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정용준 鄭容俊

1981년 광주 출생. 2009년 『현대문학』으로 등단. 소설집 『가나』 『우리는 혈육이 아니냐』, 장편소설 『바벨』 등이 있음. sfcyjlove@naver.com

 

 

 

눈구름

 

 

1

 

어때요.

해영은 말을 멈췄다가 한 호흡 쉬고 목소리에 힘을 실어 말했다.

이 정도면 조건이 되나요?

닥터 한은 틀어진 안경테를 바로잡았다. 야구모자가 만든 그늘에 숨은 눈동자 두개가 한을 똑바로 보고 있었다. 한은 시선을 돌렸다.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잘 모르겠군요.

한은 왼쪽 가슴 포켓에서 펜을 꺼내 들고 차트를 뒤적이며 뜸을 들였다. 당황했으나 내색하지 않으려 일부러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러니까 유해영씨는 죄책감 때문에 괴로운 거군요. 우선 말씀드리고 싶은 건 생각 자체는 아무 힘이 없다는 겁니다. 긍정적인 생각이 사실을 바꾸지 못하고 반성이 죄의식을 지우지 못합니다. 자학한다고 해서 새 의미가 생기지도 않죠. 다시 말해 최면을 걸듯 자신에게 어떤 생각을 주입하는 건 좋은 방법이 아닙니다. 행복하다. 불행하다. 이건 결국 해석의 문제죠. 사람들은 생각만큼 행복하지도 불행하지도 않습니다. 상처받은 이들은 자신의 처지를 강박적으로 좋은 상태 아래 놓으려고 해요. 그러나 그 느낌과 해석은 불확실하죠. 다른 노력을 하지 말고 그저 있는 그대로의 마음을 들여다보세요. 그렇게 내성이 생기는 겁니다.

해영은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고개조차 까딱하지 않았다. 한은 의자를 끌고 책상에 바짝 붙어 앉았다.

좋아요. 좋아요. 그럼 물어보죠,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일부터 십까지.

해영이 날카롭게 외쳤다.

십일.

내내 고요했던 해영의 급작스런 소리에 한은 할 말을 잃었다.

이런 일반론… 지겨워요. 무의미한 이야기 그만두고 제 부탁을 들어주세요.

한은 헛웃음을 터뜨리며 안경 안으로 두 손을 집어넣어 마른세수를 했다. 양미간에는 어느새 칼로 그은 듯한 날카로운 주름이 새겨져 있었다. 그는 허리를 꼿꼿이 펴 해영과 일정한 거리를 확보한 뒤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 음성으로 말했다.

지금 무슨 말을 하시는 건지 스스로 알고 있습니까? 당신은 불안정해 보입니다.

아니요. 멀쩡해요. 선생님. 시험할 필요 없어요. 전 모든 걸 걸고 왔어요.

한은 의자를 뒤로 밀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망상이 깊군요. 이건 제 영역 밖입니다. 다른 의사를 추천해드리겠습니다.

소울트레인 방화사건. 서준. 그분의 추천으로 왔어요.

해영이 말했고 진료실엔 침묵이 흘렀다. 한은 마비된 사람처럼 꼼짝 않고 서 있기만 했다. 그 시간은 실제로 일분쯤이었지만 한에겐 무척이나 길게 느껴졌다. 기압이 바뀌어 공기가 희박해진 것처럼 호흡에 불편을 느꼈다. 한은 마른기침을 몇번 하고 작은 소리로 말했다.

협박인가요?

아니요. 그러나 그렇게 생각하신다면…… 아니, 그렇게 생각하셔도 할 수 없어요. 제겐 더이상 방법이 없거든요.

어떤 경계가 있다는 건 말입니다.

차분했던 한의 말투가 스타카토처럼 툭툭 끊어졌다.

어떤 의미론, 안쪽을 지켜주는, 그러니까 울타리 같은, 그런 겁니다. 그러나, 가까이 다가가면 위태로운 낭떠러지로 변하죠. 하물며, 그걸, 뛰어넘으려고 한다면? 무슨 일이 생길지 장담할 수 없어요.

해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한은 흔들림 없는 해영의 태도에 결국 빙긋 웃고 말았다.

 

 

2

 

‘감정을 없앴대요.’ 트레이를 정리하던 해영은 그 말을 듣고 살짝 고개를 돌렸다. 수간호사 김간과 박간이 시트를 갈며 대화하고 있었다. 교정직 간호사로 있던 박간은 한달 전부터 병원 혈액투석팀에서 근무하고 있었다. 해영이 아는 거라곤 더는 수형자들을 상대하고 싶지 않아 일을 그만뒀다는 것과 틈날 때마다 교도소에서의 경험을 자극적으로 풀며 사람들과 친해진다는 것뿐. 해영은 들리는 이야기에 관심이 없는 척 투석기를 만지며 귀를 기울였다. 박간은 질린 표정으로 혀를 내밀고 고개를 저었다.

지금 생각해도 소름 끼치네요. 그 사람, 누군지 알아요?

구겨진 시트를 손바닥으로 평평하게 만들던 김간이 호기심 어린 눈을 반짝이며 관심을 보였다.

소울트레인 방화범.

박간은 무표정한 얼굴로 꼿꼿이 서서 엄지와 검지를 핀셋처럼 만들어 관자놀이에서 뭔가를 집어 쑥, 뽑아내는 시늉을 했다.

이렇게 하더니 ‘농담이에요’라고 말하는 거 있죠?

으으으. 김간은 헌 시트를 돌돌 말아 빨래를 짜듯 움켜쥐고 몸서리쳤다.

나 같으면 무서워서 못 있을 것 같아.

그들은 다음달 스케줄에 관해 이야기하려다 근처에 해영이 있는 걸 보고 눈을 흘기며 병실을 빠져나갔다. 문이 닫히고 그들은 멀어졌지만 해영의 귀에는 둘이 무슨 말을 하는지 다 들렸다. 수도 없이 병원을 옮겼다. 소문은 소멸되지 않는 불길한 먹구름처럼 해영의 주위를 졸졸 따라다녔다. 어딜 가나 사람들은 해영에 대해 속삭였다. 처음엔 그 이야기를 입에 담아서는 안 되는 불온한 것으로 취급하면서도 말하고 또 말했다. 그들은 귓속말을 주고받았다. 일부러 해영이 없는 곳에서 입을 열었다. 그러나 사람들이 하는 말은 반드시 해영의 귀에 닿았다. 해영은 그들 앞에 내적인 고통을 드러낼 수도 없었다. 그들은 비난하고 손가락질하며 수군거렸다. ‘당신은 그럴 자격도 없다.’ 해영의 편에 선 이들도 있었다. ‘힘내라.’ ‘네 잘못이 아니다.’ 그러나 해영은 그런 말들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피해의식에 사로잡혀 그들의 호의와 따뜻함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따뜻한 말 속에 얼음이 박힌 것 같고 부드러운 표정 이면엔 냉혹한 얼굴이 숨어 있는 것 같았다. 한발 다가오는 사람들에게 두발 세발 도망가는 해영은 점점 더 고립되어갔다. 해영은 투석기 앞에 서서 튜브를 손에 쥐고 속을 빠르게 오가는 붉은 피를 가만히 응시하며 생각에 잠겼다. 평소 같았으면 동료들의 말과 눈빛에 상처를 받았겠지만 이번엔 그게 아니었다. 감정을 없앴다고? 감정을…… 그 순간 투석기에서 경고음이 울렸다. 튜브를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간 것이다. 해영은 꿈에서 깬 듯 튜브를 내려놓고 복도로 뛰어나갔다. 복도 끝에서 카트를 끌고 처치실로 들어가는 박간이 보였다.

 

박간은 처치실 문을 닫고 들어와 자신 앞에 선 해영을 보고 한발 뒤로 물러섰다. 병원에 와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듣고 필요한 정보를 수집했는데 가장 먼저 듣고, 많이 들은 이야기는 해영, 정확히 말하면 해영의 쌍둥이 동생 유해경에 관한 것이었다. 박간은 경계심을 보이며 불안한 눈으로 해영을 바라봤다. 해영은 박간에게 감정을 없앴다는 것이 무슨 뜻인지 물었다. 박간은 불쾌한 표정을 지으며 다짜고짜 말을 거는 해영을 무시하려 했으나 해영은 문 앞을 막고 서서 꿈쩍도 하지 않았다. 설명을 듣지 않으면 절대로 움직이지 않겠다는 의지가 느껴지는 그 눈빛에 박간은 위협을 느꼈다. 박간은 소울트레인에 불을 지른 뒤 출구를 걸어 잠그고 내부에 있는 사람들이 타 죽을 때까지 태연하게 지켜본 수형자에 대해 말했다. 수감된 지 3년 만에 급성신부전을 앓고 왼쪽 신장을 제거해야 했던 것과 어깨의 정맥에 도관을 삽입하는 혈관수술 중 혈관이 터진 일에 대해 말했다.

그 사람은 당황하지 않고 어깨에서 솟아오르는 핏줄기를, 그 피가 상의를 붉게 적시는 모습을 쳐다보더군요. 그 눈은 황홀하게 젖어 있었어요. 뭐랄까요, 막 태어난 작은 것들을 바라보는, 예뻐 죽겠다는 그런 눈 있잖아요. 난 황급히 거즈로 그의 어깨를 강하게 누르고 지혈을 했죠. 그는 태연했어요. 괜찮은데 뭘 그렇게 호들갑을 떠느냐는 듯 무심히 나를 보고 있었죠. 두려웠어요. 너무 가까이 붙어 있어 귓가에 그 사람의 더운 숨결이 느껴졌거든요. 무슨 말이든 해야 했어요. 그래서 이 말 저 말 횡설수설했고 신장을 떼어낸 일에 대해 말했죠. 괜찮다고 안심을 시켰어요. 생활하는 데 큰 문제는 없을 거다. 위로 아닌 위로를 건넸죠. 그는 말하더군요.

여기까지 말하면서 박간은 손으로 귀를 비비며 숨을 길게 내쉬었다. 그러나 목소리는 기묘한 흥분으로 떨리고 있었다.

괜찮습니다. 난 이미 다른 것도 없앴거든요. 그리고 말없이 나를 쳐다봤어요. 마치 그게 뭐냐고 물어봐달라는 듯이 말예요. 난 물었죠. 그게 뭔데요? 그는 팬터마임을 하는 것처럼 옆머리에서 뭔가를 뽑아내는 시늉을 했어요. 그리고 말하더군요. 감정.

 

감정. 그게 무슨 의미지? 해영은 머릿속에 총구멍이라도 난 듯 멍하게 서 있었다. 해영은 그게 정확히 무슨 뜻이냐고 물었다. 현실로 돌아온 박간은 경계하는 얼굴로 그걸 내가 어떻게 아느냐고, 그 꼴 더는 보기 싫어 그만둔 거라 말하곤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고개를 꼿꼿이 쳐들고 해영을 봤다. 이제 그만 비켜주시죠. 그 눈은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해영은 새벽 내내 그 생각을 떨칠 수 없었다. 김간은 넋을 잃고 복도 한가운데 차트를 들고 선 해영에게 소리를 질렀다. 평소 작은 일에도 트집을 잡는 김간이 흐트러진 해영을 가만둘 리 없었다. 그러나 해영은 그 말이 들리지 않는 것처럼 굴었다. 반응을 보이지 않고 가만히 서 있었던 것이다. 그 순간의 해영은 뇌가 망가진 임팔라 같았다. 송곳니에 목덜미를 물려 피가 질질 흐르는데도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 듯 무심히 앞으로만 걷는.

 

퇴근 후 아침. 해영의 엄마 소아는 주방에서 요리를 하고 있었다. 철제 압력솥에 담긴 전골이 가스레인지의 중간불 위에서 끓고 있었다. 그녀는 푸른빛이 도는 어두운 주방에 서서 초점 없는 눈으로 기포가 터지는 걸쭉한 회색 국물을 바라봤다. 해영은 엄마의 어깨를 붙잡아 조심스럽게 끌어 의자에 앉게 도와주었다. 소아가 해영의 귓가에 속삭였다.

그들은 갔니?

해영은 오랫동안 반복된 무미건조한 어투로 대꾸했다.

바깥엔 아무도 없어.

소아는 어깨에 닿은 해영의 손길을 뿌리치며 날카롭게 쏘아붙였다.

그런 식으로 날 위로할 필요 없어. 저렇게 계속 수군대고 있는데. 아무도 없다니. 사린, 사린, 사린, 이렇게 말하고 있잖아.

해영은 엄마를 물끄러미 내려다봤다. 수렁의 밑바닥에 무기력하게 누워 미안합니다. 제가 죽일 년입니다. 사린, 사린, 중얼거리는 불행한 여인. 해경이라는 악인을 낳은 죄인 중의 죄인. 죽일 년 소아. 해영은 가스레인지의 불을 끄고 방으로 들어갔다.

 

커튼으로 창을 가려도 환한 방. 해영은 정수리를 가린 부분가발을 뜯어내고 피곤한 몸으로 침대에 누웠다. 벽을 보고 몸을 웅크린 해영의 눈동자에 휴대폰 액정화면이 반사됐다. 두려움과 공포 속에 강박적으로 사건사고를 검색하고 댓글을 확인했다. 테바(tebah)가 운영하는 블로그와 트위터에 들어가 그가 찍어 올린 까페의 풍경과 두꺼운 철학서, 만년필로 노트에 적어 내린 히브리어를 봤다. 리트윗한 강력사건들과 그것에 관한 몇줄의 냉혹한 평가도 읽었다. 팔로워들에게 호소하고 있었다. ‘피해자의 억울함을, 가해자의 끔찍함을 잊어선 안 됩니다.’ 해영은 그가 올린 글을 읽을 때마다 불덩이를 삼키는 것 같았다. 이건 언제 끝나는 걸까? 호흡이 가빠지고 기분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더러워져 손에 쥐고 있는 걸 바닥에 던져버렸다. 자야 한다. 자야 한다. 자고 싶다. 자고 싶다. 그러나 어째서인지 눈은 감기지 않고 정신은 점점 또렷해졌다. 해영은 무의식적으로 정수리에 손을 올려 머리카락을 뽑아냈다. 둥글게 탈모되어 두피가 하얗게 드러난 부분이 조금 더 넓어졌다. 그 순간 해영의 머릿속으로 섬광처럼 그 말이 떠올랐다.

‘감정을 없앴다.’

해영은 책상으로 달려갔다. ‘소울트레인’을 검색해 몇몇 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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