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문 | 내가 사는 곳 ③
넓을 광(廣), 큰 덕(德)에 산다
김해자 金海慈
1961년 전남 신안 출생. 1998년 『내일을 여는 작가』로 등단. 시집 『무화과는 없다』 『축제』 『집에 가자』 『해자네 점집』, 산문집 『위대한 일들이 지나가고 있습니다』 등이 있음.
haija21@naver.com
속이 출출한데 입맛은 없고 마침 비가 내리는 저녁, TV에서 친구들끼리 곱창구이에 소주를 마시거나 치킨집에서 맥주를 마시며 깔깔거리는 장면이 나오면 울컥 그립다. 현관문 열고 5분만 걸어가면 치킨집과 식당이 즐비하던 도시 골목골목이. 우리 마을은 구멍가게 하나 없다. 며칠째 눈은 펄펄 내리는데 언덕 빙판길에 갇혀 백여 미터 내려가면 닿는 이웃집 가기도 망설여질 때, 여기 첩첩산중에 적막강산으로 사는구나 새삼 실감한다. 한밤중 바퀴 위에 노란 별 여럿 달고 꽁무니에는 붉은 별을 매단 채 2차선 도로를 달려가는 버스가 반갑기도 하다. 어디 아프리카 오지도 아니고 버스가 반갑다니. 스스로도 이상하다 싶지만 사위가 어두워지며 소리들이 사라지고 나면 매번 그렇다. 나도 별처럼 점 하나구나, 깜박깜박 명멸하며 내가 여기 살고 있구나. 인천과 서울 빼고는 가장 오래 살고 있는 이 변방이 내 마지막 자리가 될 것도 같다.
오가는 차들 뒤로 풍서천이 흐른다. 광덕산 망경산 태화산이 내려보내는 물줄기가 풍세와 천안 시내 수도꼭지다. 사람도 물자도 심지어 무 배추도 서울로 올라가는데 나는 왜 반대 방향으로 흘러왔나. 6년 살던 아랫집에서 백여 미터 위 산자락으로 옮긴 다음부터 동네 곳곳을 자주 내려다보게 된다. 지붕 모양도 색도 집의 나이도 각각이다. 함석지붕 슬라브지붕 양철지붕 그리고 잔디가 깔린 목조주택과 현대식 스틸하우스까지. 그 지붕 아래 몸 하나 누이기 위해 평생 가까이 걸리는 사람들도 있다. 거주지가 표시되는 주민등록 초본을 떼다 알았다. 이 집에 들어오기까지 내가 스무번 가까이 옮겨 다녔다는 것을. 인천의 숱한 자취방들은 기록되지도 않았으니 유목민이나 다를 바 없었구나.
*
천안역에서 버스로 40여분 걸리는 데서 산 지 8년째다. 천안이라고는 하지만 공주와 아산이 더 가까운 천안의 동남쪽 끝인, 광덕면에서도 내가 사는 보산원리는 진짜 꽁지다. 여기서 서쪽으로 다섯리(2킬로미터) 정도 가면 아산이고, 남쪽으로 십리 정도 가면 공주고, 북쪽으로 십리 가면 천안시, 동쪽으로 더 가면 세종이다. 키가 칠백 미터인 광덕산과 육백 미터를 채운 망경산이 경계다. 그러니까 천안과 아산과 공주의 끝들이 모인 곳이다. 끝은 시작점이기도 하다. 그래서 넓을 광(廣)에 큰 덕(德)인 광덕면이다. 대덕리 무학리 매당리 신흥리 보산원리 광덕리 등, 리 단위로 적게는 오십 많게는 백여가구가 모여 오천여명이 살고 있으니 아파트 단지 하나는 되는 규모다.
규모는 작아도 유래와 역사가 깊다는 광덕사가 있어서인지 버스가 자주 다니는 편이다. 광덕사 입구에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연세가 많으신 칠백살 호두나무가 아직 열매를 달고 있다. 몇년 사이 30분 간격이던 버스가 15분 간격으로 바뀌어 위급상황이 발생하지 않는 이상 동네 어르신들은 버스를 이용한다. 버스 타고 병원 가고 장에 가고 복지관에 간다. 물론 승용차를 이용하는 사람들도 늘어간다. 주로 귀촌한 젊은이들이다. 여기서 젊은이라 하면 여기서 어른들 기준으로 칠십대 전반까지를 가리킨다.
추어탕 먹으러 가다 느닷없이 임영자씨가 말했다. “고마워. 늙은이랑 놀아줘서.” 별말씀 다 하신다니까. “유통기한이 지났는디 폐기처분도 못하고 사는 게 늙은이”란다. “금 가고 깨진 항아리는 소금단지로라도 써먹”는데 늙은이는 어디 쓸 데가 없단다. 일흔다섯인 임영자씨는 늙은이와 젊은이의 경계선에 있다. 8년 사이 초상 없는 해가 없었다. 양로원 가는 분도 해마다 는다. 작년 여름까지 경운기 몰고 딸기밭에 가던 아흔네살 어르신을 올해는 볼 수 없다. 팽나무 옆 정자에 앉아 계시던 여든다섯살 어르신도, 한달간 두유만 자시다 깔끔하게 돌아가신 아흔여덟세 할머니도 이젠 못 본다.
동네 뒷산 평평골 처처마다 뭐가 있는지 훤히 꿰뚫고 있는 맹대열씨에게 산나물 얘기를 듣다, “달래가 어딨어요?” 묻자 “땅에”라는 간단한 답이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