지 유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애초에 이 전략은 김일성과 이승만 양자를 저지하려는 애치슨(Dean Acheson)의 욕망에서 발전된 것으로, 지난 55년간 한반도에 전쟁이 발발한 것은 미군사령관이 대한민국 군대를 지휘하지 않은 단 한해 동안이었다는 사실에(미군 전투부대는 1949년 6월 30일 떠나서 이듬해 6월말까지 돌아오지 않았고, 그럼으로써 미군장교들에게 대한민국 군대와 경찰의 작전통제권을 부여한 비밀의정서가—일시적으로—중지되었다) 미국인들의 생각이 미치면서 더욱 강화되었다. 이 정책이 현재 의미하는 바는 미국이 주한미군을 동아시아 전반에 대한 일반적 안정책으로서 계속 유지하고 싶어하며, 또한 이 군대가 평화로운 공존—북한이 남한한테 삼켜지거나 ‘흡수되지’ 않는다는 것—의 보장책인만큼 남북한 양측이 주한미군의 체류를 바란다는 점이다. 이는 한반도 민중들의 관점에서 옳으냐 그르냐의 문제가 아니라 집권자들 쪽의 전략적인 신념의 문제인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1998년 취임식 때 김대중이 발의했고 이제는 미국과 북한의 중대한 정책변화에 의해 뒷받침되는 작금의 한반도 상황의 변화들은 현존하는 안보구조들 안에서 평화와 화해, 그리고 한국전쟁의 최종적 종결을 달성하려는 최초의 진정한 시도를 나타낸다. 미군은 가까운 장래에는 남한에서 철수하지 않을 것이고, 한반도에는 계속 두 개의 한국이 공존할 것이며, 미국의 무력은 한쪽이 다른 한쪽을 압도하지 못하게 지켜줄 것이고, 북한은 생존에 필요한 물자들이나 안보에 관한 병적인 두려움, 그리고—근대 역사상 최초로—동시에 강국이 된 일본·중국과의 인접한 위치 때문에 이 전략에 동의할 것이다. 그리고 이제 우리는 김정일이 북한의 전략에서 이룩한 변화의 정도를 제대로 평가할 수 있는데, 이 변화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55년간 ‘철수’를 목이 터져라 외쳐왔음에도 불구하고 이제 주한미군을 한반도에 붙잡아두는 방법을 찾는다는 것이다. 김대중은 주한미군이 남아 있기를 바라는데, 이는 놀라운 일이 아니다. 전 국방장관 코언(William Cohen)은 한반도 통일 이후에도 미군이 남아 있기를 원한다고 말한 적이 있는데, 이 역시 놀랄 일이 아니다. 하지만 북한이 암묵적으로나마 여기에 동의한다는 것은 상당히 놀라운 일이다. 왜 동의하는가?

소련이 붕괴하고 중국이 남한을 인정한(1992년) 후 북한은 차분히 자국의 전략적 방침을 재고했고 자국의 위기를 모면하는 일에 유일하게 남아 있는 초강국을 어떻게든 끌어들이고자 했다. 하지만 그 초강국은 정반대의 것을 원했고(미국은 북한이 붕괴하여 사라지기를 바랐다), 따라서 북한은 자국민까지 포함하여 누구에게나 이 새로운 현실을 전달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8년에 걸쳐 아슬아슬하게 쫓고 쫓기는 외교가 이어졌고, 이 과정에서 평양은 핵무기 계획과 미사일이라는 비장의 카드를 (종종 상당히 위험하게) 구사했으며, 외부 관찰자들은 북한을 갑자기 고삐가 풀린 탈냉전시대의 ‘깡패국가’로서, 개전의 정이 없는 극악한 테러국가로 보았다. 북한의 위협적 행동 가운데 상당부분이 엄포였고 (정반대의 체제선전이 쏟아져나왔음에도 불구하고) 북한이 실제로는 주한미군의 철수를 원하지 않았다는 것, 오히려 미국이 계속 개입한 채로 머물러 있음으로써 남한이 북한을 삼키지 못하게 막고, 소련 붕괴 이래의 변화된 국제정세에 대처해주며, 또 북한주민들까지 포함하여 어느 누구도 예측할 수 없는 미래를 향해 북한이 현재의 어려운 이행기를 헤쳐나가도록 도와주기를 원한다는 것을 알아내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수년 전부터 북한은 미국인들에게 미군이 남한에 계속 주둔하여 한국인들이 강국 일본과 부상하는 중국에 대처하도록 도와야 하며, 또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남한한테 흡수되지 않도록 보호해야 한다는 말을 은밀히 하기 시작했다. 1997년 북한전문가 쎌릭 해리슨은 한 북한장성과 인터뷰를 가졌는데, 그는 해리슨에게 북한이 공적으로는 주한미군의 철수를 요구할지 모르지만 현실적으로는 미군이 한반도에 계속 주둔해야 한다고 말했다.13 2000년 6월의 정상회담에서 김정일은 본질적으로 똑같은 이야기를 김대중에게 직접 했다. 이런 극적인 변화는 현재 진행중인 화해와 외교가 반세기 동안 한반도에 존재해온 극도의 긴장상태를 어떻게 마침내 해소할 수 있는지를 이해하는 열쇠이다. 그것은 김대중이 퇴임 전에 한국전쟁을 종식시키기를 원하지만 한반도의 통일은 아직 2,30년 미래의 일이라고 말한 이유를 설명해준다. 무엇보다 그것은 진행중인 화해의 결과들을 평양이 두려워하지 않는 이유를 설명해준다. 성공을 위해 필요한 것은 다만 미국이 남한측의 코치, 치어리더, 그리고 때로는 쿼터백의 역할에서 두 개의 한국을 한데 묶어주는 (혹은 경우에 따라서는 따로 떼어놓는) 정직한 중개인으로 자신의 역할을 바꾸는 일인데, 워싱턴이 한반도에 머물러 있기를 원하기─영원히 머물러 있고 싶은 듯이 보이는데─때문에 그것이 그리 힘들지 않을 것이다.

게다가 미국이 한국에 계속 관여하는 것은 동아시아와 태평양에서 미국의 전략적 지위가 갖는 한 양상일 뿐이다. 일본 또한 1947〜53년에 강요받은 전후 합의의 틀에 머물러 있으며, 이런 틀에 반대하는 오끼나와의 시위나 민족주의적 비판에도 불구하고 이 틀에서 벗어나려는 어떤 조짐도 보이지 않는다. 1995년의 ‘나이독트린’(Nye Doctrine)은 같은 전략을 20년 더 연장한다는 계획이었고, 1998년에는 당시 미국 국방장관 코언이 한반도가 통일된 이후에도 미군이 이 지역에 무기한 주둔할 것이라 말했다. 최근 들어 미 국방부는 태평양 안보의 주도권을 둘러싼 새로운 도전자에 맞서 경계태세를 강화해왔다. 국방부의 연례보고서들은 이 ‘도전자’가 누구인지 명시하지는 않았지만, 최근의 사건들─북미간의 긴장완화나 미국이 중국본토의 공격에 맞서 타이완을 방어할지도 모른다는 소문, 그리고 클린턴의 베트남 방문─로 인하여 많은 중국인들은 점차 심화되는 중국에 대한 미국의 포위정책 내지 일종의 은밀한 봉쇄정책을 알아차리게 되었다. 여기에 비추어보면, 통일까지는 아니더라도 두 국가가 공존하는 평화로운 한반도는 처음으로─그렇다, 55년 전 러스크(Dean Rusk)가 최초로 38도선에 경계를 그은 이래 처음으로─미국의 대아시아 전략의 논리에 꼭 들어맞는다.

불행히도 이 글을 쓰는 싯점(2001년 5월)에서는 부시행정부가 클린턴의 뒤를 이어 햇볕정책을 기꺼이 지지할 것 같지가 않다. 대신 우발적 사건과 의도적 이탈이 묘하게 결합됨으로써 부시는 오랜 우방이건 적국이건 할 것 없이 거의 모든 나라들과 껄끄러운 관계에서 대통령직을 시작하게 되었다. 임기 시작 100일도 채 되기 전에 그는 일본, 러시아, 중국 그리고 남북한의 반감을 사는 한편 국가미사일방어계획으로 유럽 동맹국들을 소외시켰으며, 지구온난화에 관한 쿄오또의정서를 폐기한다는 무모한 결정을 내려 전세계에 충격을 주었다. ‘에히메 마루’(Ehime Maru)호의 비극이 우연히 부시의 이런 정책패턴의 시초가 되었다면, 김대중에 대한 인색한 대접이나 러시아 외교관 50명의 갑작스런 추방, 그리고 쿄오또의정서의 폐기는 모두 계획된 것이었다. 4월 1일 하이난섬 근해에서 발생한 미해군 정찰기와 중국 전투기의 충돌경위가 밝혀짐에 따라, 이제 이 사건은 하와이의 미군사령부가 11월과 12월 대통령선거의 교착상태를 틈타 그같은 정찰비행을 늘리기로 (대통령의 승인 없이 독자적으로) 결정한 데서 예측가능했던 결과로 보인다. 말하자면, 중국 공군은 이런 비행에 저항작전을 강화하는 것으로 대응한 것이다.14

미국 잠수함 그린빌이 와이키키 해변 앞바다에서 기동훈련을 벌인 것은 무슨 특별한 이유에서가 아니라─미국인들이 낸 세금으로─몇몇 민간인들을 잠수함에 태워주기 위해서였다.15 이 승객들이 떼를 지어 돌아다니며 조종장치들 앞에서 조종사 역할을 연기하고 있을 때 함장은 핵공격 잠수함을 물위로 부상하도록 명령함으로써, 공교롭게도 에히메 마루호를 전복시키고 학생 4명을 포함한 9명의 일본 민간인을 죽게 만든 것이다. 이는 매우 불행한 사고이기는 했으나 정찰기 추락과 마찬가지로 조만간 일어날 수밖에 없는 사고였다. 두 사건 모두 무익하되 비용은 엄청나게 드는 미국 군사기구의 성격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건이다.

미국은 3천억 달러라는 냉전시대 수준의 방위예산을 유지하고 있어서, 모든 군사적 경쟁국들의 방위예산을 모두 합친 것보다 더 많은 지출을 계속하고 있다. 그렇지만 소련은 10년 전에 이미 붕괴했고 어떤 다른 미국의 적국도 그 자리를 대신하려고 한 적이 없었다. 주일·주한 미군도 연간 420억 달러의 예산을 소요하며 예전처럼 유지되고 있지만,16 지난 수년간 이 전진배치가 거둔 성과는 갈수록 줄어든 반면 미군 병사들과 일본 및 한국 시민들 사이의 불미스러운 사건들은 늘어났다.

김대통령은 백악관에서 부시와 만난 최초의 외국원수였으나 그를 맞이한 것은 벌써 내부 갈등이 시작된 행정부였다. 김대통령이 도착하기 하루 전 파월(Colin Powell) 국무장관은 기자들에게 북한 미사일 폐기를 위한 협상에서 클린턴이 이룬 성과를 자신이 그대로 이어갈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부시의 김대통령에 대한 무례한 대접이나 북한에 대한 강경노선으로 인해 파월은 자신의 입장을 철회할 수밖에 없었고, 한편 김대통령의 보좌관들은 이 회담이 당혹스러웠다고 공개적으로 말했으며 사적으로는 부시의 어설픈 태도를 비난했다.17

만일 부시가 예전의 미소대결 시대가 되돌아왔음을 모스끄바에 통고하고 싶다면, 외교관 추방이라는 냉전 스타일로 임기를 시작하는 것보다 더 나은 방법은 없을 것이다. 부시행정부가 미국의 역량을 다시금 ‘열강들’ 즉 러시아와 중국(우연찮게도 이 나라들은 냉전시대 미국의 오랜 적인데)에 집중한다는 의도를 밝힌 이상,18 워싱턴과 모스끄바 간의 긴장 고조는 예측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 두 나라가 정말 열강이기는 한가? 러시아경제의 규모는 남한보다 더 작고, 중국경제는 아직 개발도상에 있으며 중국군은 전지구적으로 군사력을 투입할 역량이 없다. 이 두 나라에 집중한다는 것은 부시와 그의 보좌관들이 냉전 종결 이래 거의 배운 바가 없거나 아니면 가령 NMD같이 자신들이 애지중지하는 전략들을 정당화하기 위해 다시금 적을 만들어내려 한다는 것을 뜻한다. 마찬가지로 일본에 기지를 둔 EP-3E 정찰기와 중국 전투기의 충돌과 그로 인한 예측가능한 대결양상 또한 냉전을 상기시킨다. 그런데 도대체 무슨 목적으로 그런 것일까? 부시 취임 이래 중국이 갑자기 미국의 적이 된 것인가, 아니면 미국이 대통령도 제대로 통제하지 못하는 깡패 같은 국방부를 가진 것인가?

이렇듯 과거의 적들과의 관계가 악화되는가 하면, 지구온난화라는 무서운 위협에 대한 부시의 놀라운 무감각증은 그 자신이나 그의 보좌관들이나 미국의 우방이 어떤 생각을 하는지 실제로는 개의치 않음을 시사한다. 세계 오염물질의 25%를 배출하는 국가가 단 한번에 온실가스 감축에 등을 돌리고, 그럼으로써 오랜 동맹국들에 차마 못할 짓을 한 것이다. 김대중을 당혹하게 만든 때와 꼭 마찬가지로 부시는 독일수상의 백악관 방문 전날 밤까지 기다렸다가 이 성명을 발표했다. 그런데 쉬뢰더(Gerhard Schröder)는 쿄오또의정서에 대한 유럽의 주된 지지자였다.

대외정책이 이처럼 출발부터 망가진 사태의 핵심에는 무책임한 일방주의가 놓여 있다. 이는 수십년간 지속된 공화당의 정책기조로서, 30년 전 한국과 일본에 큰 반향을 일으킨 ‘닉슨 충격’과 더불어 시작되어 레이건 시절에는 ‘별들의 전쟁’이라는 환상 좇기로 이어졌다. 그러나 일방주의는 동아시아에서 한층 더 나쁜 결과를 낳았는데, 2차대전 동맹의 결과로 미국의 유럽정책은 다자간 상호주의임에 비해, 1945년 9월 미군의 토오꾜오와 서울 진주 이래 동아시아에서는 일방주의가 미국 정책의 패턴이었다. 현재 국방장관 럼스펠드의 주관 아래 4년에 한번 제출되는 국방부 방위보고서가 극비리에 재조정되고 있는데, 내부 인사들에 따르면 이는 방위의 강조점이 유럽에서 아시아로 전면 이동하였음을 알리는 신호가 될 것이다.19 럼스펠드와 그의 우군들은 중국의 부상, 인도와 파키스탄 간의 핵무기 경쟁, 그리고 북한의 의도에 대해 우려하고 있다고들 한다. 이 새로운 방침 역시 아무런 협의 없이 아시아 동맹국들에 강요될 것인가?

이런 무모하고 혼란스런 변화의 와중에서 거의 잊혀진 사실은 부시가 어느 모로 보나 선거에 의해 부여된 민주적 위임권을 갖고 있지 못하다는 점이다. 2000년 11월 그는 주민투표에서 졌으며 십중팔구 선거인단 투표에서도 졌을 것이다. 그런데도 그가 미국과 전세계에 장기적 영향을 미칠 과격한 방침들을 만들어내고 있는 것이다. 가장 크게 영향을 받을 한반도의 경우, 부시의 조치들은 남북관계를 사실상의 교착상태로 이끌었다. 그러나 다른 예를 들 것도 없이, 이 경험만으로도 미국의 대통령이 어떻게 미국 주민의 위임권 없이도 집권하여 즉각 남북한 양측에 골칫거리를 안겨줄 수 있는지를 알 수 있는데, 이 점이야말로 한반도 문제는 한반도 주민들이 관장해야 함을 보여주는 또하나의 논거인 것이다. 20세기의 재앙들과 같은 것이 다시 발생하지 않도록, 새로운 세기에는 기필코 이 일이 조만간 실현되어야 한다. 

〔黃靜雅 옮김〕

 

 

  1. 클린턴 대통령이 무엇보다 11〜12월 플로리다에서의 대통령선거 패배 때문에 갈 수 없었음을 보여주는 조사보고로는 Michael R. Gordon, “How Politics Sank Accord on Missiles with North Korea,” New York Times 2001년 3월 6일, A-1, A-8면 참조.
  2. 1950년대 말 미국이 남한에 핵탄두 미사일을 처음 배치한 이래 얼마나 많은 미국측 미사일이 시종일관 북한을 위협해왔는지를 지적한 사람은 드물지만, 1999년 9월 페리(William Perry) 대사는 북한의 미사일이 미국의 이같은 위협을 저지하기 위한 것임을 인정하는 이례적인 성명을 발표했다. 북한의 3단계 미사일은 핵탄두를 실어나를 충분한 발진력을 갖고 있지 않거니와, 북한은 미사일 투사중량을 (가령 알루미늄 합금을 이용하여) 줄이거나 크기가 아주 작은 핵탄두를 제조할(이를 위해서는 북한이 갖고 있지 않은 초고속 엑스선 카메라가 필요하다) 기술이 없다. 설사 훨씬 가벼운 화학·생물학탄두를 설치한다 해도 미사일의 제1단계에서 미국까지 닿을 만큼 그 탄두를 충분히 빨리, 그리고 충분히 멀리 들어올릴 추진력이 있는지도 분명치 않다. 또한, 이 미사일의 원격계측방식은 초보적인 수준이었는데, 이는 미사일이 최고점에 도달한 이후 목표를 확실히 조준할 수 없어서 곡선오차가 자그마치 3마일에 달할 수 있음을 뜻했다. 또한 북한은 탄두가 대기권으로 재진입하는 순간 폭파되지 않도록 막는 열저항 기술을 갖고 있는 것 같지도 않다. 마지막으로, 미사일 ‘기지’라는 것이 너무 초보적인 수준이라 미국 과학자들은 “이 소박하고 범상한 시설은(…)거의 주목할 가치가 없는 것으로, 최소한의 기본적인 시험시설로 이루어져 있음”을 알게 되었다. 북한의 미사일계획에 관한 좋은 논의로는 Selig Harrison, “The Missiles of North Korea: How Real a Threat?” World Policy Journal 17권 4호(2000년 가을) 13〜24면 참조.
  3. 특히 Spencer R. Weart, Never at War: Why Democracies Will Not Fight One Another (New Haven: Yale University Press 1988) 참조. 내 생각으로는 이 책이 점점 늘어나는 이 분야의 문헌 가운데 가장 뛰어나다. 정치학적 설명으로는 Bruce Russett, Grasping the Democratic Peace: Principles for a Post-Cold War World (Princeton: Princeton University Press 1933) 참조. 두 권 모두 ‘민주주의적 평화’를 다룬 문헌에 관한 광범위한 서지사항을 제시하고 있다.
  4. (UNCOK의 수석서기관인) 렌보그(Bertil Renborg)는 국가예산의 80%가 경찰과 군대에 사용되었다고 말했다(UN Archives, BOX DAG-1/2.1.2, box 3, 1950년 3월 31일자 보고서).
  5. 우정은은 1946년에서 1976년까지 미국과 일본으로부터 받은 경제적·군사적 원조를 150억 달러로 추정하는데 이는 낮게 잡은 수치이다. Jung-en Woo, Race to the Swift: State and Finance in the Industrialization of Korea (New York: Columbia University Press 1991) 45〜46면 참조.
  6. 같은 책.
  7. William I. Robinson, Promoting Polyarchy: Globalization, US Intervention, and Hegemony (New York: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96) 91〜92, 121〜25면.
  8. Raymond Williams, The Country and the City, St Albans: Paladin 1973, 231면.
  9. 특히 1980년대 학생운동에 관한 이남희의 미출판 박사학위논문(University of Chicago, 2000) 참조.
  10. 에버스타트(Nicholas Eberstadt)의 가장 최근 저서 The End of North Korea(Washington, D.C.: The American Enterprise Institute Press 1999)를 포함하여, 특히 1990년까지 거슬러올라가는 그의 논문과 저서들을 참조할 것.
  11. 이에 대한 나의 논의는 Korea’s Place in the Sun: A Modern History (W.W. Norton 1997) 10장 참조.
  12. New York Times 1999년 4월 22일.
  13. Selig Harrison, “Promoting a Soft Landing in Korea,” Foreign Policy 106호(1997년 봄).
  14. 『뉴욕타임즈』는 2001년 4월 12일자(A-1면)에서 이러한 정찰비행이 ‘최근 증가’한 사실을 해설 없이 보도했다. 그러나 국방부 내부에 상당한 연줄이 있는 것으로 잘 알려진 전직 레이건행정부 관리 러트웩(Edward Luttwak)은 『로스앤젤레스타임즈』(『쌘호세 머큐리』 2001년 4월 13일자에 다시 게재)에 하와이 소재의 태평양지구 총사령관인 블레어(Dennis Blair) 제독이 정찰비행의 증강을 명령했고 이에 맞서 중화인민공화국 국방장관 츠 하오톈(Chi Haotian)은 중국군 전투기 조종사들에게 미군의 비행을 차단하는 일에 더 공격적으로 임하라는 명령을 내렸다고 썼다. 러트웩은 “그 충돌사건은 우발적인 면이 전혀 없었다”라고 썼다. 다른 보도에 따르면, 블레어 제독은 부시에게 승무원들이 억류되어 있는 동안 미 항공모함 키티호크호를 중국 연안에 파견하도록 건의하기도 했으나 부시가 거절했다고 한다(New York Times 2001년 4월 13일, 1면, David Sanger의 기사)
  15. 이 사건의 후속보도에 따르면, 당시 잠수함은 정규적인 기동훈련중이었던 것이 아니라 단지 해군이 이 민간인들을 실망시키고 싶지는 않다는 이유 때문에 출항한 것임이 밝혀졌다.
  16. 이 예산수치는 Foreign Affairs 2001년 3-4월호의 해리슨(S. Harrison) 논문에서 인용한 것이다.
  17. 이름을 밝히지 않은 한 보좌관이 『코리아헤럴드』 2001년 3월 13일자에서 그 회담이 “당혹스러웠다”고 말했다. 3월 13일 나는 한국에 관한 한 학술회의에서 한국 국회의원과 대화를 나누었는데, 그는 김대통령의 보좌관들이 부시의 서투른 전술을 비난했다는 이야기를 했다.
  18. Condoleezza Rice, “Promoting the National Interest,” Foreign Affairs (2000년 1-2월) 참조.
  19. Tom Bowman, “Pentagon Faces Transformation,” The Baltimore Sun 2001년 3월 13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