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 페미니즘으로 문학을 읽는다는 것

 

너머의 퀴어

2010년대 한국소설과 규범적 성의 문제

 

 

차미령 車美怜

문학평론가, 광주과학기술원 기초교육학부 교수. 평론집 『버려진 가능성들의 세계』 등이 있음. mrcha@gist.ac.kr

 

 

1. 인정투쟁: 시민권과 퀴어

 

다큐멘터리 「위켄즈」(이동하 감독, 2016)는 2003년 시작된 게이 합창단 지보이스(G-Voice)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단원들의 삶과 사랑, 노래들을 무겁지 않은 분위기 속에서 풀어가던 영화는 중반에 이르러 작은 변곡점을 맞는다. 김조광수와 김승환의 결혼식, 무대에 있던 부부와 지보이스를 향해 오물이 뿌려진 것. “그나마 똥이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을 먼저 했어요. 칼을 들고 올라왔을 수도 있고, 화학물질 같은 걸 들고 올라왔을 수도 있잖아요.” 영화 전편에 걸쳐 지보이스의 노래들은 진솔하게 다가오거니와, 특히 이 결혼식 장면에 이어진 「세상아 너의 죄를 사하노니」와 단원 스파게티나의 죽음을 애도하는 「북아현동 가는 길」의 울림은 강렬하다. 인분 투척 사건 이후로 “지보이스를 하는 이유가 생긴 것 같다”는 한 단원의 술회가 일러주듯이, 영화의 후반부에서 지보이스의 무대는 팽목항으로, 평택으로, 광장과 거리로 확장된다. 자신과 사랑을 지켜내고, 시민으로서의 권리를 주장하며, 다른 이들의 고통에 연대하는 것. 그들은 지금 싸우고 있다.

주지하다시피 호네트(A. Honneth)는 ‘인정투쟁’ 개념을 전개한 헤겔의 작업들을 검토한 후, 미드(G. H. Mead)의 사회심리학으로 이 개념의 경험적 전환을 시도한다.1 호네트의 저작에서 눈여겨볼 대목 중 하나는, 헤겔과 미드를 경유한 끝에 그가 세가지 인정 형태(사랑, 권리, 연대)에 대응하는 세가지 무시의 형태(신체적·인격적 굴욕, 권리의 부정, 가치의 부정)를 저항의 출발점으로 사유한다는 사실이다. 호네트의 논지에 따르면 그러한 무시의 경험은 행위의 동기로 작용하여 사회적 투쟁의 원천이 된다. “인정 요구에 대한 무시의 경험에 동반하는 모든 부정적 감정 반응은, 그 자체 속에 이미 그 관련자들로 하여금 자신들에게 가해진 불의(Unrecht)를 인지적으로 드러냄으로써 정치적 저항의 동기를 갖게 하는 가능성을 포함하고 있다.”(263면)

『인정투쟁』에서 호네트가 살피는 두 사상가에 따르면 개성의 역사적 해방은 기나긴 인정투쟁을 통해 이루어지며, 개인의 자기실현과 사회 공동체의 성장은 불가분의 관계를 맺는다. 하지만 인정 논리가 이같이 사회를 갱신하는 역동적인 가능성이 아니라, 또 하나의 폭력으로 사유된다는 사실 역시 지나칠 수 없다. 배제된 자들에게 인정투쟁이란 곧 생사를 건 투쟁임이 환기되는 한 대담에서는, 자유주의적 인정 담론이 인정을 요구하는 선재적인 행위자로 주체를 묘사하지만(아타나시오우), 실상 인정은 “누군가가 이해 가능한 존재로서 나타나기 위해서 그 자신이 결코 선택하지 않았던 조건들에 의존하는 상태”(버틀러)를 의미한다고 비판된다.2

물론 같은 대담에서 버틀러는 “법과 정치가 우리를 전체화하는 것에 저항해서 싸워야만 하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법과 정치의 영역에서도 투쟁해야만”(143면) 한다고 지적하며 억압의 재구성을 환기하고 있기도 하다. 그의 주장대로 인정의 구조는 평가되고 의문에 부쳐져야 하며, 범죄화·병리화하는 규범 너머 삶의 가능성들은 지속적으로 천착되어야 한다. 그런데 퀴어(queer) 논의에 있어서, 이 문제는 좀더 짚어볼 이유가 있다. 한국사회에서 LGBT 등 주로 비규범적인 성정체성을 가리키는 용어로 통용되는 ‘퀴어’는, 게이·레즈비언 운동으로 대표되는 자유주의 정체성 정치를 반박하며 제출된 기획이기도 하기 때문이다.3 차이의 수용에 주목하건(정체성 정치) 동등한 권리에 주목하건(시민권 요구), 그같은 전략들이 근본적으로 체제 내에 포섭되는 방식이라는 비판과, 그 방식에 저항하는 움직임으로써의 퀴어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4

그러므로 관건은 정체성을 고정하고 배치하는 규범적 권력을 넘어서서, 퀴어를 변화를 생산하는 범주로 사유하는 것일 터이다. 이 글에서 간략하게나마 이 사실을 환기하는 까닭은 다른 곳에도 있다. 지금까지 한국소설의 어떤 성과들은 퀴어를 매개로 출현해왔으며, 그 잠재력은 최근 들어 더 선명해지고 있다. 하지만 그런 가운데, 소재주의적이라는 불만과 이른바 당사자성에 대한 의문도 제기되고 있는 듯하다. 퀴어 텍스트는 퀴어가 써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질문은, 곧 퀴어 텍스트의 수행성에 대한 물음일 것이다. 그러나 버틀러를 빌려 말하면, “퀴어는 레즈비언인 것이 아니다. 퀴어는 게이인 것이 아니다.”5 위치성의 차이와 그 복합성은 끊임없이 성찰되어야 하겠지만, 발화와 토론의 과정을 경유하여 퀴어는 구분의 폭력에 반대하는 모든 이들의 것으로 사유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니, 이 글 역시 LGBT/퀴어 정체성에 대한 규정적 이해를 도모하기 위한 것이 아닌, 성을 전체화하는 권력에 대한 동시대 소설의 다채로운 응답에 대한 탐구로 읽혔으면 한다.

 

 

2. 소명과 부활: 교회 너머의 퀴어

 

황정은(黃貞殷)의 「뼈 도둑」(『파씨의 입문』, 창비 2012)과 윤이형(尹異形)의 「루카」(『러브 레플리카』, 문학동네 2016)로 논의를 시작하려 한다. 이미 많은 주목을 받은 두 소설은 2010년대 한국소설의 핵심적 의미소인 애도의 문제를 중심으로 구성된다. 그런데 두 소설에서 초반부에 교통사고로 갑작스럽게 사망했음이 암시되는 ‘장’(「뼈 도둑」)과 ‘너’(「루카」)는, 서술자-주 인물의 동성 연인으로, 공히 “모태신앙”을 가진 기독교인으로 제시된다.

먼저 「뼈 도둑」과 「루카」에서 교회가 어떻게 재현되는지 환기해둘 필요가 있겠다. 「루카」에서 ‘너’의 신랄한 논평에 따르면, 한국의 대형교회는 돈이라는 주술적 매개를 중심으로 기복신앙화되었으며, 이념적 낙인을 통해 그 자신의 적대를 구성한다. 또한 「뼈 도둑」에서는, 성탄 밤 걸인을 내쫓은 후 자신들끼리 선물꾸러미를 나누던 교인들에 대한 ‘장’의 회상에 다음과 같은 진술이 이어진다. “사랑하지 않으면서 사랑하지 않는다고 말하지 않고 사랑한다고 말하는데 그건 사랑하지 않는 것보다 나쁘다.”(196면) 바꿔 말해, 교회의 사랑은 특정한 이웃을 배제하는 방식으로 작동하는데, 그것을 사랑이라 유포한다는 그 점에서 (사랑 아닌 것이 아니라) 혐오에 가깝다. 특히 ‘장’이 교회를 떠나기까지의 과정은, 교회

  1. 호네트는, 헤겔이 사회적 투쟁이 인간의 도덕적 충동에서 비롯된다고 봄으로써 마끼아벨리와 홉스의 사고 모델에 결정적 전환점을 부여한 것으로 평가한다. 악셀 호네트 『인정투쟁』, 문성훈·이현재 옮김, 사월의책 2011.
  2. 주디스 버틀러·아테나 아타나시오우 『박탈』, 김응산 옮김, 자음과모음 2016, 129~50면 참조.
  3. 정민우 「퀴어이론, 슬픈 모국어」, 『문화와사회』 제13권(2012) 참조.
  4. 잠재성, 유동성, 복합성, 불안정성 등을 의미하는 퀴어는, 특정한 정체성에 국한되지 않을 뿐 아니라 (게이 혹은 레즈비언 등을 포함하여) 모든 특정한 규범성에 반대한다. 해나 디 『무지개 속 적색』, 이나라 옮김, 책갈피 2014, 182면.
  5. 같은 면 및 버틀러 인터뷰(http://lolapress.org/elec2/artenglish/butl_e.htm)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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