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평론

 

노동시의 확장

이론적 모험과 가능성

 

박수연 朴秀淵

문학평론가. 평론집 『문학들』 『말할 수 없는 것과 말해야만 하는 것』 등이 있음. qkrtk@cho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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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시와 관련하여, 김수이(金壽伊)는 「얼굴 없는 노동, 자본주의의 역습」(『창작과비평』 2006년 겨울호)에서 두가지 논점을 제출한다. ①‘민중이 사라진 시대의 노동’과 ②‘노동시의 재구성’이 그것이다. 내용상으로 단락화된 이 두가지 논점은 수미일관한 내적 인과성의 논리를 획득한다고 여겨진다. 자본이 노동을 실질적 포섭 단계로 포괄하는 시대의 정동(情動)과 정동적 노동이라는 문제설정, 그리고 그 논의의 또다른 토대를 이루는 철학자 스피노자(B. Spinoza)를 염두에 두면서 진술되었을 비물질노동의 개념은, 노동문학이 발본적으로 전환해야만 할 필요성을 설명할 수 있는 핵심적인 근거이다. 이를테면 현실이 변했으니 그 현실의 언어적 표현이 달라지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이 당연한 일이다. 김수이의 글은 이런 정황 속에서 한국 노동시의 막힌 출구를 찾아보려는 하나의 노력으로 평가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역시 90년대 이후 탈중심화론의 문학담론에서 보면 ①과 ②는 서로 상이한 층위에서 움직이는 개별적 구성물들이다. 이것들을 공통의 목적과 운동으로 결합할 수 있는 힘은 오히려 자율적 운동체들의 우연적 만남을 통해 형성 가능하다. 탈중심화론과 무관하지 않은 우발성의 유물론(알뛰쎄르)이 중층결정되는 존재의 역학을 표현하듯이, ①과 ②가 일관된 논리로 결합할 수 있는 근거는 순전히 우연적 조건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그 둘은 서로에게 외부적일 뿐 필연성의 고리로 연결될 수 있는 내적 계기를 가지고 있지 않다. 문학은 노동현실로 환원될 수 없으며 현실 또한 문학언어로 반영될 수 없다는 통념의 90년대 이후 판본이 자본주의의 모든 현실을 기호론적으로 해명하려는 편향이다. 이에 의거한다면, 노동시는 그 기호들이 펼치는 자율적 코드화의 한 사례에 지나지 않는 셈이다. 그런데 이 자율적 코드의 유희는 현실의 대상보다는 사고의 대상을 기초로 하기 때문에,1 그래서 현실은 모두 허구일 뿐이고 결과적으로는 정치·경제·사회의 영역이 유사한 형식의 기호로 치환될 수 있기 때문에, 하나의 영역에서 다른 영역으로 손쉽게 전이된다. ①과 ②가 수미일관한 논리로 결합할 수 있는 것은 그러므로 자본주의적 현실 개조를 위한 유물론적 시도의 효과라기보다는 사고 대상의 형식적 유사성이 강제한 기호론적 결과라고 보는 편이 더 정확하다.

김수이의 입론에 대한 고봉준(高奉準)의 논평(「문제는 실감이다」, 『창작과비평』 2007년 봄호)이 주로 지적하는‘노동시의 불가능성’론도 이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고봉준은, 네그리(A. Negri)에 근거하는 한 노동과 삶을 구분할 수 없기 때문에 노동시라는 개념도 필요 없어질 것이라고 말한다. 이 진술은 형식논리적으로 타당하지만, 그렇다고 그 부정명제의 성립 자체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삶이 곧 노동이기 때문에 그것을 언어화한 문학은 모두 노동문학이라는 명제가 그것이다. 고봉준도 분명히 의식하는 것으로 보이는 이 후자의 명제야말로 김기택(金基澤)의 「사무원」을 90년대 이후 노동시의 대표적 성과로 요약하는 김수이가 애초에 의도했던 의제 설정이라고 여겨진다. 따라서‘노동시’라는 개념에 관한 한, 두 사람 사이에 커다란 차이가 있는 것은 아니다.

이와 관련해서 노동시에 대한 가장 최근의 공식적 성취2라고 할 수 있는 두 사람의 글에서 공통적으로 원용되는 이론이 네그리 등의 이딸리아 자율주의운동이라는 사실도 주목해둘 만하다. 노동과 자본주의적 현실이라는 결코 화해할 수 없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자본』이 결여하고 있는‘국가’의 영역을 끌어오면서 맑스주의를 일반화하려는 시도들이 한편에 있다면, 이딸리아 자율주의운동은 가치법칙의 파괴라는 반경제학적 관점을 동반하는 무정부주의적 이론으로 또다른 한편을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후자의 이론에서 최종적 귀결로서 등장하는 것이 이른바 사회적 노동의 자기가치 실현을 통한 구성권력과 그 효과로서 국가의 해체이다. 김수이와 고봉준의 글이 노동과 노동 재생산에서의 국가와 이데올로기 문제를 제기하지 않는 것이 그 이론의 무정부주의적 성격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일차적으로는 현재적 수준에서의 한국의 노동시가 그에 합당한 수준의 이념을 제기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편이 옳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고 해도 노동과 국가의 문제를 힘주어 강조할 여지가 두 사람의 글에는 별로 없어 보인다. 위와 같은 이론적 근거 때문에 노동의 재생산을 위한 국가적 제약과 그에 따른 갈등요인들이 두 사람의 글에서는 삭제될 수밖에 없는 셈이다.

일반적으로 말하면, 노동시가‘노동’시일 수 있는 한가지 조건은‘시’의 영역에서일지라도‘노동’의 관점에서‘국가’의 문제를 환기하는 것이다. 노동시의 이념이 있다면 바로 이것, 즉 계급적 차이를 무화할 수 있는‘국가의 민주화’이며, 그 민주화란‘지배계급과 피지배계급의 지적 차이를 소멸시키는 것’(윤소영)3이다. 이 인식의 진전이 인간학적·정치적 소통이라는 점을 노동시는 어떻게 형상화할 수 있을까. 당연히 미의 윤리학이라는 문제가 제기될 것이다. 소통은 관계맺음이고, 그 관계맺음은 개인주의를 넘어서서 외부적 조건들과의 구조적 문제틀을 형성하는 것을 뜻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한 개인의 초(超)개인적 이성으로 비극적 정념이나 왜곡된 의식을 해방하는 문제가 제기되는데, “잉여노동의 제한,‘인간학적 차이’(지적/성적 차이)의 종언으로서‘인권의 정치’가 미(美) 그 자체의 조건”4이라는 말이 되새겨져야 하는 것은 그 때문이다.

김수이와 고봉준의 논의는‘민중이 사라진 시대’의 노동의 의미와 그에 대한 시적 사유를 새로운 이론에 근거하여 발본적으로 제시하는 데 성공했음이 분명하다. 일례로, 김수이의 글은‘노동시’에 대한 저간의 논의를 단순 반복하는 것을 넘어서 자본주의적 현실의 전환적 국면에 대응하여 그에 합당한 노동시론을 제출하려 한다. 긍정적으로 평가될 수밖에 없는 이 입론은 그러나 80년대적 문제설정의 핵심을 충분히 쟁점화하는 데는 그다지 성공적이지 못하다. 그 핵심을 주체와 이념의 문제로 요약한다면, 김수이에게 그 문제는 한편으로는 사무직 노동자의‘노동권’을 통한 주체의 확장으로 귀결되고 다른 한편으로는 비정규직 노동자의 증가로 대변되는 노동현실의 변화를 “개인의 내면세계와 감각과 미학”이 가진 “무의식적 저항의 속성”으로 돌파하는 일로 귀결된다.

이런 논점 확장은 첫째, 사고의 대상과 현실의 대상을 혼동하고(사회노동자의 강조), 둘째, 노동이 상황 속에서 실현하는 자기가치의 문제를 자기관계의 문제로 축소하는 결과(환유적 언어체계의 강조)를 가져올 뿐이다.

 

 

2

 

왜 하필 노동시인가. 이 질문은, 노동시의 현재가 한국문학의 한 영역을 대표한다고 누구도 말할 수 없는 사태로부터 제기된다. 그것은‘열광 뒤의 환멸’이라는 정세적 국면과 맥락을 같이하는 것인데, 80년대의 혁명운동 속에서 노동자계급의 헤게모니가 노동문학의 사회운동적 필연성을 당연시하도록 했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최근의 노동문학이 처한 정황은 그같은 혁명운동의 퇴조 혹은 노동조합의 사회운동적 성격의 상실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아야 한다.

이런 와중에 노동시라는 의제와 함께 네그리의 비물질노동과 들뢰즈(G. Deleuze)의 행동학(ethology) 개념이 제출된 것은 노동문학의 소강상태에 가해진 효과적 충격으로 인정되어야 할 것이다. 그 개념의 문학적 실례로 김기택의 「사무원」을 인용하며 펼치는 김수이의 입론은 전통적인 육체노동 중심의 노동문학관에 대해 분명 중요한 성찰의 기회를 제공했다. 그러나 이 기회는 조금 다른 방향에서 다시 성찰될 필요가 있다고 여겨진다. 3

  1. 맑스는‘포이에르바흐에 관한 테제’중 첫번째 테제에서‘사고의 대상’과‘현실의 대상’을 구분하고, 관념론과 구분되는 유물론은 현실의 대상을 사유한다고 주장한다.
  2. 노동문학의 실천적 도약이 목표인‘리얼리스트 100’의 경우도 아직 일관된 견해를 제출하고 있지는 않다.
  3. 스피노자의 말을 빌리면, 노동자로 하여금 1종의 인식(원인을 알지 못하는 인식)에서 2종의 인식(원인에 대한 인식)으로 나아가도록 하는 것이다.
  4. 에띠엔 발리바르 「스피노자, 정치와 교통」, 윤소영 편역 『알튀세르의 현재성』, 공감 1996, 187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