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론

 

놋쇠하늘에 맞서는 몇가지 방법

리얼리즘·모더니즘·민족문학

 

 

윤지관 尹志寬

문학평론가. 평론집 『희망의 문학』 『불을 찾아서』 등이 있음. jkyoonjk@hotmail.com

 

 

1. 놋쇠하늘의 안과 밖

 

임규찬(林奎燦)의 「리얼리즘과 모더니즘을 둘러싼 세 꼭지점」(『창작과비평』 2001년 겨울호)을 흥미롭게 읽었다. 이 글은 최원식(崔元植) 황종연(黃鍾淵) 두 분의 평론집과 함께 졸저 『놋쇠하늘 아래서』(창작과비평사 2001)를 다루고 있는데, 그의 구도에 따르면 나의 ‘리얼리즘론’은 삼각형의 한 꼭지점을 이루기는 하지만 밑변에 위치해 있어서 왠지 저 높은 곳에 있는 다른 꼭지점을 보필하는 한 항목으로 동원된 것처럼 보인다. 이 모형은 철학적으로 리얼리즘(윤지관)과 모더니즘(황종연)을 각각 정(正)과 반(反)으로 하고, 그것들의 회통(최원식)을 합(合)으로 하는 헤겔식의 변증법 삼각형을 연상시키고, 역사적으로 필경 통일고려로 끝장날 후삼국지처럼 여겨지기도 해서 재미있다. 개인적으로야 밑변에다 지양의 대상이 된 딱한 처지이긴 하지만, 이처럼 활달한 접근을 보는 독자로서의 마음은 흔쾌하다.

이 삼각형 그림은 그간 간간이 이루어졌던 리얼리즘-모더니즘 논쟁의 불씨를 되살려놓았다는 점에서도 사줄 만하다. 리얼리즘과 모더니즘의 대립틀과 그를 둘러싼 물음은 근대성과 맺어진 자본주의체제가 지속되는 한 의미있고 창의적인 문제들을 내장하고 있다는 소신을 가진 사람으로서, 우리 비평담론에서 이 ‘억눌린 것의 귀환’이 가지는 의의는 작지 않다고 본다. 돌이켜보면 미국의 대표적인 한 비평가 프레드릭 제임슨(Fredric Jameson)이 서구 비평담론에서 일어난 수많은 귀환들 가운데서도 가장 극적인 것이 바로 이 ‘리얼리즘-모더니즘’ 논쟁임을 환기한 것도 벌써 20여년이 지난 일이 되었지만, 그가 당시 이 귀환의 계기로 본 포스트모던의 도전이라는 새로운 국면은 오늘 우리의 현실에서 더욱 절실한 과제로 던져져 있는 것이 아닌가? 탈근대적 상황에서의 문학적 대응을 모색해본 제임슨의 다음 대목이 새삼 눈길을 끄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이런 상황 아래서, 어떤 새로운 리얼리즘의 기능이 분명해질 수도 있다. 즉 소비사회에서 사물화의 힘에 저항하고, 오늘날 삶과 사회조직의 모든 차원들에 존재하는 파편화에 의해 체계적으로 와해되어 있지만 점점 더 하나의 세계체제가 되어온 다른 나라들에서의 계급투쟁뿐 아니라 계급들 사이의 구조적 관계를 투사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인, 저 총체성의 범주를 재창조하는 것이다. 이런 리얼리즘 개념은, 경험이 습관들과 자동화의 덩어리로 굳어져온 그런 세계 속에서 격렬한 인식의 재생에 역점을 두는 경향, 즉 모더니즘이라는 변증법적인 반개념을 통해서 늘 가장 잘 구체화되었던 것을 통합할 수 있을 것이다. (Fredric Jameson, “Reflections in Conclusion,” Ronald Taylor 〔ed. & tr.〕,  Aesthetics and Politics: Debates Between Ernst Bloch, Georg Lukács, Bertolt Brecht, Walter Benjamin, Theodor Adorno, NLB 1977, 212〜13면)

 

서구 비평 대가의 권위를 앞세운다고 정당성이 보장되는 것은 아니겠지만, 제임슨의 모색은 임규찬이 나에게 혐의를 두고 있고 어느정도는 사실이기도 한 ‘리얼리즘의 심화’를 통한 ‘모더니즘의 통합’이라는 구도와 거의 그대로 일치한다. 이 포스트모던한 시대에 철지난 리얼리즘을 고수하는 고집쟁이라는 식의 질책을 하도 받다보니 주장의 옳고 그름은 둘째치고 내 인간성에 뭔가 문제가 있나 하는 위기감조차 드는 사람에게는, 반가운 원군이 아닐 수 없다.

제임슨이 1970년대 말 리얼리즘의 재창조를 하나의 명제로 제시해본 것은, 미학에서 총체성의 복원이야말로 그가 후기자본주의라고 일컬은 포스트모던 시대의 도전, 즉 생산이 시야에서 사라지고 소비중심의 사회로 이행하면서 철저한 사물화가 삶의 전국면에 관철되어가는 추세에 맞서는 가장 실천적인 대응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이같은 판단은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의 단계에 대한 변별과 유관한데, 그에게 있어 예술에서의 모더니즘은 비록 파편화를 겪고 있지만 과거의 유산들이 여전히 숨을 쉬고 있던 시기라는 특수한 조건, 즉 ‘불완전한 근대화’의 소산이자 ‘비동시적인 것의 동시성’ 속에서 가능했던 성취였다. 그러나 포스트모던 시기에 이르러 이같은 과거와 자연의 흔적은 사라져버렸고, 이로써 모더니즘의 기법혁신들이 심층의 현실에 대한 접근을 가능케 했던 황금시절은 지나간 것이다. 모더니즘의 핵심기법인 ‘낯설게 하기’는 소비사회의 기제에 휘말려 새로운 인식에의 힘을 상실한 채 현대예술의 관습으로 떨어지고 만다.

사물화와 파편화로 망각된, 삶의 실상으로서의 인간관계를 살려내기 위해 ‘총체성’ 범주의 복원이 하나의 가능성이라는 제임슨의 판단은, ‘당위’의 제시인 면이 없지 않다. 하나의 문제제기로서 던져질 뿐 리얼리즘 자체에 대한 탐색으로 이어지지는 않은 것이다. 제임슨의 요청은 우리 문학에서 리얼리즘의 심화라는 명제와 만나는 곳이 없지 않음에도, 모더니즘의 일정한 성취에 대한 인정을 넘어 리얼리즘의 살아 있는 힘에 천착하지 못한 한계는 한계대로 남는다. 포스트모던 시대의 리얼리즘을 말하고 ‘총체성’의 범주를 되새긴다 하더라도, 자연의 영역이 완전히 사라진 탈근대의 공간으로 당대를 바라보는 제1세계적 관점이 여전하다면, 대체 어디에서 해방의 서사를 복원해낼 자원을 찾아낼 수 있을지부터가 막연해진다.

탈근대의 조건에 대응하는 서구 비평의 한 진지한 문학적 반응을 참조하되, 우리 문학의 현실과 겹치면서도 갈라지는 면을 바로 보는 것이 필요한 것도 이런 까닭이다. 20세기 전반기 모더니즘의 대폭발 이후 모더니즘이 주류를 형성해온 서구문학 일반과는 달리, 다름아닌 서구 모더니즘의 개화기에 본격화된 우리 근대문학이 모더니즘의 지배가 아니라 리얼리즘의 지향을 중심으로 전개되어온 사정의 ‘특수성’에 우선 주목하자. 지금까지도 우리 문학에서 리얼리즘의 힘이 살아 있고, 더구나 서구에서 상실되어버린 것으로 여겨지는 모더니즘의 가능성조차 열려 있다면(즉 ‘비동시적인 것의 동시성’이 아직도 우리에게는 유효한 국면이라면) 제임슨이 명제로 제시한 그 ‘새로운 리얼리즘의 기능’은 우리 현실에서 더 구체적인 내용을 획득하게도 된다.

그런데 참으로 딱하게도, 포스트모던 시대에 대한 대응으로서의 리얼리즘의 심화를 말하는, 어찌 보면 가장 멀쩡한 이론적 대응을 두고 ‘원론주의자’의 명패를 붙이는 관행은, 임규찬의 이번 글에서조차 예외는 아니다. 임규찬은 내가 “80년대와 별반 분리되지 않는” “그때 다져진 철길을 따라 철마가 의심없이 질주하고 있는 듯한 목소리”를 낸다고 하는데, 80년대 후반에 성행한 ‘원론적인’ 계급문학론자와는 다른 ‘절충론자’라는 평(최원식 「생산적 대화를 위하여」, 1991)까지 듣기도 한 처지에서는 금석지감이 들기도 하거니와, 모더니즘을 ‘퇴폐적 감수성’의 소산이라고 매도하던 당시의 과격풍토에 맞서 “리얼리즘과 모더니즘을 이분법적인 대립으로만 파악하는 태도는 오히려 리얼리즘의 이론창출에 장애가 될”(「제3세계 문학론의 현단계」, 1988) 수 있다고 지적한 사람에게는 좀 부당한 대접이 아닌가 한다.

임규찬의 비판은 두 대립항 가운데서 나의 ‘리얼리즘’ 편향이라고 할 만한 것을 되짚어보게 한 점에서는 고마우나, 모더니즘을 일면적으로 이해하고 배격했다는 단정은 받아들이기 어렵다. 일일이 이견을 밝히지 못하는 것이 아쉽지만, 앞으로 모더니즘을 어떻게 볼 것인가를 논의하는 가운데 대개는 자연히 해결되리라고 본다. 다만, 『놋쇠하늘 아래서』라는 제목에 빗대어 내 논의가 ‘쇠의 기운에 장악’되어 있다거나, ‘쇠에는 쇠로’라는 태도를 보여준다는 식의 정리에 대해서는 짚고 넘어가야 할 것 같다. ‘놋쇠하늘’은 중간계급을 중심세력으로 하는 꿰뚫기 힘든 기성질서를 지칭하는 비유로, 사물화의 지배와 자본의 지구화로 현상하는 탈근대 사회에 대한 제임슨의 관찰과 그다지 다르지 않다. 이같은 전일적 지배는 단순히 정치권력의 장악만이 아니라 상징화와 이데올로기 작용을 통해 인간심리의 심층에까지 미치게 마련이다. 놋쇠하늘은 우리의 바깥에만 존재하지 않고 우리의 내면에도 존재한다. 따라서 우리 ‘안’의 싸움을 도외시한 대응이 일면적임은 분명하겠으되, 거꾸로 내면의 놋쇠조각을 마치 거울처럼 들여다보는 태도도 문제이기는 마찬가지다. 이처럼 자신 속의 이 놋쇠 ‘타자’에 매몰되는 흐름을 거슬러, “머리 들어 창밖의 놋쇠하늘을 보라”고 일러주는 것이 ‘원론주의자’의 고집만은 아니다.

‘쇠에는 쇠로’라는 구호는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식의 함무라비 법전의 가혹한 징벌을 연상시키기 십상이니, 원론주의자의 ‘과격함’과 ‘일면성’을 환기하기에 제격일 것이다. 놋쇠하늘의 인식이 그처럼 단순소박한 것이 아님은 되풀이할 필요가 없겠으되, 한편으로 격렬한 변화의 와중일수록 원론의 되새김이 중요하다는 점은 그것대로 진실이다. 포스트모던 시대의 ‘새로운 리얼리즘’을 거론한다 해도, 후기자본주의 문화논리로서의 포스트모더니즘을 궁구하는 제임슨을 두고 ‘원론주의자’라 칭하기는 아무래도 어렵겠지만, 적어도 제임슨이 사물화에 맞서는 힘으로 되살리려 한 루카치(G. Lucács)에 대해서라면 기꺼이 그럴 사람은 많을 듯하다. 그러나 루카치의 리얼리즘 옹호는 모더니즘 문학이 전성기를 이루던 서구문학의 풍토 속에서였고, 당시 모더니즘 문학에 나타난 창조활동에서 무엇이 빠져 있으며 어떤 방향의 문학이 자본주의적 근대성에 올바로 맞서는 길인가를 질문하는 치열한 문제의식에서였다. 루카치를 20세기 모더니즘을 배격하고 19세기 리얼리즘을 옹호한 인물로 정리하는 것은 지나친 단순화이자 오해이다. 오히려 그는 리얼리즘 정신으로 당대에 지배적이었던 모더니즘의 혁신을 도모한 모더니즘의 진정한 친구였다고 할 수 있다. 임규찬 자신도 인용하다시피, 루카치는 리얼리즘-모더니즘의 이분법에 매몰된 영혼이 아니라 “두 기본적인 경향들 사이의, 동일한 작가 내에서뿐 아니라 동일한 시·희곡·소설 내에서도 종종 다툼이 일어나는 그런 갈등”[1. Georg Lukács, “Franz Kafka or Thomas Mann,” The Meaning of Contemporary Realis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